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37
현라 대천존은 어느새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묵묵히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오른손으로 전방의 허공을 움켜쥐어 귀면기를 소환해 온몸을 감쌌다.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만큼은 홀로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선계의 상공. 하늘은 맑았고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햇빛은 찬란하게 반짝이며 대지를 비췄다. 따스한 빛이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그는 귀면기에 휩싸인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완아⋯⋯. 곧 선강 대륙에 갈 거야. 그곳에서라면 반드시 널 살려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지. 날 믿어줘. 그때 약속했던 것처럼 하늘이 네 목숨을 거둬간다면 난 하늘로부터 네 목숨을 되찾아올 거야!”
한제는 자신이 동부계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곧 이곳을 떠나 낯선 선강 대륙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한제는 평생 수많은 낯선 곳에 가본 적이 있고 그의 행보에는 언제나 고독과 외로움이 함께였다. 그럴수록 모완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졌으나 그 기억 덕분에 평생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을 견뎌낼 수 있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야. 모완, 기억해?”
한제는 자신의 나이도 생일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오래 전의 오늘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이날이 오면 그는 알싸한 술병을 벗 삼아 보내곤 했다. 뜨겁고 매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싸한 느낌에 그리움과 고독, 쓸쓸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그 기억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완아, 나는 이천매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미안⋯⋯.”
한제는 귀면기로 온몸을 감은 채 술을 들이켰다.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었거든. 완아, 난 평생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 너를 통해 애정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았으니까.”
2천 년 전 어느 날, 수마해 근처에서 울려 퍼진 살려달라는 외침이 복수심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유약하고 무기력하고 가련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한제는 그때만 해도 알지 못하던, 하지만 그의 평생에 깊은 흔적을 남긴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그의 여인이었다.
한제는 치미는 아픔에 한숨을 내쉬고는 단숨에 술병을 비우고 새로운 술병을 꺼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현라 대천존은 한제의 고독과 외로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완아,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내 곧 반드시 해낼 테니!”
입가로 흘러내린 술이 옷섶을 적셨다.
꿈속의 행복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피천관을 소환했다. 어스름한 빛에 휩싸인 피천관이 나타났고 그 안에 이모완이 잠자듯 누워 있었다. 그녀를 향한 한제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마음은 칼에 찔린 듯 아파왔다.
한제는 조심스레 피천관의 뚜껑을 살짝 열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이내 그의 손이 모완의 얼굴에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완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노라니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무정한 그를 침잠시켰다.
“완아⋯⋯.”
한제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뺨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모완의 옷에 흔적을 남겼다.
“네게는 한 줄기 혼조차 남아 있지 않구나. 천벌 안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지. 허나 그 누구의 손에 들려 있더라도 내가 반드시 되찾을 거야. 상대가 누구라 해도!”
한제는 또다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눈물과 함께 술이 그의 목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었다.
빈 술병을 내던진 그는 미간을 두드렸고 왼손을 모완의 미간에 얹은 채 두 눈을 감았다.
“귀면 환각, 1천 년 전의 꿈!”
한제가 중얼거리자 그의 몸을 감싼 귀면기는 왜곡됐고 그 위에 그려진 귀신 얼굴은 소리 없이 포효하며 깃발에서 쑥 빠져나와 한제의 미간으로 달려들었다. 귀신이 미간 안으로 들어가자 한제의 몸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보이지 않게 됐다.
지금의 상황을 어렴풋이 파악한 현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제를 감싼 안개를 살짝 건드려 한 줄기 신식을 그 안으로 주입했다.
“이한제, 너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네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난 너를 내 유일한 제자로 택했고 내가 환생할 때까지 나를 보호할 사람으로 택했다. 너는 우리 도고 일맥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중얼거리던 현라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현라의 심신은 한제의 꿈속에 진입하게 됐다. 동시에 그는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하늘 저 멀리 짙은 불빛이 번득였고 그 아래로 수련자들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발휘한 신통술이 요란하게 충돌했다.
한제는 하늘에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에 담긴 혼란의 빛이 흩어져 사라질 무렵, 고개를 돌린 그는 멀리 수마해 쪽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한참 뒤, 두 갈래의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사내와 한 여인. 여인은 창백한 얼굴에 긴장한 모습이었고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위태로워 보였다. 버들잎처럼 유약하며 연꽃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바로 이모완이었다.
바로 뒤로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에는 분칠을 해 요사스러우면서도 음탕해 보이는 사내가 여유롭게 그 여인을 쫓고 있었다.
“낭자! 낭자와 같이 온 대원들은 이미 모두 내 손에 죽었소. 어디,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봅시다.”
사내는 비릿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북 하는 소리와 함께 모완이 입은 옷의 절반이 찢겨나가면서 피부가 드러났다.
이에 모완이 비명을 내지르자 사내는 더욱 음탕한 눈빛을 번득였다.
바로 그때, 모완이 한제를 보았다. 분명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너였구나! 나 좀 살려줘!”
위급한 상황인 만큼 그녀는 곧장 한제에게 다가오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저 사람은 선무국 쌍수문의 장로야. 내가 천리단을 한 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저렇게⋯⋯.”
그녀는 천리단을 꺼내 한제에게 내보였다. 천리단을 대가로 해서라도 한제의 도움을 받기 위함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흠칫 놀랐다. 한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에 모완은 마음이 떨려왔다.
“너⋯⋯.”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그때, 그녀를 쫓던 청년이 냉소를 드리웠다. 그 역시 한제를 발견한 상태였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여덟 자루의 비검이 나타나 마치 회오리처럼 회전하면서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모완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모완이 당황하던 그때, 고개를 든 한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돌진해오던 여덟 자루의 비검은 곧장 무너져 내렸고 그것을 날려 보낸 청년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져 순식간에 찢겨버리고 말았다.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완은 멍하니 한제의 품에 안긴 채 그리움으로 가득한 한제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사, 사형⋯⋯.”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모완의 창백한 얼굴에 두려움과 공포가 드리웠다.
모완의 그런 눈빛에 한제는 가슴이 쓰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난 이한제라고 한다.”
한제가 중얼거리는 사이 모완은 곧장 수천 척 밖으로 도망쳤다. 그곳에 이른 뒤에야 고개를 돌려 겁에 질린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던 그녀는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하고는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놀라 황급히 달아나는 모완을 보며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 깔린 씁쓸함과 그리움을 읽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라 대천존은 멀리서 묵묵히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도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느 정도의 그리움과 슬픔이기에 꿈에서라도 행복을 찾으려 하는 것인가.”
현라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는 모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두 눈을 감자 사방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고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다시 선계였다.
그는 산봉우리 위에 앉아 피천관 안에 잠자듯 누운 모완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느덧 어두워져 있었다. 밤하늘의 둥근 달에는 두 사람의 인영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한 쌍의 남녀였다.
맑은 바람이 살랑 불어와 한제의 하얀 머리카락 몇 올을 날렸다. 모완의 손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오랜 세월을 지나 보낸 한제의 거친 얼굴을 매만지는 듯했다.
1천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날 밤, 달과 별이 밝아 잠들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날 밤, 모완과 함께한 한제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불어온 바람은 피천관에 누워 있는 모완의 검은 머리도 가볍게 스쳤다. 검은 머리카락은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듯 휘날리다가 관 벽에 부딪히더니 떨어져 내렸다.
한제는 저 멀리 산봉우리 위로 남색 빛으로 뒤덮인 노인과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남몽도존과 이천매였다.
이 부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한제가 꿈속에 빠져들었다가 이모완을 매만지며 눈물 짓는 것까지 모두 지켜본 모양이었다. 한제가 그 두 사람을 보았을 때 그들은 돌아서서 점차 멀어져갔다.
여인의 뒷모습에서 짙은 고독이 느껴졌다.
한제는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이날 밤은 그와 모완의 밤이었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다.
한참 뒤, 하늘 끄트머리에서 떠오른 아침 해에 어둠이 흩어졌다. 눈을 뜬 한제는 피천관 안의 모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완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중얼거리던 한제는 손을 부드럽게 휘둘렀다. 피천관은 한 줄기 어스름한 빛이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는 하늘에 떠오른 달과 해를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세 번째 주혼을 찾으러 갈 시간이군! 칠채도인과 전가 노인 등도 분명 어느 정도의 단서를 파악했겠지.”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중얼거렸다.
★ ★ ★
선계 밖 우주.
한제의 예측대로 4대 장군은 천도의 무시무시함을 경험한 뒤에도 세 번째 주혼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운해성역을 이동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는 거대한 호리병이 끊임없이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안개는 마치 이정표처럼 흩어진 뒤 끊임없이 꿈틀거리면서 네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들은 하나하나의 성역과 대륙을 꼼꼼히 살피며 나천성역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뒤쪽으로 음침한 얼굴의 전가 노인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그와 4대 장군은 모종의 협상이라도 맺은 듯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한참 뒤, 4대 장군 머리 위에 떠 있던 호리병이 돌연 더욱 많은 안개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 안개는 사방을 휩쓸면서 거대한 무언가를 형성했는데 기린과 닮기도 했으나 개처럼 생긴 거대한 흉수였다. 온몸이 안개로 이루어진 이 흉수는 머리를 휘두르며 냄새를 맡듯 코를 킁킁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