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36
오행성에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고 태양은 흩어져 사라졌다.
“귀일종이 감히 도고 일맥을 야만적인 자들이라 했더냐!”
흐릿한 인영의 냉랭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에도 귀일종 수련자들은 일말의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흐릿한 인영이 쌍행 갑옷을 입은 노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발휘하던 쌍행 갑옷의 노인조차 그 힘 앞에 도망은커녕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버둥거릴 뿐이었다.
흐릿한 인영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가자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쌍행 갑옷은 종잇장처럼 가루로 부서져 흩어졌다.
“그 말을 한 게 네놈이냐?”
이 광경에 마씨 노인은 두려움에 두 다리가 달달 떨렸고 운일봉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대, 대천존⋯⋯.”
경련을 일으키던 마씨 노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일종의 갑옷을 이토록 가볍게 파괴할 수 있는 사람, 그중 도고 일맥을 우습게 여겼다는 사실에 이 정도로 분개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현라 대천존! 크헉!”
마씨 노인은 짧은 외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동시에 비틀거리며 물러난 그의 두 눈에는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특별한 날
“나를 아느냐?”
흐릿한 인영의 목소리에 마씨 노인은 더더욱 격하게 떨었다.
노인은 이제 흐릿한 인영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흐릿함은 신통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홉 개의 태양 특유의 위압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대천존 특유의 기이한 기운 때문에 그들이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같은 대천존이라도 서로의 진정한 생김새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마씨 노인이 자신을 알아보자 현라가 의아해할 만도 했다.
현라가 손을 살짝 휘두르자 쾅 소리와 함께 갑옷을 잃은 노인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피범벅이 된 살점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손짓 하나로 순식간에 강력한 수련자 하나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린 현라는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이 닿은 자들은 심신이 진동했고 마씨 노인과 운일봉 외의 나머지는 버티지 못하고 꿇어앉아 바들바들 떨었다.
마씨 노인은 이를 악문 채 꼿꼿이 서 있으려 했으나 두 다리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운일봉의 창백한 얼굴에는 콩알만 한 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땀은 순식간에 그의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현라의 눈빛에 육신은 저절로 꿇어앉으려 했지만 오만하고 고고한 그는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그의 몸은 바들바들 떨려왔고 체내에서는 펑, 펑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전신의 피와 살과 뼈가 압박받고 있는 것 같았다.
“제법이구나!”
현라 대천존은 뒷짐을 진 채 허공에 서서 운일봉을 내려다보았다.
“내 위압감 아래 이렇게까지 버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 네가 우리 도고 일맥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깝구나.”
현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운일봉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자 운일봉은 한 움큼 피를 토했고 결국 쾅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씨 노인 역시 창백한 얼굴로 쓰게 웃으며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더 저항했다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았다.
“대천존, 귀일종 대장로의 체면을 감안해 부디 저희가 이곳을 떠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당장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이때 현라 대천존은 대답 대신 탑 꼭대기를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꼭대기 층이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는 새카만 갑옷 한 벌이 기이한 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이 갑옷은 내가 가지고 가도록 하지. 갑옷을 되찾아갈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된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라!”
현라 대천존이 덤덤하게 말하는 동안 갑옷은 오행의 힘에 휩싸인 채 끌려오다가 바로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어서 현라 또한 곧장 돌아서 한 걸음 나서며 천천히 사라졌다.
“아직은 너희들이 떠날 때가 아니다.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현라가 떠나기 직전, 그의 목소리가 오행성에 울려 퍼졌다.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마씨 노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머지 사람들도 뒤를 따랐다.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들어 현라 대천존이 떠난 하늘을 바라보는 운일봉의 표정은 어두웠으나 그의 두 눈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대천존이… 열 번째 태양이 될 것이다!”
그는 주먹을 바르쥐며 중얼거렸다.
그를 바라보던 마씨 노인은 어두운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지금껏 기다려온 우리의 계획은 이제 성공할 수 없게 됐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해도 저자가 있는 한⋯⋯.”
그때 운일봉이 노인의 말을 받았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한제가 현라 대천존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라 대천존이 우리에게 당장 이곳을 떠나지는 말라고 한 이유가 명확하군요.”
역시 운일봉은 귀일종의 핵심 제자이자 손에 꼽는 천재로 심지어 현라 대천존의 칭찬을 들었을 만큼 똑똑한 자였다. 최소한 지능으로는 결코 한제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런 만큼 몇 가지 단서만으로 상황을 대부분 파악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네 말이 맞다. 분명 그럴 거야. 현라 대천존은 이한제를 시험하고 있는 게다. 선강 대륙에서 여기까지 온 것도 이한제를 위해서겠지!”
마씨 노인이 눈을 번득였다.
“당시 엽막은 이 동부계에 들어와 죽음을 맞이하고 3천 개의 핏방울로 고족을 만들었습니다. 이한제는 분명 엽막의 유산을 얻었을 겁니다. 그 결과 현라 대천존의 시선을 사로잡았겠지요.”
운일봉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현라 대천존은 우리를 숫돌로 쓰려는 겁니다. 이한제를 잘 벼릴 숫돌 말이지요. 떠나기 전,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는 다시는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겁니다.”
★ ★ ★
현라 대천존은 고개를 돌려 오행성 방향을 돌아보았다.
“똑똑한 자로군. 이한제와 비교해 누가 더 뛰어날까? 아마도 저자겠지. 허나 안타깝게도 그는 선족이야.”
현라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젓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한제는 지하마수 등에 앉아 두 눈을 감은 채 체내의 부상을 빠르게 치료해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탁한 숨을 뱉어냈다.
‘오행성 귀일종은 세 번째 혼을 찾으려 하는 강한 세력이야.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이제는 나도 세 번째 혼을 찾는 무리에 가담할 때가 된 거야. 세 번째 주혼, 너는 대체 누구냐!’
한제는 말없이 지하마수의 등을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지하마수는 더욱 속도를 올려 달려 나가더니 이내 이 우주에서 사라졌다.
지하마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미 새로운 선계를 둘러싼 은하에 이르렀을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지하마수를 거두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번쩍이는 은하의 빛 덕분에 그는 찬란해 보였지만 동시에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그는 이내 한 걸음 내딛더니 긴 빛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 새로운 선계에 들어섰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어디선가 현라 대천존이 걸어 나오더니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한제를 따라 선계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흐릿하고도 모호해 그 앞에 서더라도 그 존재를 눈치챌 수는 없었다.
한데 그가 막 들어서려던 순간, 저 앞에서 한제가 돌연 우뚝 멈추더니 몸을 홱 돌렸다. 동시에 서늘한 눈빛으로 현라 대천존을 응시했다.
현라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곳까지 나를 따라와 놓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건가!”
한제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한 줄기 살기까지 어려 있었다.
현라 대천존은 기이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지도 숨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주지!”
한제는 차게 웃으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일곱 개의 본원이 융합된 한 줄기 힘이 뿜어져 나와 광풍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콰쾅!
폭풍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밀려가는 동안 한제는 다시 몸을 돌려 선계를 향해 나아갔다.
사실 그는 현라 대천존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특유의 신중함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뿐이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몰라도 방금 오행성에서 나온 그로서는 마씨 노인이 몰래 쫓아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격을 가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그제야 미행하는 이가 없음을 확신한 그였다.
한제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현라 대천존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두 눈에는 감탄의 빛이 어려 있었다.
‘신중한 녀석이로군! 방금 두 눈에는 모종의 신통술이 깃들어 있어 모든 것을 관철하는 듯 보였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미행을 들켰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겠어. 이는 무척 간단한 데다가 그리 뛰어나지도 않은 방법이지만 실용적이기는 하군.’
현라는 빙긋 웃었다.
‘오행진에서 이미 녀석의 패기는 알아봤지! 구전 심륜에 휩싸였을 때는 영특함을 알아봤고! 오행성의 탑 밖에 이르렀을 때는 과감함과 치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신중함까지 확인했다. 이한제, 정말로 대단한 녀석이야! 그러나 내가 선택한 자라면 인정과 의리를 가장 중히 여겨야 해! 과연 그런 덕목까지 갖췄을까?’
현라는 생각에 잠긴 채 은하수의 금제를 뚫고 이 아름다운 선계에 이르렀다.
선계의 파란 하늘에는 연기 같은 무언가가 떠다니고 있었다. 선기 같은 그것이 줄기줄기 구름과 어우러지는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지면은 많은 풀들로 푸르렀으며, 산들이 줄을 이었고 강과 개울이 졸졸 흘렀다. 짙은 흙 향기를 맡고 있노라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한제가 선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남몽도존뿐이었다.
한제는 곧장 이전에 폐관수련을 했던 산봉우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고 두 눈은 그리움과 슬픔으로 물들었다. 매해 이날이 되면 그는 한 가지 기억을 잊기 위해 애쓰곤 했다. 이를 위해 일부러 바쁘게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평안한 상황에서는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이날이 왔군.”
한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