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63
동시에 여덟 개의 연기 기둥 안에서 흐릿한 고요의 허상이 하나씩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포효하던 이 고요들은 요기를 짙게 풍기며 한제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전가 노인은 여덟 개의 봉화와 그 안에서 피어오른 연기 기둥이 한데 연결돼 형성한 폭풍 안으로 뛰어들려 했다. 하지만 그때, 꼭두각시 이사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검지로 전가 노인을 가리켰다.
“마도 생사역동(生死逆動)!”
그 순간, 전가 노인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자신의 체내에 담긴 생기가 빠르게 죽음의 기운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또한 한제의 손가락질 한 번에 이 오래된 무덤은 층층이 무너져 내릴 조짐을 보였다.
이 층도 아래층도 그리고 안개로 가득한 위층도 죽음의 기운으로 휩싸여갔다.
대부분 지난 오랜 시간 이곳에서 죽은 생명의 것이나, 이 죽음의 기운은 한제의 손가락을 따라 각 층을 뚫고 그에게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한제 주위에는 요기로 이루어진 폭풍과 짙은 죽음의 기운이 응집됐다. 죽음의 기운이 너무나 짙은 탓에 회전하고 있는 이 세상이 마치 죽음의 바다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때 이 죽음의 기운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고마의 기운이 일어났다.
“신, 요, 마, 도고무선(道古無仙)!”
한제는 중얼거리며 손을 쫙 펼쳐 전방을 살짝 후려쳤다. 체내 세 고족의 힘이 빠르게 융합되기 시작했다.
9성급 고신과 9성급 고마 그리고 8성급 고요!
한제의 체내에서 한 줄기로 융합된 이 힘은 도고의 힘이자 한제의 가장 강한 힘이었다.
이 힘은 한제의 오른손에 녹아들면서 전방에 거대한 허상을 만들어냈다.
하늘과 땅에 맞닿을 듯 거대한 머리에서는 아주 오래되고 거친 기운이 짙게 발산됐다.
한데 이 머리는 엽막도 한제도 아닌 낯선 얼굴이었다.
한제도 이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로부터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혈맥에서 기인하는 듯한, 고조가 준 혼혈에서 기인하는 듯한 익숙함이었다.
만약 한제가 선강 대륙 내 도고일맥의 거주지로 가서 온 세상을 경멸하듯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조각상을 본다면 자신이 도고무선 신통술로 소환한 이 머리가 조각상의 그것과 똑같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고조!”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현라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거대한 머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숭상심이 어려 있었다.
두 눈이 흐릿해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이 머리는 입을 쩍 벌리더니 전방을 향해 한 줄기 기운을 뿜어냈다. 이 기운은 휙 하고 곧장 이 세상과 전가 노인, 그리고 오래된 무덤 전역을 향해 퍼져 나갔다.
광풍에 세상이 진동했다. 오래된 무덤의 가장 아래에서 두 번째 층에서는 쩌적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하늘은 회색으로 변했다. 이어서 곧장 석화(石化)됐다. 대지 역시 회색빛을 발하면서 돌로 변하듯 굳어졌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고조의 숨이 뿜어져 나온 순간 가장 아래층 역시 완전히 석화돼 버렸고 심지어 안개로 가득한 위층 역시 안개고 돌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다 굳어버렸다.
이 광경에 전가 노인은 충격으로 두 눈이 바짝 졸아든 채 창백한 얼굴로 물러나며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칠규에서 일곱 색채의 연기가 흘러나와 온몸에 빠르게 응집됐고 이를 통해 그는 칠채도인의 혼으로 변했다.
동시에 칠채선존의 두 번째 주혼 역시 허상으로 나타나 그를 감쌌고 그 외투에 휘감긴 순간 불어닥친 도고의 기운이 그를 덮쳐들었다.
칠채의 혼은 그대로 석화됐다. 뒤이어 두 번째 혼 역시 굳어갔다. 마지막으로 전가 노인의 육체 또한 순식간에 딱딱해지더니 회색빛을 발하면서 돌로 변해 버렸다.
내리는 비와 날리는 연기
모든 것이 끝난 듯했던 그 순간, 전가 노인과 그를 감싼 칠채선존의 두 번째 주혼이 위로 쩌적 하고 균열이 일어나면서 무너져 내렸다.
칠채선존의 두 번째 주혼은 곧장 전가 노인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전가 노인은 몸을 바르르 떨다가 피를 토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는 마치 이광의 활을 쏘는 모습을 봤을 때처럼 한제에게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가 뒤로 물러난 순간, 석화된 세상 역시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오래된 무덤 전체가 붕괴했다.
동시에 네 번째 꽃 안의 공간이 파괴되면서 폭풍이 돼 흩어졌다.
한제는 또다시 피를 왈칵 토해내더니 비틀거리며 수천 척 뒤로 물러났다. 두 눈에는 아쉬움과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도고무선으로도 전가 노인을 죽이지는 못했군. 당분간은 도고무선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을 텐데… 왼쪽 눈을 얻어 고요의 반점까지 아홉 개로 늘려야만 승산이 있을 터! 우선은 다섯 번째 꽃으로 가서 진짜 문을 찾아 연다. 그리고 선강 대륙의 힘을 빌려 저자를 봉인하는 거야!”
한제는 이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오래된 무덤 안에서 사라졌다.
★ ★ ★
동부계 중심. 검은 연기에 휩싸인 거대한 솥 안에는 오화팔문진이 배치돼 있었다.
만개한 다섯 송이의 꽃 중 세 번째 꽃은 시들어 있었지만 팔문은 다섯 번째 꽃 안에 있었다. 그 꽃과 융합된 여덟 개의 문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일 수도 있고 한 명의 사람이나 한 마리 흉수일 수도 있다. 그곳에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문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여덟 개의 문 중 진짜 문을 찾아내기란 특히 어려웠다.
한제는 아직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상태였지만 어쨌든 동부계 중심의 최후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다섯 번째 꽃에 들어서는 데는 성공했다.
다섯 번째 꽃으로 들어가려면 칠채선존 세 번째 주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세 번째 주혼을 흡수한 다섯 번째 꽃은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칠채선존 기억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이곳의 하늘은 어두운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구름 뒤로 언뜻 보이는 아홉 개의 태양은 하늘 높은 곳에서 작열하는 빛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 아래 드넓은 대지 어디에도 아홉 태양의 빛은 닿지 못했다.
축축한 바람이 대지 위를 휩쓸며 먼지를 흩날렸다. 끝없이 이어진 산맥에서는 바람에 나뭇잎이 쏴아아 흔들렸다.
이 산맥 곳곳에는 옥으로 장식된 대전과 누각들이 있었다. 적어도 수천 개에 달할 듯한 누각들은 산맥과 중첩되어 있어, 산 안에 조각된 것인지 아니면 산 위에 세워진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또한 각 누각과 대전의 모습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산맥을 따라 늘어선 그것들은 꼭 천궁(天宮) 같아 보였다.
문득 구름 한 조각이 선기로 이루어진 안개처럼 산맥을 뒤덮어 이 천궁을 보일 듯 말 듯 가렸다. 덕분에 신비로운 느낌이 더해진 그 안에서는 수많은 두루미의 울음소리가 수시로 들려왔다.
두루미들 위에는 몇몇 선인이 앉아 있었지만 안개에 가려 그 모습까지 또렷하게 살필 수는 없었다.
그 산맥을 뒤덮은 안개 너머, 아름다운 건물 끄트머리 산봉우리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산꼭대기로부터 아래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물줄기는 얼마나 오래됐는지 폭이 10척 이상이었고 물줄기가 몇 개로 갈라져 연못을 이룬 뒤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한제는 바위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멀리 산봉우리에서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다섯 번째 꽃 안의 세상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지만 그는 아직도 진정한 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맑은 강물에 풍광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한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입은 푸른 도포에서는 은은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방어력이 있는 옷인 듯했다. 또한 허리띠에는 붉은 실로 이어진 옥패가 달려 있기도 했다. 이 투명하고 맑은 옥패 역시 범상치 않은 물건인 듯 아름답게 번쩍거렸다.
그러나 강물에 비친 한제의 모습은 원래의 그와 완전히 달랐다. 입술은 붉고 이는 희었으며 눈썹은 날렵했고 눈은 반짝였다. 또한 깊은 두 눈동자는 무궁무진한 마력을 품고 있어 동성이라면 그의 그런 모습에 굴복하고 이성이라면 연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겨우 열여덟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모습은 한제가 여태껏 봐왔던 사내 중 가장 준수했다. 이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남긴다면 한제가 탐랑에게서 얻은 조각상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해질 것이 분명했다.
한제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들어온 뒤 난 칠채선존이 됐다.”
이내 시선을 거둔 한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귓가에서는 저 멀리 산봉우리 위에 세워진 대전의 종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곳이 바로 선강대륙이로군.”
하늘에 뜬 아홉 개의 태양을 바라보던 한제는 쓰게 웃었다.
칠채선존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은 말하자면 환각이었다. 하지만 이 안의 모든 것은 당시 실제로 발생하고 존재했던 것들이었다.
“선강 대륙의 종파는 동부계와 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군.”
한제는 자신이 입고 있는 도포를 매만졌다. 이 도포의 방어력은 문정기 수련자의 전력을 다한 일격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진정한 문은 대체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어쩌면 칠채선존의 세 번째 주혼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내가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도 세 번째 주혼의 영향 때문일 터. 허나 난 아직 세 번째 주혼과 완벽하게 융합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럴 수도 없겠지.”
한제는 손을 뻗어 강물을 살짝 흩뿌렸다. 하지만 곧장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소도영! 담도 크구나! 종소리가 벌써 두 번이나 울렸는데 폐관수련을 끝내고 나오실 스승의 마중 준비도 하지 않다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약관이 조금 넘어 보이는 한 청년이 한제가 입은 것과 같은 색의 도포를 입은 채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한제를 보는 그의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난 대사형의 명령에 따라 너를 데리고 가려고 왔다! 넌 문책과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냉소하며 한제 근처로 다가온 청년은 손을 들어 한제의 머리 쪽으로 뻗었다. 한제의 머리카락을 틀어쥔 채 산꼭대기 대전으로 끌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제는 그 손을 피하더니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 순간, 청년은 머릿속에서 콰쾅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한제의 눈빛이 마치 두 개의 화살처럼 그의 혼을 꿰뚫은 듯했다.
표정이 급변한 청년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한제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후에야 겨우 숨을 다시 쉬기 시작했다. 허나 몇 걸음이나 밀려났고 쓰러질 뻔한 것을 겨우 버텨냈다. 이제 한제를 보는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너, 너⋯⋯.”
다섯 번째 꽃 안의 세상에서 한제는 칠채선존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고 그의 젊은 시절 기억 역시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한제는 놀랍게도 당시의 칠채선존이 얼마나 유약한 성격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천부적인 자질로 미루어 종파의 보호를 받아야 했건만 그의 스승이 폐관수련에만 몰두하면서 그는 오히려 그 자질을 시기하는 이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이런 괴롭힘은 언제나 몰래, 비밀스럽게 이루어졌고 지금 이 청년이 그러한 것처럼 종파의 규칙을 구실로 삼았다. 눈앞의 청년은 그를 괴롭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칠채선존은 10대 후반이 돼서야 사조(師祖)의 눈에 들었고. 그 후에야 종파 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게 됐다.
하지만 한제는 소도영이 아니었고 이미 정해진 역사의 전철을 밟을 생각도 없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한제는 곧장 청년의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순간 창백해하게 질린 청년의 눈에는 한층 짙은 두려움이 담겼다. 그는 소도영이 어째서 평소와 달리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동안 밖에 나가 있다가 어제 막 종파로 돌아온 그에게 눈앞의 소도영은 그전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너⋯⋯.”
청년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뚝 끊겨버렸다. 어느새 한제의 오른손이 그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그대로 들어 올려지면서 숨통이 조여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두 손으로 한제의 팔을 움켜쥔 채 버둥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버둥거리고 몸부림을 쳐도 한제의 강철 같은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는 날 건드리지 마. 다음은 없어. 알겠어?”
청년의 목을 틀어쥔 손을 천천히 끌어당긴 한제는 상대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청년은 너무나 놀라 거의 혼비백산한 채 몸을 덜덜 떠느라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허나 그 표정에 담긴 두려움으로 미루어 다시는 괴롭힐 엄두도 내지 못할 터였다.
한제는 피식 웃으며 청년의 머리를 두드렸다.
“같이 올라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