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83
한제는 생각에 잠긴 채 속도를 높여 하늘을 갈랐다. 그는 이곳이 동부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갔다.
“동부계는 거짓이었고 이곳은 진실이지.”
그는 동부계의 세상에 녹아들 수는 있었지만 선강 대륙의 세상에는 녹아들 수 없었다. 축지성촌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방법이 있을 거야. 물론 수준을 더 높여야겠지만.”
아직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도 낯설었다. 창룡종에서 강인의 기억을 뒤진 덕에 그나마 이 천우주에 대해 조금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이 선강 대륙 선족 구역 동주에 속한 천우주이며, 동주의 9종 13문에 속한 귀일종과 대혼문이 이곳에서 가장 강한 종파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 두 종파는 그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기에 한제의 표정은 어두웠다.
“대혼문은 반산몽과 반산로의 종파. 수많은 환술과 무시무시한 신통술로 유명하지. 그리고 강인의 기억에 따르면 운일봉은 귀일종의 천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너무 늦게 왔어. 스승님은 내가 이미 죽은 줄 아실 거야.”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천우주는 넓이가 동부계의 수십 배에 달한다. 축지성촌을 발휘할 수 없으니 고족 구역까지는 전속력을 발휘해도 수백 년은 걸릴 거야. 무슨 방법이…”
한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선강 대륙은 지나치게 넓었다.
“스승님이 그곳에 안 계신다 해도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고 일맥으로 가야 해. 그전에 일단은 동림종의 동림지를 찾아가봐야겠군.”
동림지를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래도 천우주에 칠도종이 있다는 사실이 적잖은 위로가 됐다.
“그보다 저물공간 문제가 먼저야. 그 안에 들어 있는 광인과 은시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
한제는 두 사람이 선강 대륙의 혈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저물공간이 찢어져 파괴된다 해도 그들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려니 스스로의 힘으로만 비행하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흡혈마수를 소환할 수도 없었다.
보름 뒤, 한제 눈앞에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진 산맥은 적어도 수만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천우주에는 이런 산봉우리가 아주 많았다. 강인의 기억을 통해 파악한 데다가 지난 보름 동안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 잘 알고 있었다.
“꽤 괜찮은 곳이군.”
한제는 그중 평범한 산봉우리에 이르러 곧장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뒤이어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산봉우리 안에 거대한 동굴이 생겨났다. 당분간 그곳에서 폐관수련을 하며 지낼 예정이었다.
동굴에 가부좌를 틀고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자 수많은 금제가 나타나 사방을 뒤덮었다. 법보를 꺼낼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오직 금제만으로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산을 봉인해 방어막을 형성했으나 한제는 여전히 피천관을 메고 있었다. 선강 대륙은 동부계와 달리 강자들이 매우 많은 곳이었기에 피천관을 등에 지고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강인도 저물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동부계에서의 저물공간과는 달리 마치 그의 체내에 존재하는 것 같았어. 만약 그런 거라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물건을 꺼낼 수 있겠지. 정말 기묘한 방법이야. 허나 동부계에서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칠도종에서 온 이들도 그런 방법을 썼었지. 그때 미리 준비를 해뒀어야 했는데⋯⋯.”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부좌를 튼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저물공간을 열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 저물공간은 동부계에 만들어둔 거였어. 동부계와 선강 대륙 사이의 허공에서도 열 수는 있었지만 무언가 방해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지. 그곳은 적어도 동부계와 연결된 곳이었지만 여기는 선강 대륙이야.”
고민하던 한제는 머리가 아파 오자 오른손을 휘둘렀다. 전방에 한 줄기 균열이 허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허상은 나타나자마자 무너져 내리면서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방금 연 저물공간은 당시 동부계에서 잡다한 것들만 따로 모아놓기 위해 새로 만들어둔 것이었기에 소멸된다 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추측이 사실임을 밝히는 데 썼으니 충분히 제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 안에 든 모든 물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니군. 몇몇은 큰 피해를 입은 채 알 수 없는 곳으로 흩어져 사라지기도 했으니.”
한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붉은 검은 반드시 빼내야 해. 스승님께 받은 응고된 금빛 문양도. 그것은 공겁기 초기 수련자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있어. 지금의 내게는 큰 도움이 될 거야. 원신을 전문적으로 공격하는 곤극 채찍도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꼭두각시 이사와 귀면기도⋯⋯.”
그리운 탐랑
한제가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문지르고 있을 무렵, 천우주에는 이씨 성의 신비한 수련자가 지화를 뽑아내 창룡종을 불태우고 지화맥의 혼까지 끌어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창룡종 장로 세 사람의 육신을 파괴하고 한 장로의 두 팔을 불살라 버렸다고도 했다.
이에 분노한 창룡종이 모든 제자를 내보내 대대적인 탐색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창룡종을 좋아하지 않는 종파에서는 그들을 비웃었다.
다만 두청과 그의 배후에 있는 대혼문의 강력한 기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이들은 창룡종의 부탁에 따라 이씨 수련자를 찾는 데 동참은 했지만 그저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탐색에 불과했다.
천우주는 매우 넓은 곳이라 아무리 충격적인 소식이라도 퍼져 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귀일종과 대혼문 같은 대형 종파에서는 이런 소식에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두청은 더욱 분노하며 급기야 직접 나섰다. 그는 신식을 넓게 퍼뜨려 주위를 샅샅이 뒤졌지만 천우주는 지나치게 넓었고 결국 그 역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천우주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었다.
창룡종 제자들의 신식은 한제가 숨은 산봉우리를 몇 차례 휩쓸고 갔지만 거리가 워낙 멀었던 데다가 강력한 금제 덕분에 한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두청이 직접 이곳으로 와서 탐색하지 않는 한 아무런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할 터였다.
시간은 흐를수록 창룡종의 탐색은 집요해졌다.
저물공간의 법보를 어떻게 꺼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한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저물공간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선강 대륙의 선기를 끊임없이 흡수해 육신을 자양했고 이곳의 본원과 자신의 본원을 비교해 연구했다.
점차 그는 허상의 본원은 동부계에서든 선강 대륙에서든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알아냈다. 허상의 본원은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그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둥번개와 화염, 그리고 그가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물의 본원과 같은 실체의 본원은 달랐다. 살육이나 금제의 본원에도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크지는 않았다.
“이제 더는 망설일 수 없다!”
동굴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에서는 결단의 빛이 드러났다.
그는 본디 단호한 사람이었다. 저물공간이 그에게 이렇게 중요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꺼내야 할 것들이 있다. 사실 대부분은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이지. 여기서도 새로운 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최대한 빨리 행동한다면 저물공간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지도 몰라!”
결정을 내린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모든 힘을 동굴 안에 응집시켰다. 그의 힘에서 발산되는 파문이 점점 짙어짐에 따라 사방에 왜곡이 일기 시작했다.
물결 같은 왜곡은 천천히 일렁이면서 이곳의 모든 기운을 응고시켰다. 덕분에 모든 것들이 점차 느려졌다. 동굴 안을 늪처럼 만든 것으로 이런 상태라면 저물공간의 붕괴도 지연시킬 수 있을 터였다.
지금 한제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준비를 마친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두 눈을 번득이더니 결인을 그린 왼손을 들어 올려 정신술의 위력을 검지에 응집시켰다.
뒤이어 오른손을 들어 올린 그는 진중한 얼굴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이전까지 수도 없이 취했던 동작이지만 이토록 긴장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손짓에 전방에는 순간 한 줄기 균열이 나타났다. 저물공간이었다.
그 순간, 한제는 정신술을 응집시켜 놓았던 왼손 검지로 균열을 가리켰다. 지금껏 수없이 발휘했던 정신술은 시간과 공간, 심지어 신통술과 법보까지도 멈춰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술법이 동부계에서 선강 대륙으로 가져온 저물공간의 붕괴까지 멈출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저물공간은 나타나자마자 어스름한 빛을 발산하면서 흩어져 사라질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사방의 공기는 늪처럼 진득하게 응고되어 있었고 정신술까지 발휘되었으니 붕괴는 늦춰질 터였다. 허나 이는 격렬한 붕괴 직전, 찰나의 순간만 유지될 터였다.
정신을 집중한 한제는 저물공간이 열리려는 찰나 그 안으로 녹여 넣은 신식으로 저물공간 안의 물건들을 휘감았다. 그 안의 모든 것을 꺼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제는 저물공간에 수많은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균열 입구에 가까이 있던 광인과 은시는 그 균열에 휘말려 사라져 버렸다. 몇몇 법보는 붕괴했고 붕괴하지는 않았지만 균열 사이로 빨려 들어간 법보도 있었다.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한제는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신식에 휘감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몇 갈래 신식을 더 저물공간에 집어넣어 흩어져가는 법보들에 낙인을 남겼다.
이어서 곧장 명령을 내리자 아직 완전히 붕괴하지 않은 저물공간은 찰나의 순간 닫혀버렸다. 붕괴가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고의로 닫은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제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숨결은 거칠었으며, 두 눈은 붉게 충혈됐다.
그의 전방에는 붉은 검 한 자루와 금색 문양 하나가 떠 있었다. 붉은 검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왔고 금색 문양에서는 공겁기 수준의 파동과 함께 한 줄기 대천존의 기운도 느껴졌다.
“중요하지 않은 법보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붕괴되지 않고 균열 안으로 사라진 법보 세 개에는 미리 준비해둔 신식의 낙인을 찍어놓았으니 언젠가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문제는 광인과 은시인데⋯⋯. 휴우.”
한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물공간은 앞으로 몇 번 더 열 수 있을 터. 그때마다 붕괴하다가 결국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겠지. 꼭두각시 이사도 아직 그 안에 있다. 이번에는 미처 꺼내지 못했지만⋯⋯.”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응고시켜두었던 공기를 거두었다. 동굴 안은 점차 원상태로 돌아왔다.
앞에 놓인 붉은 검과 금색 문양을 바라보던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강인의 기억에서 얻은, 선강 대륙 특유의 저물공간 제작 방법에 따라 오른손 손목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칠흑처럼 검은 그 균열에서는 흡입력이 발휘되어 붉은 검과 금색 문양을 빨아들였다.
“육신의 혈맥으로 만들어낸 저물공간. 선강 대륙 사람만이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지.”
한제의 오른손에서 붉은빛을 번득이는 검이 나타났다가 잠시 후 사라졌고 이어서 금빛으로 번득이는 금색 문양이 나타났다.
한제는 이 저물공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 안에 든 물건들을 꺼냈다가 거두기를 반복했다. 전투 시 습관처럼 허공의 저물공간을 열어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제는 고개를 들어 동굴 너머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탐랑도 선강 대륙에 있겠지? 녀석이 있는 한 법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되는군.”
탐랑이 들었다면 기겁했을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으며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한데 탐랑도 이상해. 분명 칠채선존의 혼백 중 하나인데 어째서 청수 사형이나 사도환처럼 환생을 거치지 않고 곧장 동부계를 떠날 수 있었던 거지?”
이 의문은 오래전부터 떠올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떠한 답도 얻을 수 없었다.
“뭐, 탐랑을 만나면 알게 될 테니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지. 일단은 지화와 내 화염의 본원 사이의 문제부터 해결하자. 창룡종 선조 두청은 수준이 상당히 높아. 그자가 날 찾아낸다면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 터. 보아하니 일단은 이곳에 확실히 자리를 잡는 것이 좋겠군.”
한제의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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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강 대륙 선족 구역 중추의 수도. 황성의 화려한 대전은 그 폭이 수십만 척에 달했고 번쩍이는 금빛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대전의 거대한 용상에는 아홉 마리 용이 수놓아진 황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잠든 듯 감고 있던 두 눈을 돌연 번쩍 떴는데 그 순간 드러난 눈동자는 마치 태양처럼 존귀하고 짙은 혈맥의 기운을 발산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국사가 일찍이 예측하기를 이번에 실종된 연도비는 위험하기는커녕 오히려 큰 행운을 맞은 것이라 했지. 지금 그의 기운이 신장(神葬)에 나타났으니 가서 데려와야겠어. 한데 그 곁에는 여인도 하나 있군.”
황포의 사내는 눈을 번득이며 오른손으로 전방의 허공을 움켜쥐었다.
아홉 마리 용의 황포 사내가 허공을 움켜쥐자 대전 안에 돌연 회오리가 나타나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는 회오리 안쪽은 온통 어둠뿐이라 어디로 향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쉭쉭 하는 기이한 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지더니 점차 회오리 안에서 두 개의 흐릿한 허상이 나타나 황포의 사내에게 끌려 나왔다. 혼수상태에 빠진 한 쌍의 남녀는 다름 아닌 광인과 은시였다.
황포 사내는 은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없이 광인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팩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는데 그 속도에 맞춰 광인의 몸 역시 허공으로 둥둥 떠올라 사내에게 다가왔다.
사내는 오른손을 뻗어 광인의 가슴팍에 얹었다.
강력한 선력 한 줄기가 광인의 체내로 밀려들어가면서 광인의 체내에서 흘러나온 펑, 펑 소리가 천둥처럼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흘러넘칠 듯한 선력은 광인의 체내를 휘젓고 다니며 막혀 있던 경맥을 뚫는가 하면 광인이 가진 혈맥의 힘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