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04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수준과 무관했다. 심지어 내내 폐관수련을 이어오던 강력한 수련자들도 같은 느낌을 받은 상태였다.
한제의 시선은 곧 청천봉의 동굴로 향했다. 이에 그와 눈을 맞추게 된 청우 선조는 표정이 급변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뒤로 한 덩어리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본원 진신이 됐다.
한제의 눈빛이 스쳐간 것은 잠시였지만 청우 선조의 심신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청우 선조는 도고 일맥의 황성에 가본 적이 없었으므로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도시 안에 세워진 고조의 조각상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조각상을 봤더라면 한제의 모습에 익숙함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 상공에 나타난 한제의 거대한 허상은 고조의 고고하고 오만하며 도도한 기세와 매우 비슷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미세하게 달랐으나 분명 비슷했다.
“저, 저자는⋯⋯ 이한제가 아니야. 대체 누구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청우 선조는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나왔다. 허공에 선 그의 표정은 매우 무거웠다. 그는 한제의 비밀을 알지 못했고 지금 허상으로 나타난 어마어마한 기세가 한제의 분신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한제는 이내 시선을 거두더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덤덤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마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거대한 계단의 허상이 뒤흔들렸다.
쿵! 쿵!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한제는 멈추지 않고 여유롭게 걸음을 더 옮겼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열다섯 번째!
한제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그 계단 위의 금제가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이 광경에 대혼문 제자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수준이 높은 노인 수련자들과 청우 선조 역시 찬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제자의 몸속에 들어와 있던 염란의 신식은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진동했다.
쿵! 쿵! 쿵!
두 눈을 감은 한제는 또다시 세 걸음을 옮겨 열여덟 번째 계단에 오른 뒤에야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는 강력한 위압감이 흘러나와 아래 대지를 뒤덮었다. 그러자 대혼문 제자들은 감히 한제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다는 듯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염란의 심신이 담긴 제자는 몸을 덜덜 떨었다.
“염란, 내가 이겼다!”
덤덤하면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외치며, 한제는 마지막 걸음을 옮겨 8층에 올라섰다.
그 순간, 염란의 제자는 격한 경련을 일으켰고 체내에서는 염란의 신식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대혼문은 죽음과 같은 적막에 잠겼다. 하지만 곧 그 적막은 우레와 같은 탄성으로 깨져버렸다.
“서, 성공했다!”
“7, 8층을 단번에 뛰어넘었어! 이 장로가 장혼각 8층에 올랐어!”
“무시무시한 눈빛이야. 난 여태 누구에게서도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없어!”
그러는 동안 청우 선조는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는 하늘의 허상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장혼각 6층에 선 염란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상태였다. 7층으로 이어지는 층계참에 선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호리병은 강력한 힘에 이끌리듯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염란은 이를 악물고 호리병을 꽉 움켜쥐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건가?”
장혼각 8층에서 한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저벅, 저벅 하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한제가 다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장혼각은 일단 한번 발을 들였던 층에는 언제든 제재 없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혼문 상공에 나타났던 허상이 흩어져 사라진 상태라 다른 이들은 이제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오직 염란만이 어마어마한 기세가 들이닥치는 것을 느꼈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한제는 어느덧 7층에 이르렀다.
“졌으면 깔끔하게 승복해야지, 염란. 게다가 이 내기는 내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 네가 제안한 것 아닌가?”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한제의 목소리가 염란의 귀에 닿았다.
이에 염란은 바짝 졸아든 눈으로 저쪽 계단 끄트머리에 나타난 한제의 오른발을 보았다. 그녀가 선 곳에서는 오른발만 보일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정말 약속을 어길 셈인가?”
한제는 묵직한 위엄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위엄은 장혼각 내의 금제도 선강 대륙의 법칙도 능가하는 듯했다.
이어서 한제의 두 다리와 몸통도 천천히 염란의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그럴 생각인가?”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는 7층으로 오르는 아홉 번째 계단에서 멈춘 한제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목소리에 실린 압박은 한층 묵직해졌다. 염란은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마치 개미만도 못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눈앞에 나타난 상대는 한제가 아니었다.
“넌 누구냐!”
눈에 핏발이 선 염란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한제는 지금 분신의 기세로 염란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제 도심에 한 줄기 균열까지 일어난 염란은 앞으로 언제 어디서라도 한제를 마주치면 그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는 앞으로 염란이 한제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한제는 염란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었기에 그녀의 도념까지 망가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다시는 자신에게 덤비지 못하도록 해뒀을 뿐이다.
두 계단을 더 내려온 한제는 말없이 손을 휘둘렀다.
이 순간, 염란은 한제의 걸음걸음이 자신의 심신을 즈려밟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당장 호리병을 내놓지 않는다면 강력한 위압감에 완전히 짓눌리게 될 것 같았다.
염란의 눈에서 번득이던 빛이 흩어져 사라졌고 그녀는 심신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오른손이 풀리면서 호리병은 한제의 손에 쥐어졌다.
한제의 눈빛은 덤덤해 보였지만 그 안에서는 밝은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분신의 기세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호리병을 쥔 한제는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염란은 그제야 질식할 듯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드러났다.
한제는 다시 오른 8층에서 천천히 거닐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넓지 않은 이 층에는 혼이 단 아홉 개뿐이었는데 각각에는 온 세상을 다 파멸시킬 수 있을 만큼 그 위력이 어마어마한 신통술이 담겨 있었다.
한제는 몸에서 발산되던 기세를 서서히 거두어 허공 속 분신에게로 돌아갔다. 분신의 힘을 남용하거나 낭비할 마음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분신의 성장에 방해가 될 터였다. 그래서 9층으로 가는 것도 포기한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오를 수도 있지만 그 계단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위압감으로 미루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한제는 분신의 기운을 거두며 장혼각 8층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장혼각은 한 번 방문할 때 신통술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이 규칙은 바꿀 수 없어.’
각 혼이 품고 있는 신통술에는 혼환귀술도 다중환술도 심지어 혼연도도 있었다. 그 외의에 처음 보는 신통술도 있었다.
대혼문은 환술로 이름난 종파였다. 그러니 대혼문의 핵심 제자라면 대부분 환술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환술은 삼중이나 기껏해야 사중 정도에 불과했다. 적어도 팔중 이상의 환술은 되어야 충격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한제의 시선은 세 번째 혼에 머물렀다. 다중환술을 품은 혼이었다.
“팔중 환술이로군. 허나 다중환술의 최대치가 구중이니 불완전하다는 건데⋯⋯.”
한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9층에 올라가야지만 완전한 다중환술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군.”
혼연도
한제는 고민하다 일곱 번째 혼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혼에서 발산되는 기운은 다중환술을 품은 혼에서 발산되는 기운과 마찬가지로 강력했다. 염란이 발휘한 적 있는 혼환귀술을 품은 것으로 심지어 완전했다.
한제는 두 혼을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9층에 올라 반드시 구중환술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러니 다중환술을 지금 고를 필요는 없어. 게다가 이 호리병도 얻었으니 혼환귀술을 택하는 것이 좋겠군.”
이내 그는 결정을 내리고는 일곱 번째 혼 옆에 가부좌를 틀고 결인을 그린 오른손으로 허공에 뜬 혼을 가리켰다. 그러자 일곱 번째 혼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면서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며 천천히 내려와 한제의 정수리 위에 안착했다.
뒤이어 그 혼에서는 줄기줄기 연기 같은 어스름한 선이 흘러나와 한제의 정수리와 두 눈, 귀, 코를 비롯한 칠규를 통해 체내로 스며들었다.
한제는 어스름한 선이 체내로 스며들기 시작한 순간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됐다. 복잡한 구결 같은 그것은 마치 녹아들 듯 그의 영혼에 천천히 새겨졌다. 마치 그의 본능으로 자리 잡으려는 듯했다.
순식간에 사흘이 흘렀다. 이 사흘 동안 한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일곱 번째 혼에 담긴 혼환귀술을 흡수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 사이 대혼문 제자들은 모였다 하면 한제 이야기뿐이었다.
허나 정작 한제의 정체와 내력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반산몽 자매도 청우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한제의 기세에 눌려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염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선족이 아니라 고국 수련자라는 사실 또한 청우 선조의 엄격한 관리 덕에 대혼문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줄기줄기 안개로 차 있는 듯 몽롱해 보였다.
“혼환귀술⋯⋯이런 것이었군.”
중얼거리던 한제는 한참 뒤에야 탁한 숨을 길게 뱉어내며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대혼문의 신통술은 혼연도도 그렇고 혼환귀술도 그렇고 모두 잔혼을 한 갈래 갈라내야만 쓸 수 있어. 그 잔혼으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신통술을 발휘하는 거지. 그래서 당시 동부계에서는 귀면기 없이는 그 신통술을 발휘할 수 없었던 거야.”
어느새 1층까지 내려온 한제는 곧장 장혼각을 나섰다. 뒤이어 그가 균열 밖으로 나가자 청천봉 밖의 균열은 그대로 맞물려 사라졌다.
★ ★ ★
청천봉 동굴 안. 청우 선조는 떠나가는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한제가 3백 년의 시간을 앞당겨 9층에까지 이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는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1대 선조께서는 저자가 9층에 이른 지 아흐레째 되는 날, 녹마주(綠魔洲)의 3대 종파가 연합해 대혼문과 귀일종을 소멸시키러 올 것이라 하셨지. 그들의 목적은 천우주에 짓눌려 있는 천우의 혼⋯⋯.”
청우 선조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예언에 대해 준비를 해오고 있었지만 그 예언을 뒤흔든 한제 때문에 더욱 불안해졌다.
“1대 선조의 정체에는 비밀이 많아 그 뒤를 이은 선조들도 그분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 그저 우리 대혼문의 혼연도는 본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중 한 부분은 도연혼(道衍魂)이라 불린다는 소문만 있을 뿐. 1대 선조는 선강 대륙에 숨겨진 어느 강력한 문파의 도통(道統) 제자였으며 함께 도통 제자였던 이가 한 명 더 있었다는 소문이 있을 뿐.”
그 소문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각각 연혼도와 도연혼을 계승하여 수련했으나, 1대 선조(先祖)는 후에 어떠한 이유로 도통 제자 자격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선조(仙祖)가 막 천우를 봉인해 만들어놓은 천우주에 이르러 대혼문을 설립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마지막 소문을 떠올린 청우 진인은 순간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떨어진 중주 쪽을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