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00
이 뜻밖의 말에 흠칫 놀란 염란은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으나 그렇다고 모든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차게 코웃음을 치며 한제를 노려보았다.
청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 장로는 화통한 성격이로군. 이제 한식구가 되었으니 둘이 잘 지내보게. 이 장로는 사흘 뒤 청천봉(靑天峰)으로 나를 찾아오도록!”
뒤이어 청우는 허공에서 옥패를 하나 소환하더니 한제에게 던져주었다.
“이 옥패가 있으면 대혼문 내 대부분의 금제를 통과할 수 있을 게야!”
옥패를 받아 든 한제는 말없이 칙칙하게 변한 산봉우리로 몸을 날렸다.
도중에 염란의 제자들을 스쳐가게 된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반산몽을 바라보았다.
반산몽은 심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두청과 마찬가지로 일곱 번의 현겁을 통과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지만 당시 그녀가 동생과 함께 칠채선존의 아내가 된 것은 수준 때문이 아니라 대혼문의 제자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다른 이유와 행운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시 공겁기 초기에 이르러 있던 칠채선존이 그녀를 찾아 혼인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칠채선존에게는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순정이 있었다.
수준이 더 높아져 공겁기 후기에 이른 후에도 여전히 반산몽과 함께한 것을 보더라도 그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반산몽과 연도비의 관계를 눈치챘을 때 그렇게까지 격노했던 것도 어쩌면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동부에 시녀가 부족한데… 염 장로만 괜찮다면 이 여인을 데려가도 되겠나?”
한제는 반산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에 반산몽은 심신이 다시 한번 진동했고 표정도 급변했다.
“어딜 감히!”
염란은 가까스로 억눌렀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실례가 많았네.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한제는 피식 웃더니 긴 빛을 그리며 염맥봉 쪽으로 나아갔다.
사실 방금 그의 손짓에는 다른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한제가 떠난 뒤, 염란은 기이한 눈빛으로 반산몽을 살폈다.
스승의 그런 시선에 반산몽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인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대혼문, 어두워진 염맥봉. 한제는 신식을 뻗어 산봉우리를 휘감았다. 이곳 지화의 주맥은 말라붙어 산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약간의 힘만 써도 그대로 부스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한제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가 오른발을 들었다가 가볍게 구르자 그의 뒤에 있던 화염의 본원이 산봉우리로 녹아들었다. 그 순간, 산봉우리는 돌연 짙은 불바다에 휩싸였다.
“화염의 힘을 잃었다면 내가 보충해주지! 화염의 의지를 잃었다면 그것 역시 내가 보충해주겠다!”
한제가 중얼거리자 불바다는 더욱 거세게 일어나면서 이 산봉우리에 새겨진 모든 금제를 불사르더니 새로운 금제를 만들어냈다. 이에 색을 잃고 어두워졌던 산봉우리는 태양과 같은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색은 이전보다 훨씬 짙고 강렬했으며, 산봉우리를 뒤덮은 화염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만 같았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염란은 이를 갈았다. 새로운 산봉우리 대신 염맥봉을 맡겠다던 한제로부터 느꼈던 약간의 고마움도 씻은 듯 사라졌다.
‘저자와 나는 공존할 수 없어!’
마음속에 이글거리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던 그녀는 청우 진인이 떠나자마자 곧장 반산몽을 불렀다.
“반산몽, 넌 염맥봉으로 가라. 저자가 너를 시녀로 요구하지 않았더냐. 가서 그를 모셔라!”
“스승님!”
반산몽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덜덜 떨며 얼른 꿇어앉았다. 가련한 표정의 얼굴은 곧 눈물로 범벅이 됐다.
그러나 염란은 그런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차게 웃었다.
“저자가 네가 예전에 말한 동부계에서 온 그 사람이지? 흥, 가련한 척해도 소용없다! 너는 남편인 칠채선존을 죽게 하고 연도비마저 칠도종 동부계에서 실종되게 만들었다. 그런 음란하고 방탕한 제자는 내게 필요치 않다. 허나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이한제 저자를 죽여라! 그러면 내 너를 박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산몽은 온몸을 덜덜 떨며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쓸데없는 말 늘어놓지 마라! 내키든 말든 시키는 대로 해! 그 매력과 교태로 남자를 홀리는 것이야말로 네가 가장 잘하는 일 아니더냐!”
염란이 소매를 휙 휘두르자 순간 광풍이 반산봉을 산봉우리 밖으로 떠밀었다.
반산몽은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타오르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깊은 원한이 들어찼다. 만약 한제가 자신을 시녀로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염란이 이렇게 자신을 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를 죽여⋯⋯.”
염란의 말이 내내 그녀의 귀에서 맴돌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반산몽의 눈에서는 어느새 원한의 빛이 사라졌다. 그 대신 순진무구한 눈빛을 드러낸 그녀는 타오르는 산봉우리를 향해 나아갔다.
한제가 자리를 잡은 후, 염맥봉은 달라졌다. 타오르는 화염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이글거렸지만 연기는 나지 않았다. 열기로 사방이 왜곡되면서 모든 것이 허상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땀을 뻘뻘 흘릴 것이고 더 가까이 왔다가는 모든 피가 증발해버릴지도 모른다.
한제는 염맥봉에 세 개의 동굴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없애버렸다. 사람 또한 오직 그 혼자였다.
원래 염란의 것이었던 동굴에 가부좌를 튼 그의 뒤로 화염의 본원이 나타나 천천히 산봉우리 안으로 녹아들어 염맥봉과 하나로 합쳐졌다.
혼연도 천둥번개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하고 있던 한제는 이내 두 눈을 번쩍 떴다.
“대혼문⋯⋯.”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휘두르자 보라색 옥패가 나타났다. 이 옥패에서는 오래된 기운과 더불어 썩은 냄새도 풍겼다.
‘혼연도⋯⋯ 내가 본 자들 중 예측과 점술에 가장 뛰어난 자는 천운자였다. 점술은 매우 유용해. 나 역시 천운자의 분신을 이용해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겼지. 혼연도를 당장 익혀야겠어. 게다가 나 자신을 숨겨 다른 이가 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으니 더욱 유용하겠지.’
신식을 뻗어 옥패를 감싸던 한제가 돌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염맥봉은 한제의 본원과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산봉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여인의 존재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산봉우리 앞에서 멈춰 선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말했다.
“제자 반산몽, 스승님의 명에 따라 이 장로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반산몽⋯⋯.”
미소를 짓던 한제는 이내 그 여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손에 든 옥패를 천천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혼은 곧 도 도는 곧 혼이다. 도를 이용해 운명을 찾는 거야.’
한제가 옥패에 신식을 주입한 순간, 한 노인의 목소리가 심신에서 울려 퍼졌다. 기이한 힘이 담긴 목소리에 한제는 그 안으로 침잠했고 옥패에 담긴 연혼도를 깨달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 하루가 지났다.
반산몽은 예의바른 모습으로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염맥봉의 열기에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불평 없이 가만히 한제의 명을 기다렸다.
그녀는 무력감을 느끼며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서는 원한의 빛이 번득였지만 재빨리 사라졌다.
이 무렵, 동굴 안의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떠 옥패를 내려다보았다.
‘49억 개의 문자를 혼에 새기는 신통술이라니! 정말 기이하군. 10만 개의 문자를 새기면 소성(小成), 27억 개의 문자를 새기면 중성(中成), 49억 개의 문자를 새기면 대성(大成)이다. 입문은 간단하지만 점점 새겨야 할 문자의 수도 늘어나고 문자 자체도 복잡해져 나중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워진다. 문자를 혼에 새기는 데 드는 시간도 더 길어지겠지.’
한제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옥패에 따르면 입문은 사흘이면 충분하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사흘 안에 10만 개를 혼에 새길 수 있으나 중성을 거두려면 999년의 폐관수련이 필요하다. 그 정도야 수련자에게 그리 힘들거나 드문 일이 아니지만 대성을 거두려면 17만 8천 년의 폐관수련이 필요하다니⋯⋯.’
그제야 한제는 청우 진인이 연혼도의 옥패를 이렇게 흔쾌히 넘겨준 이유를 알도 것 같았다. 애초에 대성을 거둘 수 없는 술법이었기 때문이다.
한제는 두 눈을 감고 문자를 혼에 새겨 나갔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사흘 후,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옥패에 나온 대로 사흘 만에 10만 개의 문자를 혼에 새겼다.’
한제는 손을 들어 결인을 그리더니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정수리로부터 줄기줄기 혼의 기운이 발산됐다. 이 기운들은 한제의 머리 위에서 빠르게 한데 모이더니 작은 사람을 응집해냈다. 키가 3촌밖에 안 되는 이 사람은 한제의 혼에 찍힌 10만 개의 문자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한데 그 생김새가 기이했다. 눈은 있으나 코도 입도 심지어 귀도 없었다.
가볍게 폴짝 뛰어오른 소인(小人)은 한제의 오른손 위에 내려섰다.
이 소인을 바라보던 한제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오직 육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신식으로는 인지되지 않는 소인의 몸에서는 10만 개의 작은 문자가 끊임없이 번득였다.
한제가 소인을 살피는 동안 소인 역시 한제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는데 그 눈빛에 한제는 얼떨떨해졌다.
“혼연만천(魂衍萬千), 내 현묘함을 찾아라!”
이내 한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자신의 길흉을 점치기 위한 주문을 내뱉은 순간, 그의 손바닥에 서 있던 소인이 몸을 바르르 떨면서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다가 엎드리더니 한제의 손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그의 머리가 손바닥에 처음 닿은 순간, 기이한 힘 한 줄기가 소인의 체내에서 뿜어져 나와 손바닥을 타고 한제의 심신으로 흘러들었다.
한제의 눈앞이 이지러졌다. 안개로 가득한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핏빛을 번득이는 안개 속에서 한제는 수많은 인영을 볼 수 있었지만 그 모습까지는 또렷하게 살필 수 없었다.
소인이 또 한 번 머리를 찧었다. 그러자 한제의 머릿속에서는 콰쾅 소리가 울려 퍼졌고 눈앞을 가렸던 안개는 한 줄기 힘에 밀려난 듯 흩어졌다.
이제 한제는 한 채의 산을 볼 수 있었다. 천둥번개로 뒤덮인 산 아래로 한 사람이 짓눌려 있었다.
줄기줄기 번개가 하늘에서 떨어져 산을 때리고 있었다.
한제는 하늘 저 멀리 천둥번개로 이루어진 거대한 전차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전차에 탄, 천둥번개로 이루어진 인영은 고개를 숙여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제의 심신이 진동했다. 그는 곧장 산에 짓눌려 있는 이의 모습을 살피려 했지만 그 모습이 너무 흐릿해 생김새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때, 소인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세 번째로 머리를 찧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격렬한 경련을 일으킨 한제는 심신에서 콰쾅 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소인이 머리를 찧으면서 주입된 한 줄기 힘으로 인해 그는 산 아래에 짓눌린 이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한제 자신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한제의 눈앞에 펼쳐졌던 환각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뻗어두었던 신식도 빠르게 되돌아오려 했다.
‘미래에 나를 뇌산(雷山)으로 억압할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한제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자 신식이 되돌아오지 않도록 막고는 전차에 탄 인영을 향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