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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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5일이 지났다. 그 5일 동안 한제는 산봉우리에 틀어박혀 다중환술을 연구하고 연기 재료를 제련했다. 그의 앞에는 옥패의 내용에 따라 만들어낸 커다란 검은색 깃발이 서 있었다.
수많은 재료를 융합해 직조해낸 이 깃발은 촘촘히 짜인 것이 천처럼 보였으나 이는 겉모습에 불과했고 아직 완성된 상태도 아니었다. 형태만 갖추어졌을 뿐 그 안에 사혼이 녹아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며 깃발을 향해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곧장 몸을 날려 닷새 만에 동굴을 나섰다.
한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7일뿐으로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 귀봉으로 가서 귀혼을 잡을 생각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산봉우리 밖에 나타난 한제는 주위를 슥 훑더니 대혼문 북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혼문 지도에 따르면 귀봉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귀봉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귀봉은 대혼문 북쪽 가장자리 근처의 금지(禁地)로 사방이 무궁무진한 안개로 뒤덮여 있으며, 평소 주위를 지나는 사람이 드물었다. 오직 사혼이 필요한 이들만 스승의 안내에 따라 이곳에 발을 들였고 간혹 수준이 높은 핵심 제자는 홀로 방문하기도 했다.
귀봉에는 대혼문에서 지금껏 수집한 수많은 사혼이 있어, 비록 그 질은 높지 않지만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곳이 없었더라면 귀범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제자가 많았을 것이고 대혼문도 이름을 날릴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수시로 보충함에도 불구하고 귀봉의 사혼이 넘칠 정도로 많은 것은 아니었다. 사혼을 필요로 하는 제자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사혼 대부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혼을 수집하는 임무를 맡은 대혼문 제자들이 잡아들인 것이다. 허나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스스로 수련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는 데 성공한 사혼은 드물었기에 귀봉의 사혼을 얻더라도 그것을 다듬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즉, 대부분의 사혼은 그저 대혼문 제자가 거둘 때까지 가만히 봉인되어 있는 셈이었다.
귀봉 밖에 선 한제는 안개에 휩싸인 음산한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기운이 훅 느껴지는 것이 마치 황천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한제는 추호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경지로 황천을 만든 적도 있는 그이기에 귀봉의 음침함과 서늘함은 친숙할 정도였다.
한제는 망설임 없이 귀봉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한 줄기 금제의 파문이 보일 듯 말 듯 발산돼 주위를 뒤덮었다. 마치 한제가 이곳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이내 금제의 파문은 사라졌고 한제는 방해 없이 귀봉에 발을 들였다.
귀봉은 민둥산이었다.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높기는 했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적어도 수천 개는 될 듯 빽빽하게 솟은 봉분뿐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한제는 봉분을 하나하나 지나칠 때마다 각 봉분 안 사혼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봉인되어 있었는데 개중에는 봉인이 다소 느슨해졌는지 흘러나오는 사혼들도 있었다.
한제는 조용히 신식을 뻗은 채 산봉우리를 올랐는데 위로 갈수록 봉분 안 사혼의 수는 적어졌다.
봉우리 꼭대기에 오르자 이전까지의 봉분들과는 확연히 다른 봉분이 눈에 들어왔다. 여태껏 봐온 봉분과 달리 이 봉분에는 묘비가 있었다. 묘비의 글씨가 흐릿한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된 듯했다.
묘비 아래, 하얀 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른 여인이 꿇어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그 흐느낌은 심신을 파고들어 한제의 마음마저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 외의 다른 소리는 없었다. 이따금 음산한 바람만이 한제를 등진 채 꿇어앉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흐느낌은 천천히 멈췄다. 허나 여인은 분명 한제의 존재를 감지한 듯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이건 내 묘비야.”
한참 뒤, 공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흐릿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것 같군.”
잠시 침묵하던 한제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백의의 여인은 돌연 몸을 바르르 떨더니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날 볼 수 있나?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여인은 한참 뒤에야 물었다.
“그래.”
한제가 조용히 답했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의 모든 사혼을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의 본원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왼손과 오른손 같은 관계였다.
“넌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야. 난 네 혼도 아니고⋯⋯.”
여인은 묘비에 새겨진 흐릿한 글씨를 매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세워진 일고여덟 개의 봉분은 검은 기운을 발산했고 여러 사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중 두세 개의 사혼은 중품 귀범을 만들 수 있을 것처럼 강력해 보였다.
이들이 이 귀봉에서 품질이 가장 높은 사혼이었다.
“내 시체를 찾을 수가 없어. 그저 이 묘비밖에는⋯⋯.”
백의의 여인은 말을 잇다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잠시 후 품질이 높은 사혼이 있는 산꼭대기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 백의의 여인이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은 어디에 있는 거지? 내 집은? 내 가족은 어디에 있는 거야?”
심신을 파고드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에 한제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름이 뭐지?”
“…몰라. 잊어버렸어.”
여인은 흐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으로 곤허라 부르도록 하지.”
말을 하며 돌아선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여인의 모습은 흩어지듯 사라지고 묘비가 세워진 봉분만 남았다.
잠시 후, 한제는 그곳을 떠났다. 이 여인의 혼으로는 기껏해야 초품 등급의 귀범을 만들 수 있을 뿐이었지만 집도 가족도 어디 있는지 모르고 흐느끼는 여인의 모습에 한제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사혼을 택했다.
사혼을 깃발에 녹여 넣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여인의 혼을 녹여 넣자 한제의 귀범은 돌연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깃발에서는 수시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와 심신을 파고들었다. 누구라도 그 소리를 들으면 하얀 옷을 입은 채 울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될 터였다.
7일째 되는 날 해 질 무렵, 옥패 하나가 여러 금제를 뚫고 날아들어 동굴 안에 가부좌를 튼 한제의 앞에 이르렀다.
“이한제, 천우 세 번째 혈로 가 그곳을 지키도록 하라!”
옥패에서 청우 선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동굴에 울려 퍼졌다.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신식을 뻗어 옥패에 담긴 정보들을 파악했다.
대혼문의 역대 선조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천우주에 일곱 개의 혈을 뚫어놓았다. 천우주가 된 천우의 몸에 있던 일곱 개의 정혈(精穴)을 따른 것이다.
이 천우혈에서는 천우의 힘을 빌려 극강의 금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천우주 수련자들은 이곳에서 갖가지 행운을 얻기도 했다.
대혼문의 1대 선조는 일찍이 한제가 이곳에 올 것과 녹마주에서 천우주를 침범해 오리라는 것을 예측했고 그에 대한 준비 역시 해두었다.
천우 세 번째 혈
천우칠혈에도 늘 단해에 상주하는 제자들 중에도 대혼문은 첩자를 심어두었다.
대혼문은 원한다면 단해를 제련할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녹마주가 강력하다 한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에서는 그 옛날 대혼문 1대 선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대혼문의 1대 선조는 오늘날 선족 국사와 같은 혈맥으로 만고의 세월을 이어져 온 도통의 후계자였기 때문이었다.
청우 선조는 한제에게만 옥패를 보낸 게 아니라 네 명의 장로에게 보낸 상태였다.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살짝 턴 뒤 산봉우리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가 산봉우리를 나온 순간, 이 산을 불사르던 불바다는 즉각 그의 뒤에 응집해 화염 본원의 진신이 되더니 천천히 한제와 융합해갔다.
한 걸음 내딛은 한제는 대혼문 입구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나타난 한 줄기의 빛이 한제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이내 한제를 지나쳐 그보다 먼저 입구에 도착한 이 빛에서 녹색 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생김새의 사내가 돌아서서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 장로 나는 여문염이라 하네!”
중년 사내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제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여 장로로군. 초면인 것 같은데?”
“그럴 걸세. 맡은 일이 있어 몇 년간 외부에서 지내다가 얼마 전에 복귀했네. 잘 부탁하네.”
중년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그 무렵, 두 갈래의 빛이 다가왔다. 한 쌍의 남녀였는데 여인은 다름 아닌 염란이었고 사내는 도포 차림의 청년이었다.
“여 장로 자네도 동행할 줄은 몰랐는데?”
염란이 반가운 듯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해왔다.
“염란 장로 그리고 허동덕 장로. 자네들과 함께하게 돼서 영광이네.”
여문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나?”
도포 차림의 청년은 덤덤한 얼굴로 포권을 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말수가 적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한제는 세 사람을 살폈다. 세 사람 중 수준이 가장 낮은 이는 공겁기 초기였고 여문염은 공겁기 중기에 이른 듯했다. 당시 칠채선존과 수준은 비슷했지만 그에게는 못 미치는 느낌이었다.
이 세 사람은 매우 강력해 그들과 비교하면 공령기 절정에 불과한 한제는 우스워 보일 지경이었다.
한편, 염란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도 한제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동안 한제는 대혼문 안에서 꽤나 유명해진 상태였다.
‘장혼각의 7, 8층을 연달아 돌파한 사람이니 얕잡아봐서는 안 되겠지.’
허동덕이 한제를 훑어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해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선단을 일찍 폭발시키기까지 했다. 게다가 단해에서 돌아오는 데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자야.’
여문염도 단해에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무척 짧았지만 이는 1대 선조가 남긴 운주를 이용한 덕이었다.
“좋아, 다들 도착했군. 우리 임무는 천우 세 번째 혈을 지키고 녹마주의 침입에 대항하는 걸세. 쉽지 않은 일이지. 그러니 최대한 조심하게.”
여문염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세 사람에게 포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