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68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한제와 그 뒤의 동부계 대문에 닿았다. 서서히 열리고 있는 대문을 바라보던 전가 노인은 돌연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구나. 나 역시 평생 그 문을 열기를 바랐건만. 당시 난 현겁에서 실패한 후 그 혼과 융합할 수밖에 없었지.”
전가 노인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바짝 말라붙기 시작한 피부에서는 검은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빠른 속도로 죽음에 녹아드는 중이었다.
“난 오래전에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 넌 내가 내내 꿈꿔왔던 일을 해내고 나를 속박에서 풀어주었다. 고맙다, 이한제⋯⋯.”
전가 노인의 목소리는 갈수록 허약해졌다. 그의 육신은 이미 절반 정도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허나 그 순간, 그는 눈을 번득이더니 최후의 힘을 짜내듯 긴 빛을 그리며 열린 선강 대륙의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기 전에 평생 갈망해왔던 선강 대륙을 눈에 담고 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한제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전가 노인이 반만 남은 몸을 이끌고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연기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대문이 완전히 열렸다.
나천성역의 동부계 입구 안. 검은 기운으로 뒤얽힌 거대한 솥이 굉음과 함께 진동했다.
솥을 휘감고 있던 검은 기운은 무너져 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한 거대한 솥 가운데에는 한 줄기 큼지막한 균열이 나 있었다.
안쪽으로부터 금빛이 뿜어져 나오는 균열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점차 커지더니 곧 거대한 솥을 완전히 갈랐고 솥은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그 순간, 하늘에 다다를 듯 거대한 금색 문의 허상이 나타났다. 활짝 열린 문 안쪽은 구름과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그 사이로 낯선 대륙이 보였다가 가려지기를 반복했다.
이 문이 나타남에 따라 동부계 중심부의 솥 주위 폐허는 완전히 와해돼 우주로 변하더니 동부계의 우주와 하나로 이어졌다.
이곳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던 동부계의 모든 수련자는 온 동부계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 진동 아래 나천성역의 동부계 중심으로 통하는 입구가 흩어져 사라졌고 그 안으로 거대한 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솥 사이의 금색 문에서 발산된 강렬한 금빛이 온 동부계를 뒤덮었다.
금색 문밖으로 온갖 허상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들어간 이들 중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중에는 탁삼과 남몽도존, 당산, 귀일종 제자 몇몇과 두 명의 장군, 그리고 한제가 있었다.
모든 이의 시선은 금색 대문 안쪽, 흐려졌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하는 세계에 닿아 있었다.
대문을 바라보는 한제의 눈빛이 감개무량함으로 젖어들었다.
마침내 문을 찾아내고 열었다. 이 세상이 그저 어느 동굴 속 세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래로 내내 꿈꿔온 순간이었다. 동부계의 문을 열고 진정한 세계, 선강 대륙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사실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2천 년이 넘는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평범한 산골 소년에 불과했던 그는 한 걸음씩 정진한 끝에 마침내 동부계의 대문을 열기에 이르렀다.
매우 힘겨운 과정이었다. 그가 그간 어떤 고통을 겪고 얼마나 힘들게 걸어왔는지, 수많은 이들과 어떤 운명으로 얽혔다가 떨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완아, 드디어 내가 동부계의 문을 열었다. 저곳에서는 너를 살릴 수 있을 거야. 내가 약속했잖아.’
한제는 이모완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사청, 내 너를 되살리겠다는 약속도 지킬 것이다. 반드시!’
한편, 아랫입술을 깨문 채 멍하니 금빛 문을 바라보는 당산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날은 그녀가 기다려온 날이기도 했다. 그녀는 고향이, 자신의 종파가 가족과 스승이 너무나 그리웠다. 동부계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건만 그리움은 무뎌지기는커녕 거의 집착에 가깝게 커지기만 했다.
마씨 노인과 운일봉의 표정도 흔들렸다. 그들은 동부계에 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끝내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
마씨 노인은 고개를 돌려 자애로운 눈으로 곁의 운일봉을 바라보았다.
동부계로 떠나올 당시 운일봉은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지금의 운일봉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고 기대 이상으로 성장해주었다.
“집에 가자꾸나.”
마씨 노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시지요.”
언제나 냉정한 운일봉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복잡한 심경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약간 혼란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집이라… 선강 대륙이 정녕 나의 고향일까? 오행성이 아니라?’
마씨 노인의 뒤로는 오행성에서 온 두 명의 중년 수련자도 있었다. 그들 역시 감정에 북받친 모습이었다.
한편, 현무 장군과 주작 장군은 씁쓸한 심정이었다. 칠도종을 4대장군과 종주 칠채선존이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자신들은 마침내 선강 대륙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칠도종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터였다.
모든 은원은 흐르는 세월 속으로
한편, 남몽도존은 다소 망설이는 심정이었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고향이 동굴 안의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일찍이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동부계의 대문을 앞에 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한제는 한참 뒤에야 금색 문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체내 여덟 본원의 화신은 이미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물의 본원은 이전의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갔고 나머지 일곱 개의 본원도 체내로 숨겨졌다. 동림지의 물을 흡수하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예상했던 상황임에도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선강 대륙의 진짜 동림지를 반드시 찾아가야겠어.’
생각을 마친 한제는 주위에 모인 이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나와 원한이 있는 사이라면 본디 목숨을 건 싸움으로 해결해야 할 터. 허나 동부계의 대문이 열린 만큼 그간의 은원은 잊기로 하지. 혹 동부계를 떠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내 여기서 배웅하겠네!”
이는 한 치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진심이었다.
그만큼 한제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남몽도존은 딸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탁삼은 한제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중요한 순간 그를 도왔다. 치열한 전투에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당산도 두 장군도 오행성 수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부계 중심부에서의 전투는 비할 데 없이 거칠고 격렬했다.
오행성 마씨 노인이 가장 먼저 나섰다. 그는 포권을 하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 도우, 난 먼저 떠나겠네. 후에 선족 구역에 올 일이 있다면 오행종에도 방문해주게!”
“도와줘서 고맙네. 가능하면 오행종에 가보도록 하지.”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히 말했다.
마씨 노인 뒤에서는 운일봉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미련이 남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로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이 형, 몸조심하시오. 우리의 결투는 아직 끝이 아니오. 선강 대륙에서 다시 승부를 겨뤄봅시다!”
“운 도우도 몸조심하시게.”
운일봉을 바라보며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내 오행성의 두 중년 수련자에게 향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던 한제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저 멀리 우주를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파문과 함께 왜곡이 일더니 백호 장군과 오행성의 또 다른 중년 수련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마씨 노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으나 현무 장군과 주작 장군은 화들짝 놀랐다.
“오행성 도우들, 잘 가시게!”
백호 장군이 오행성 수련자의 속박을 풀어주자 이 수련자는 동료들 곁으로 다가갔고 이들은 몇 갈래 빛을 그리며 금색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그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어서 현무 장군과 주작 장군이 한제를 향해 진중하게 절을 올렸다.
“이 도우, 이전의 일을⋯⋯ 용서해줘서 정말 고맙네. 우리도 이만 가보겠네. 선강 대륙에서 도움이 필요하거든 우리를 찾게. 힘을 보태겠네.”
말을 마친 현무 장군은 한제에게 옥패를 하나 건넸다.
옥패를 받아 든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게.”
백호 장군 역시 감격한 눈빛으로 한제에게 포권을 하고는 현무 장군과 주작 장군 곁으로 다가갔다.
주작 장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제를 보고 있었다.
“고맙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세 장군은 금색 문을 통해 선강 대륙으로 돌아갔다.
당산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금색 문을 향해 갔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 서더니 한제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자네도 날 돕지 않았는가? 그러니 고마워할 것 없네.”
한제의 대답에 당산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끝내 말없이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문에서 발산된 금빛에 휩싸여 사라지기 직전,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제는 대답하지 않았고 당산은 이내 금빛 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는 사실은 그녀 외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동부계 출신이 아닌 이들이 모두 떠나간 후, 남몽도존을 비롯한 이들을 훑던 한제의 시선은 1천 척 너머의 허공에 닿았다.
한제는 그곳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그곳은 그저 빈 공간일 뿐이었으나 한제는 진심어린 존경이 단긴 목소리로 말했다.
“현라 선배님, 오행성에서도 선계에서도 동부계 중심부에서도 저와 함께 하셨죠. 저는 마침내 동부계의 대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그의 시선이 닿았던 허공이 돌연 왜곡되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내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흐릿한 인영으로부터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와 함께 서서히 또렷해진 현라는 곧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나타난 순간, 남몽도존과 탁삼은 흠칫 놀랐고 경계심을 드높였다.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한 상대의 등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도 육안으로만 상대를 볼 수 있을 뿐, 신식으로는 그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현라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한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제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았지만 정체까지 알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너는 첫 번째 꽃에 들어갔을 때 백호 장군의 규칙이 적용된 잔계에서 오행성 수련자로부터 한 줄기 신식의 혼을 거뒀지. 그 한 줄기 분혼을 탐색해 네가 떠난 뒤 오행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한 것이냐?”
현라는 흥미로운 수수께끼라도 풀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라의 말대로 그는 오행성 수련자의 분혼을 통해 현라의 이름을 알아낸 것이다. 다만 분혼의 기억은 많지 않았고 온전치도 못했기에 최근의 일에 대한 몇몇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한제가 오행성을 떠난 뒤 모습을 드러낸 현라에 대한 기억도 포함돼 있었다.
이는 한제가 오행성 수련자들의 등장에 느낀 의혹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동부계 중심부에 들어온 귀일종 수련자 중에는 일전에 고족을 비웃었던 노인이 보이지 않았고 한제는 이 점이 의아했다. 또한 그가 일곱 개의 덫을 설치해 칠채도인과 전가 노인을 따돌린 후 목어를 수거하려 했을 때 목어 몇 머리가 사라진 사실에 큰 의혹이 들었다. 이에 그는 오행성 수련자의 분혼을 뒤졌고 그렇게 답을 찾아냈다.
두 번째 꽃 안, 여자 고신이 있던 동림종에서도 무언가를 느꼈고 오래된 무덤에서는 현라의 뒤에 숨어버림으로써 현라를 떠보았다. 그때 현라는 한제를 대신해 장존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에 한제는 추측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