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03
“제 분수를 모르고⋯⋯.”
그 무렵, 하늘에 나타난 허상 속 열아홉 개의 계단 중 첫 번째 칸에 오른발을 올린 한제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뜬 한제는 계단의 끝을 응시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마다 대혼문 안에는 쾅, 쾅 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느새 다섯 계단을 올라선 상태였다.
염란은 그런 한제의 모습에 흠칫 놀랐으나 금세 표정을 풀었다.
‘다섯 계단 정도야, 뭐. 어쨌든 7층에는 절대 이르지 못하겠지.’
그녀는 자신이 신통술을 깨닫는 중이었음을 까맣게 잊은 듯 계단 위의 한제에게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한제는 덤덤해 보였지만 마음속에서는 거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다섯 번째 걸음을 옮긴 순간, 마치 10만 척 깊이의 심연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됐다. 계단 속의 거대한 신식이 발을 타고 파고들어 심신에 우렁찬 소리를 울렸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이 목소리는 심신에서 수백수천 명이 동시에 포효하고 있는 것처럼 길게, 끝없는 메아리로 울렸다. 이에 한제는 육신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될 것만 같았다.
한제는 다섯 번째 칸에 잠시 멈춰 계단의 끝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결단의 빛이 담겨 있었다.
“본원, 응집!”
한제는 손을 들어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대혼문 안에서 활활 타오르던 염맥봉이 돌연 콰쾅 소리와 함께 흘러넘칠 듯한 불바다를 발산했다.
불바다는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고 그 안에서 거대한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한제의 화염 본원의 얼굴이었다.
어마어마한 기세의 불바다는 하늘에 떠오른 허상의 계단을 향해 휙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한제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한제의 온몸에서 불바다가 발산되더니 곧 그의 뒤에 화염의 본원으로 응집됐다.
본원이 나타난 순간, 한제의 두 눈이 번득였고 그는 걸음을 옮겨 순식간에 열세 번째 계단에 이르렀다.
그 순간, 염란은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찌나 세게 쥐고 있는지 핏기가 사라진 주먹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말도 안 돼!”
대혼문 여기저기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열세 번째 계단! 어, 엄청난 의지력이야!”
“저건 본원 진신 아닌가! 인간 형태의 본원이야!”
“이 장로 정말 대단해. 어쩌면 정말 7층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어!”
한제가 본원 진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혼문의 모두가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를 처음 알게 된 이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열세 번째 계단이라⋯⋯.”
청우 선조 역시 놀란 모습이었으나 금세 차분함을 되찾았다.
“내가 과소평가했군. 저자의 본원은 벌써 진선(眞仙)에 이른 모양이야. 본원 진선은 본원 진신과 이름은 비슷할지 몰라도 그 위력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 허나 더 이상은 무리일 거야.”
수준이 높고 눈썰미도 좋은 청우 진인의 예측은 거의 빗나간 적이 없다.
한편, 열세 번째 계단에 선 한제는 또다시 멈춰 섰다. 본원 진신의 힘을 빌려 여기까지 이르긴 했지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더 거칠고 우렁차게 변한 상태였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이 우렁찬 소리에 한제는 원신에 충격을 받았다. 덤덤하고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 그의 눈빛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염란도 대혼문의 수많은 수련자도 폐관수련을 하고 있던 노인 수련자들도 그 눈빛을 확인한 상태였다. 이들은 모두 한제의 실패를 직감했다.
한데 바로 그때, 대혼문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계단의 허상 속 한제의 두 눈에 드러난 흐릿한 빛이 하늘을 뒤덮을 듯 밝은 빛으로 바뀌었다.
한제는 열네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순간 뒤에 서 있던 본원 진신이 불바다가 되어 한제의 체내로 돌진했다. 그러자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본원 진신과 합쳐진 채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열다섯 번째 계단!
대혼문 제자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열여섯 번째 계단!
“이 이한제의 의지는 하늘 앞에서도 꺾인 적이 없다!”
한제가 외치자 그의 미간에서 삶과 죽음의 본원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한제는 그 힘을 빌려 순식간에 열일곱 번째 계단에 이르렀다.
“내 의지는 동부계와 선강 대륙을 관통했다. 여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지만 난 끝내 동부계에서 빠져나왔어!”
한제의 체내에서는 뒤이어 진실과 거짓의 본원이 발산됐고 그의 몸은 마치 허상처럼 빠르게 변화하면서 열여덟 번째 계단에 올랐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혼문 제자들은 심신이 진동했고 염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내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내가 천벌로부터 내 운명을 되찾고 선강 대륙에 이른 것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 하늘을 밟고 서기 위해서다!”
한제의 두 눈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원인과 결과의 본원도 위력을 발산했고 한제는 열아홉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드디어 7층에 이른 것이다.
그 순간, 대혼문 상공에 나타난 허상이 무궁무진한 빛을 발하면서 사방은 적막에 휩싸였다. 대혼문 제자들은 진중한 표정에 존경의 빛을 담아 한제의 허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제를 안 좋게 보고 있었던 이들조차 지금만큼은 그런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다.
“장혼각 7층에 출입할 수 있는 자가 한 명 더 늘었군.”
저 멀리서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청우 진인은 신중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저자 정말 7층에 올랐다. 선조의 예측대로라면 7층에 이르는 데 3년이, 8층은 30년이, 9층은 3백 년이 걸릴 터였다. 그리고 저자가 9층에 오르는 날 대혼문에 엄청난 행운이 따를 거라 하셨지. 한데…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구나.”
그때, 장혼각 7층에 발을 들인 한제가 계단 아래 염란을 돌아보더니 소매를 휘둘러 혈살검과 남색 우산을 거두었다.
“약속대로 이 우산은 내가 갖도록 하지!”
염란은 손을 뻗어 떠나가는 우산을 붙잡고 싶었지만 자존심을 버릴 수는 없었기에 꾹 참았다.
한제가 남색 우산을 움켜쥐어 위에 어린 염란의 신식을 지우려던 그때, 염란이 돌연 서늘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제, 또 다른 내기를 해보지 않겠느냐!”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잠시 염란을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내기?”
“네가 8층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데 걸겠다! 어때! 내기하겠느냐?”
염란은 몸을 훌쩍 날려 계단 입구로 다가왔지만 감히 그 위에 발을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한제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왜 너와 내기를 계속해야 하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한제는 소매를 휘두르며 7층 안의 혼들을 향해 다가갔다.
“네가 이기면 이 법보를 주도록 하겠다! 허나 네가 진다면 그 우산을 돌려줘!”
염란은 재빨리 보라색 호리병을 소환하며 외쳤다. 이 호리병에서는 영혼의 파동이 발산되고 있었다.
“이건 아홉 번째 선조 나운해가 생전에 사용하던 법보다. 당시 10억 개의 도혼이 응집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파손돼 3천만 개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 번 정도는 공겁기 중기에 이르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내가 혼환귀술로 아홉 번째 선조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도 이것 덕분이지. 난 이것을 걸겠다. 어떠냐!”
염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한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선강 대륙에서 확실히 자리 잡으려면 수준이 강력해져야 함은 물론이고 법보도 필요했다. 허나 지금 그에게는 법보가 매우 적었다.
분신의 제압
한제의 시선이 8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7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보다 더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오랜 세월 그 위에 발을 들인 사람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한제는 7층의 혼들을 훑은 끝에 비교적 완전한 혼환귀술과 다중환술을 찾아냈다. 하지만 8층에 있을 신통술은 그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강력할 터였다.
‘분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8층에 이르기는 힘들 텐데⋯⋯.’
한제는 이해득실을 따짐과 동시에 심신을 통해 분신의 존재를 천천히 감지했다.
그러는 동안 염란은 다소 초조한 마음으로 한제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제가 내기에 응하지 않을 것을 걱정함과 동시에 한제에게 정말로 8층에 이를 방법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우산은 내게 필요한 법보야. 이렇게 쉽게 넘겨버릴 수는 없어! 8층으로 이어진 계단에는 공겁기 후기 수준의 의지가 어린 금제가 배치되어 있어. 게다가 저자는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일 터. 그러니 8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해!’
그때, 한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원한다면 응해주지.”
한제의 말투는 분명하고 단호했다. 그만큼 그는 3천만 개의 도혼이 든 호리병이 탐났다. 게다가 방금 그가 감지한 분신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 중이라 그 힘을 조금 빌려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염란은 한제의 단호한 목소리에 덜컥 불안해졌다.
그러나 한제는 결심을 내리자마자 8층으로 이어진 계단의 입구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의 심신은 아득히 먼 곳의 분신과 연결되었다. 이 연계는 대혼문의 어떤 금제도 심지어 장혼각의 금제와 선강 대륙의 법칙마저도 무시한 채 한제의 체내로 이어졌다.
마침내 한제는 첫 번째 계단 위로 뻗었다. 그리고 그 발을 내딛은 순간, 대혼문 상공에서 이미 흩어져 사라졌던 허상이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전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기세를 발산하며 다시 나타났다.
“저, 저자가 지금 8층에 오르려 하는 것인가!”
“7, 8층을 동시에 관통하려 하다니, 수백 년 동안 이런 일은 없었어!”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 사이, 늙은 수련자들은 진중해졌다. 청천봉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청우 진인도 이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뒤틀린 표정을 통해 그의 심신 역시 진동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8층에까지 오르려 하다니! 정말 8층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면 30년을 앞당기는 셈인데⋯⋯?”
청우 진인은 이 일이 과연 대혼문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1대 선조의 예측과 자꾸만 엇나가는 현실에 그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해졌다.
염란은 7층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고 그 위로 신식을 뻗을 수도 없었지만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대혼문 내에 그녀가 새로 하사받은 산봉우리에서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이 돌연 몸을 바르르 떨더니 그 눈빛에 서서히 살기가 들어찼다. 그녀의 영혼이 염란의 신식에 짓눌리면서 염란의 눈이 된 것이다.
온 세상이 뒤흔들리는 듯했다. 허상으로 나타난 거대한 계단은 하늘 끄트머리에 이어져 있는 것 같았고 그 위에 선 채 한제는 선신처럼 보였다. 백발을 휘날리는 그에게서는 형용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채 대지를 훑던 한제의 시선이 염란의 신식으로 채워진 제자에게 닿았다. 그 시선이 닿은 순간 이 제자는 몸을 바르르 떨었고 염란은 자신의 신식이 튕겨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만약 한제가 조금만 더 그대로 응시했더라면 실제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염란에게 한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충격을 받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대혼문 수련자들 중 한제와 눈을 맞춘 이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콰쾅 소리가 울렸고 영혼과 원신이 육신에서 튕겨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