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66
한제는 잡초들이 사람 키 높이로 자라 있는 어느 평원에 이르렀다. 칠채선존의 기억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당시 소도영은 이 첫 번째 관문에서 누군가에게 영패를 빼앗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고 주립이 통과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주립에게서는 화려한 빛이 뿜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 빛 아래 소도영은 보잘것없는 모래알에 불과했다.
소도영은 그때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다. 게다가 그는 이곳에서 주립에게 죽임만 당하지 않았을 뿐 잔인한 학대를 받았다. 목숨은 무사했지만 이 사건은 소도영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치욕으로 남았고 그의 성격이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내가 왔으니 모든 게 바뀌게 될 것이다.”
고개를 들어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한제는 평원 위를 걷고 있었다. 앞의 잡초는 양옆으로 누워 좁은 길을 내주었다. 사흘이면 시간도 충분했기에 한제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어떻게 해야 칠채선존의 세 번째 혼을 더 강력하게 자극할 수 있을지, 오로지 그것만을 고민했다.
“어쨌든 일단 시작해볼까?”
문득 걸음을 멈춘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스름한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휙 지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이내 밝은 검광을 번득이던 빛 안에서 남색 도포를 입은 수련자가 살기와 피비린내를 풍기며 한제의 머리를 노리듯 돌진해왔다.
하지만 그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한제는 슬쩍 검광을 가리켰다. 그러자 검광은 밝은 빛을 발산하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그 너머로 놀란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헉!”
바르르 떨리던 청년의 몸은 그대로 터져버렸고 한제의 손가락 앞에서 소멸했다. 세 개의 영패만이 부드러운 빛에 휩싸인 채 그 자리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좋은 징조로군.”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세 개의 영패를 거둔 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뒤이어 그는 하늘을 스쳐 지나가던 한 줄기 빛 근처에 나타났다. 그 빛 안에는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잔뜩 경계하고 있었는데 불쑥 나타난 한제의 모습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으아악!”
한제가 손바닥으로 가볍게 허공을 두드리자 소년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비명과 함께 그대로 추락했다. 죽지는 않을 터였다.
한제는 영패 하나를 거두고는 또다시 어딘가로 이동했다.
동림종 시합의 첫 번째 관문에서 한제는 마치 양떼 사이에 뛰어든 늑대와도 같았다.
마주친 자는 누구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패를 넘겨주어야 했다. 짧은 시간에 그가 악명을 떨치면서 심지어 그를 보자마자 알아서 영패를 내놓는 수련자도 있었다.
한제는 이곳이 칠채선존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불합리한 부분은 뒤집어엎어 합리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예컨대 시합의 첫 번째 관문이 진행되는 동안 동림종 광장에서 시합을 지켜보던 이들의 존재와 그들의 표정이나 감정도 사실 칠채선존의 기억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칠채선존의 기억대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었다.
“저자는 누구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3백 개 이상의 영패를 손에 넣었어!”
“살육에 망설임이 없군. 다른 수련자보다 수준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게다가 모든 공격에는 한 줄기 구름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
“이번 시합에서 저자의 적수는 없겠군. 저런 재목이 있을 줄이야!”
시합을 지켜보던 동림종 고위 수련자들은 모두 놀란 모습이었다.
소도영의 스승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제가 탁월한 모습을 보일수록 동림종은 그의 공훈을 인정할 것이고 포상도 커질 것이다.
첫 번째 관문에서 한제는 영패를 얻을 때마다, 당시 소도영의 기억에 남은 걸출한 인물을 처리할 때마다 사방이 크게 왜곡되고 붕괴하려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칠채선존의 기억에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었다.
“아직 부족해.”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신식을 뻗었다. 그러자 신식에 걸린 이들이 모두 그의 심신에 떠올랐다.
한제는 당시 칠채선존이 질투했던 천재들을 찾았다. 소도영의 기억에 남은 이들을 눈부신 성과를 남기며 이 관문을 통과하고 남은 시합에서도 높은 등수를 차지했던 이들을 찾았다.
곤붕이라는 자도 그중 하나였다. 빠르기로 소문난 그는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끝에 첫 번째 관문을 3등으로 통과한 바 있었다.
곤붕을 찾아낸 한제는 곧장 걸음을 옮겨 그 근처에 나타났다. 주위에는 세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한제가 나타나자마자 경악하며 재빨리 흩어졌다.
곤붕은 몸을 홱 틀더니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제를 발견하고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순간, 주위가 뒤틀리면서 무너져 내리려 했다. 오직 한제만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곤붕 근처로 다가가자 왜곡과 붕괴가 더욱 격렬해졌다. 칠채선존의 세 번째 주혼이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패를 내놔라.”
한제는 귀찮은 듯 내뱉었다. 이렇게 수준 낮은 수련자에게까지 굳이 손을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눈동자가 바짝 졸아든 곤붕은 곧장 몸을 날려 순식간에 저 멀리까지 도망쳤다. 물론 한제에게는 한없이 느리게 느껴지는 속도였다.
한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곤붕은 비명을 내질렀고 가지고 있는 모든 옥패를 내던졌다. 겁에 질린 그가 내놓은 수십 개의 옥패가 한제에게로 날아들자 사방은 더욱 격렬하게 왜곡됐다.
“팔문의 기운이 짙어졌다! 허나 아직 부족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그렇다면⋯⋯ 주립을 죽여야겠군.”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신식으로 주립을 찾았다. 그 무렵, 주립은 엉망이 된 몰골로 어느 산봉우리에 숨어 있었다. 그는 여덟 개의 영패를 가진 상태였다.
“빌어먹을 소도영! 그 녀석만 아니었다면 운도천술은 내 것이 됐을 테고 그럼 이 첫 번째 관문에서 이렇게 처량한 처지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이게 다 소도영 그 자식 때문이야! 죽여 버리겠다!”
가부좌를 튼 주립의 표정은 거칠게 일그러져 있었다. 소도영에 대한 그의 원한은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스승님은 대체 왜 그 녀석을 그렇게 싸고도시는 거지? 어째서 내가 아닌 그 녀석이 운도천술을 수련하느냔 말이다!”
사무치는 원한에 이를 악문 주립은 부상을 회복하는 데 전념했다. 한데 그 순간, 그가 숨어 있던 산봉우리가 바르르 진동했다.
“헛!”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주립은 표정이 급변해 산봉우리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산봉우리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고 몇 개의 파편에 가격당한 주립은 피를 토하며 1천 척이나 밀려났다.
그때 한제가 그의 뒤에 나타났다.
“주립.”
한제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천둥번개처럼 주립의 심신을 파고들었다. 이에 주립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미 한제가 그의 정수리에 손을 얹은 후였다. 순간 주립의 심신에 콰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주립은 즉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사방에 격렬한 왜곡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다섯 번째 꽃 안의 세상이 가장자리부터 무너져 내리기라도 하는 듯 요란한 소리도 들려왔다. 동시에 팔문의 기운이 대대적으로 발산됐고 덕분에 한제는 그중 세 개의 정확한 위치를 감지할 수 있었다.
두 눈을 기이하게 번득인 한제는 곧장 몸을 날려 더욱 빠른 속도로 동림종 제자들의 옥패를 빼앗았다.
그렇게 거둔 옥패의 수가 늘어날수록 왜곡과 붕괴는 심해졌고 칠채선존의 세 번째 주혼에는 격한 혼란이 일었다.
한제의 모든 행동은 세 번째 주혼의 기억과 완전히 상반됐고 그 차이가 클수록 세 번째 주혼의 기억에 균열이 생겨난 듯 팔문의 소재는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동림종 시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관문을 없애면 내가 모든 옥패를 거두고 첫 번째 관문의 유일한 통과자가 되면 세 번째 주혼의 기억을 완전히 뒤엎을 수 있어!”
한제는 더욱 빠르게 동림종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옥패를 빼앗았지만 가능한 한 목숨은 거두지 않았다. 오직 칠채선존이 질투를 느꼈거나 후에 그와 악연을 맺게 된 이들만 죽였다. 이에 따라 왜곡과 붕괴는 한층 더 심해졌다.
칠채선존의 세 번째 주혼은 이 혼란 속에서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동림지 안 물고기의 변화
광풍이 몰아쳤고 동림종 광장에 모인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은 왜곡되고 있었고 심지어 그들의 몸 역시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하나같이 허공에서 회전을 멈춘 회오리 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들은 한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혼자서 저토록 많은 옥패를 차지한 자는 동림종 역사에 전례가 없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칠채선존의 상상으로 이곳에 나타난 모든 것이 거대한 충격에 휩쓸리고 있었다.
첫 번째 관문 안의 한제가 마지막 옥패까지 손에 넣은 순간, 사방은 콰쾅 소리와 함께 마구 뒤틀리며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팔문의 기운은 더욱 또렷해졌지만 여전히 부족한 듯 그 기운들은 다소 흐릿했다.
한제는 허공으로 떠올라 두 팔을 들어 올려 공간을 찢어냈다. 거친 소리와 함께 발휘된 시천술이 전방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고 그 너머로 동림종 주종의 광장이 드러났다.
균열 밖으로 나온 한제는 동림종 주종 광장 상공에 섰다.
“이 소도영이 이번 시합의 1등입니다!”
한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하늘은 무너져 내리고 대지는 쫙쫙 갈라졌으며 왜곡된 모든 것이 흩어져 사라졌다. 저 멀리 대지와 산봉우리를 비롯한 모든 것은 콰쾅 하고 폭발했다. 다섯 번째 꽃 안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팔문의 기운은 완전히 또렷해져 구름을 뚫고 솟은 기둥처럼 생생해졌다. 지면에는 동림종 뒷산의 동림지만이 붕괴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 ★ ★
세 번째 주혼의 기억에 따르면 칠채선존은 평생 동림지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후에 사조의 눈에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번, 가까스로 진입할 자격을 얻었으나 뜻밖의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동림종에서 축출됐다.
이는 그에게 평생 한이 됐다. 만물이 무너진 가운데에도 동림지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 아쉬움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팔문의 기운은 붕괴하고 있는 다섯 번째 꽃 안의 세상에서 또렷하게 나타났다.
이 붕괴로 한제 외에는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던 제한도 다소 허술해졌다.
본래 이 세상은 세 번째 주혼의 기억으로 활성화된 것이기에 그가 이곳에 들어온 후로는 전가 노인이라도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 혼란스러워지고 이 세상이 무너져 내림에 따라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배회하던 전가 노인의 기운이 느껴졌다.
여덟 개의 문이 다 드러나긴 했지만 그중 어느 것이 진짜 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살핀다면 시간 낭비가 클 것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한제가 진짜 문을 찾기도 전에 완전히 파괴되면서 여덟 개의 문은 다시 숨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다시 찾아내기란 더욱 힘들어질 터였다.
“자극이 부족한가 소도영? 동림지를 남긴 것은 혹시 그곳에 들어가 네 숙원을 해소해 달라는 뜻인가? 좋다, 이 이한제가 네 원을 풀어주지. 대신 진짜 문의 소재를 알려줘야 할 것이다!”
한제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전가 노인은 언제라도 허약해진 이곳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 터였다.
몸을 훌쩍 날린 한제는 아직까지도 멀쩡하게 남아 있는 동림지에 이르렀다. 동림지는 그가 두 번째 꽃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다만 이곳은 얼음으로 봉인돼 있지 않았고 은은한 향기가 풍기기도 했다.
한제는 동림지에 곧장 들어서더니 그 안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 몸이 동림지의 물과 접촉한 순간, 한제 체내에서 일곱 개의 본원이 움직였다.
이 연못 물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본원의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한제의 체내로 스며들며 그가 가진 일곱 개의 본원과 급속도로 융합해갔다.
이에 한제의 본원들은 급속도로 부풀어 오르면서 전보다 몇 배나 더 강해져 체내를 맴돌았다. 심지어 체내에서 곧장 튀어나오기도 했다.
한제의 왼쪽 눈에서는 화염의 본원이 불바다를 일으키며 동림지에 녹아들었다. 그리고는 이 안의 무궁무진한 본원의 힘을 흡수한 듯 화염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나타났다.
외모는 한제와 똑같았지만 화염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화염의 본원이 응집된 결과라 할 수도 있었다. 이 순간, 한제의 화염의 본원은 거의 완벽해졌다.
그와 동시에 한제의 오른쪽 눈에서 천둥번개의 본원이 튀어나오더니 한 마리 뇌룡으로 변해 연못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