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39
“그렇습니다. 첫 번째 환각일 뿐입니다.”
한제 역시 가부좌를 튼 채 청수를 마주보았다.
“정말 사실적인 환각이로구나.”
청수는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것은 멀리 떨어진 황궁 안, 파괴되지 않은 홰나무였다. 이미 오래 살아온 듯 비쩍 마른 홰나무는 힘겹게 살아남은 상태였다.
나무를 바라보던 청수의 두 눈에서 살육의 빛은 점점 흩어져 사라졌다.
“두 번째 환각으로 들어가자.”
한제는 결인을 그린 두 손을 양쪽으로 뻗으며 소매를 휘둘렀다.
첫 번째 환각 속 세상은 곧장 왜곡됐고 먹먹한 콰쾅 소리와 함께 줄기줄기 검은 기운이 지면을 적신 피와 사방에 흩어진 죽은 이들의 사지로부터 피어올랐다.
이내 첫 번째 환각의 모든 것이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고 이 검은 연기는 빠른 속도로 응집해 거대한 귀신 얼굴이 되더니 소리 없이 포효하면서 두 사람을 삼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순간, 귀신 얼굴에 한제와 청수의 심신에서는 다시 콰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나 심신과 혼백을 완전히 뽑아내기 시작했고 뽑힌 심신과 혼백은 회오리에 휘말렸다. 오래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처음 열렸을 당시, 혼란 속 동부의 핵심 구역에 한제가 허상으로 나타났다.
동부계의 중추이기도 한 이곳에는 선강 대륙으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당시 운해성역 균열 안, 칠채도인의 환각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천도가 입을 쩍 벌린 채 연도비를 집어삼킴에 따라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도비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는 동안 천도는 다시 무너져 내리며 분리됐고 동시에 일곱 색채의 도포를 입은 칠채선존은 슬픔에 찬 표정으로 와해됐다. 칠채선존의 육신은 완전히 찢겨버렸고 체내의 원신과 혼백은 갈라져 삼혼과 칠백으로 나뉘어 곧장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는 칠채도인의 환각에서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 환각은 한제가 주동적으로 펼친 것이라 지난번 보았던 칠채도인의 환각보다 훨씬 또렷했다.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일곱 개의 혼백인 칠백이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을 띤 일곱 개의 혼백은 빠른 속도로 흩어져 환생했다. 그중 붉은색 혼백은 칠채선존이 평생 자행했던 살육을 관장했다. 이 혼백은 주위로 달려든 여러 원혼을 모두 죽이고 흡수하더니 눈부신 붉은 빛을 번득이며 저 먼 곳으로 돌진했다.
한제는 이 붉은 혼백에서 청수의 기운을 느꼈다.
붉은색 혼백이 사라지면서 환생한 순간, 그 안에서 흐릿한 인영이 응집됐다. 바로 청수였다.
파란색 혼백은 칠채선존의 자질을 품은 채 선존으로 거듭났고 공겁기 수준에 이르렀다. 한제는 그 혼백으로부터도 익숙한 기운을 감지하고는 화들짝 놀라 찬 숨을 들이마셨다.
“사⋯⋯ 사도환! 사도환의 자질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이유가 있었군!”
한제는 중얼거리며 세 번째 혼백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주황색 혼백에서 발산되는 빛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올곧은 기운이 담겨 있었다. 바르지 못한 마음을 먹은 자들이라면 모두 벌벌 떨게 할 만큼 강하고도 바른 기운을 품은 이 혼백은 칠채선존의 양심이었다. 이 세 번째 혼백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세상 만물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을 터였다.
이 혼백이 흩어지며 환생을 한 순간, 한제는 또 한 번의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흐릿한 인영은 청림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의 선계의 선제로서 우계를 위해 장존의 거듭된 유혹을 견뎌내고 중상에 죽음 직전에 이르면서까지 우계를 보호하려 한 장본인. 그런 굳은 의지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칠채선존의 양심의 화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제는 네 번째 혼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노란색의 이 혼백은 우주를 밝게 비추었다. 칠백이 아니라 삼혼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밝은 빛을 발하는 이 혼백은 칠채선존의 행운을 품고 있었다. 이 혼백의 환생은 아마 다른 모든 이들의 질투를 받을 만큼 어마어마한 행운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었다.
한제는 ‘행운’이라는 말에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고 네 번째 혼백이 환생한 순간 자신이 예측한 그 사람, 탐랑의 희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주혼이 돌아오다
다섯 번째 혼백은 초록색이었다. 나무를 뜻하듯 가지의 색도 약간 섞인 이 혼백은 칠채선존의 본능이었다. 이 혼백으로 환생한 사람이 일반인이라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요, 수련자라면 비록 수준은 그리 높지 않더라도 큰 나무가 무성한 가지를 뻗듯 분신술에 능할 터였다.
이 혼백은 빛이 밝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한제는 환생을 거쳐 흐릿한 인영이 된 혼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산령상인⋯⋯ 저자였군.”
한제는 떨리는 심신을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여섯 번째 혼백은 남색으로 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얼음처럼 서늘한 이중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이 혼백은 칠채선존이 평생 느껴온 감정의 화신이었다. 칠채선존은 평생 수많은 여인을 거느린 바 있으나 그가 아내로 삼은 것은 반산몽뿐이었다.
그런 감정의 화신인 여섯 번째 혼백은 칠채선존의 복잡한 심경을 품고 있었다. 그는 반산몽을 사랑했으나 동시에 그녀를 증오하기도 했다. 이런 상반된 감정으로 인해 여섯 번째 혼백은 다른 혼백들과 약간의 달랐다.
여섯 번째 혼백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한제의 심신은 또다시 콰쾅 하고 울렸다. 그 혼백을 바라보던 한제의 두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빛도 어려 있었다.
“모은미⋯⋯.”
한제는 흐릿한 모습으로 나타난 상대를 단박에 알아보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모은미는 부드러우면서도 냉혹한 여인이었다. 평생 또는 수차례 윤회를 거듭하는 동안 내내 그랬다. 또한 그녀와 한제 사이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분리된 일곱 개의 혼백은 각자 독립적인 개체가 됐다. 서로 약간씩 연계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연계는 흐릿해서 거의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이들은 세 주혼에 녹아들지 않는 이상 혼백은 영원히 흩어져 사라지지 않은 채 일반인처럼 차례차례 윤회를 거듭하게 될 터였다.
일곱 번째 혼백은 보라색으로 칠채선존이 붕괴하기 직전 느꼈던 분노와 광기, 짙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땅을 그리고 그가 깊이 사랑했던 여인을 증오했다. 평생 영광되고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왔을지 모르나 불쌍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무너져 내리면서 느꼈던 분노와 광기를 흩어 없애지 않고 응집시켜 일곱 번째 혼백을 형성했다.
이 혼백은 가장 먼저 환생했으나 칠채선존의 분노와 광기로 이루어진 안개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한제로서는 그것의 환생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제는 분명 낯익은 사람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일곱 혼백의 환생은 느리게 느껴졌지만 실은 찰나의 순간 발생한 일이었다.
이 혼백들이 환생을 거쳐 하나하나 흩어져 사라진 이때, 한제는 세 번째 주혼을 확인했을 때 못지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충격을 느꼈다.
세 개의 주혼은 칠채선존의 붕괴에 따라 세 개의 방향으로 각각 흩어진 상태였다. 그중 하나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일곱 색채의 빛을 번득이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계외라는 이름으로 불릴 곳으로 돌진했다. 그 혼은 그곳에서 칠채선존이 평생 얻었던 신통술의 화신인 칠채도인이 됐다.
반면 첫 번째 주혼과 반대편으로 돌진한 두 번째 주혼은 차례차례 윤회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나천성역에서 평범한 한 마리 흉수가 됐다.
녀석의 기억은 조금씩 되살아났고 그렇게 기억이 완전해졌을 때, 중상을 입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된 노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부터 이 흉수가 머무는 수련성에 추락했다.
전가 노인이었다.
현겁을 통과하는 데 실패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원신마저 무너져 내린 그는 죽음에 거의 이르러 있었다. 그는 기이한 눈빛을 번득이는 흉수 한 마리가 자신을 덮쳐드는 것을 보며 덧없이 웃었다.
한제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또한 그는 세 번째 주혼 역시 볼 수 있었다. 가장 먼 곳으로 날아간 세 번째 주혼은 우주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한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뒤따랐다.
이것은 그의 두 번째 추격이었고 칠채도인의 방해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세 번째 주혼이 누구인지 밝혀내야만 했다. 세 번째 주혼의 정체와 소재가 곧 밝혀질 터였다.
세 번째 주혼은 소하성역을 지나 곤허성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천천히 속도를 늦춰 휴식을 취할 곳을 찾았다.
한제는 최대한의 속도로 겨우 이 주혼을 뒤쫓았다. 세 번째 주혼은 흐릿한 안개로 휩싸여 있었으며 그 안에는 어떠한 허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주혼은 다른 혼백이나 주혼과는 다르게 환생하기 전에는 모습을 갖출 수 없는 듯했다.
세 번째 주혼은 이내 어느 황량한 수련성에 잠시 머무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움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세 번째 주혼은 곤허성역을 한 바퀴 돈 뒤 갑자기 속도를 높이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곤허성역을 떠나 운해성역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당시 환각 속에서 세 번째 주혼을 쫓던 칠채도인은 이 세 번째 주혼이 운해성역으로 향하는 것은 확인하지 못했겠군.’
한데 그런 생각이 든 순간 한제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세 번째 주혼, 곤허성역을 한 바퀴 돌았어. 뭔가를 찾고 있는 걸까? 아니면 언젠가 칠채도인이나 누군가가 자신을 찾을 것을 알고 일부러 저렇게 맴돌면서 시간을 끈 걸까?’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런 생각을 억눌렀다. 자신이 생각한 것이지만 너무나 터무니없는 추측 같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혼은 운해성역의 한 폐허가 된 수련성으로 돌진했다. 한제는 형형한 눈으로 그 수련성을 응시했다.
세월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어느 날, 이 수련성이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조각들을 사방으로 흩었다. 동시에 무너져 내린 수련성으로부터 짙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중 어느 조각에서는 죽은 뱀 한 마리가 한 줄기 하얀 빛이 되어 하늘로 치솟아 성역으로 올라갔다.
한제는 흠칫 놀라면서도 그 빛에 집중해 추격했다. 그는 그 빛으로부터 세 번째 주혼이 환생한 흔적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가 보려는 것은 어마어마한 시간이 흐른 후 세 번째 주혼이 무엇으로 환생했느냐였다.
‘일반인? 수련자? 풀이나 꽃? 나무?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흉수?’
추격은 4대 성역을 가로지르며 이어졌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주혼은 일반인 서생으로 환생하기도 했다. 책벌레처럼 책만 들여다보다가 입신양명하는 데 성공한 이 서생이 늙어 죽자 노인의 이마에서 튀어나온 하얀 빛은 또 한 번의 환생을 겪었다.
수차례 환생을 되풀이하는 동안 세 번째 주혼은 사내로도 여인으로도 태어났다. 거대한 나무로 환생하기도 했다. 묘목으로 심어진 뒤 수천 년을 지나 보낸 나무는 점차 말라 비틀어가다가 끝내 생을 다했다.
그런가 하면 한번은 수련자로 환생하기도 했다. 이 수련자의 수준은 높지 않아 결국 결단기에서 성장을 멈추었고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세월은 쉴 새 없이 흘렀다. 세 번째 주혼은 수차례 윤회를 이어가는 동안 곤허성역의 어느 수련성에 머물기 시작했다.
한데 그 수련성을 본 순간 한제의 심신이 진동했다.
“주작성!”
그는 이것이 세 번째 주혼이 겪는 환생의 끝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주작성을 본 순간 어떤 추측이 떠올랐다.
주작성에서 세 번째 주혼은 일반인이 됐다. 이 일반인은 평생 수련자의 길에 오르지 않았지만 매우 찬란한 인생을 살며 조나라의 대학자가 됐다.
그의 이름은 바로 소도영이었다.
소도영의 삶에서 한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심신은 충격에 뒤흔들렸다. 그는 어째서 소도영이 몽도 속 자신의 꿈에 나타났는지, 어째서 그 안에서 자신을 제자로 받아주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그와 소도영 사이에 인과의 윤회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제는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결과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인과의 본원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지만 세 번째 주혼이 소도영으로 환생한 순간 그 본원은 흐릿해진 것 같았다.
혼란에 빠진 한제는 버드나무 씨앗을 좋아하는 소도영을 웃음을 머금은 채 죽음을 맞이한 그를 죽은 후 그의 육체로부터 튀어나온 하얀 빛이 우주로 나온 뒤 다시 한번 방향을 바꿔 나천성역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세 번째 주혼을 따라 나천성역으로 들어간 한제는 세 번째 주혼이 그곳에서 한 마리 물고기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청령성의 한 강이었다.
이 물고기는 강 속을 즐겁게 노닐다가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한제는 세 번째 주혼의 이번 죽음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고기로서 죽음을 맞은 세 번째 주혼이 청령성을 떠나지 않고 그 강 속의 다른 물고기로 환생한 것이다. 여러 차례 환생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마치 뭔가를 기다리듯 이 강을 떠나지 않았다.
익숙한 수련성에서 맞이한 이 기이한 현상에 한제는 흐릿한 또 하나의 추측을 하게 됐다.
이곳에서 수백 번의 환생을 거듭한 세 번째 주혼은 마지막으로 한 어부의 낚싯줄에 걸렸다. 이 물고기를 낚은 어부는 기뻐하며 낚싯줄을 당겼다. 마치 그 물고기가 수백 차례의 환생을 반복하면서 기다려온 것이 이 어부나 그가 낚싯줄에 달아놓은 미끼이기라도 한 것처럼!
“집사람이 곧 해산을 앞두고 있으니 오늘은 이 물고기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야겠군!”
어부가 삿갓을 벗었다. 서른이나 됐을까 한 사내의 몸집은 크지 않았고 다소 허약해 보였다. 하지만 표정에서만큼은 해탈한 듯한 느낌이 있어 어부라기보다는 선비에 가까워 보였다.
그는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비치는 물고기 배에서는 하얀 빛이 반짝여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사내는 빙긋 웃으며 물고기를 담은 항아리를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 광경에 한제는 방금 전의 추측을 확신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어부를 따라갔다.
2각 가량 걸은 끝에 어부는 강가의 대나무 숲속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