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19
동시에 하늘에는 갈라진 틈과 같은 어스름한 빛 한 줄기가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세 자루 검은 비검이 비집고 나왔다. 이 검들에서 발산되는 살기에 초원의 풀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말라붙었다.
세 자루의 비검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거인과 함께 돌진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극천 초원 전역의 대지에서는 돌연 무궁무진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새카만 안개는 눈 깜짝할 사이 사방을 뒤덮었고 꿈틀거리며 점점 퍼져 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소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짙은 안개가 천우의 모습으로 응집됐다.
“우워어어!”
모습을 드러낸 천우는 달려드는 거인과 세 자루의 비검을 향해 우렁차게 포효했고 그대로 폭발했다. 그러자 흘러넘칠 듯 강력한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며 녹마주 수련자들을 휩쓸었다.
지하 깊은 곳, 궁전 안의 여문염이 진지한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모든 공겁기 도우들은 나를 따르라! 이 안개 진에서 우리의 힘은 무한하며 세상의 힘을 원하는 대로 뽑아 쓸 수 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궁전에서는 일곱 갈래의 빛이 곧장 튀어나왔다. 여문염을 포함한 이들은 순식간에 안개 속에서 번쩍 하고 사라졌다.
이 무렵, 지면의 안개는 마구 꿈틀대면서 녹마주 수련자들을 완전히 뒤덮은 상태였다. 지하 궁전의 1만여 수련자들 역시 일제히 날아올랐다.
첫 전투의 시작이었다.
다른 수련자들 틈에 섞여 있던 한제는 쉭 소리를 내며 극천 초원을 뒤덮은 안개 속에 녹아들었다. 이 안개는 녹마주 수련자들에게는 신식과 위력을 가로막은 장애물이었지만 천우주 수련자들에게는 온몸으로 스며드는 자양강장제와도 같았다.
만 명에 가까운 수련자 대군 사이에서 한제는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았다. 오직 염란만이 한제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1만 대군을 슥 훑어보았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은데다가 주위가 안개로 가득 휩싸인 탓에 끝내 한제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녹마주 수련자들은 힘겹게 안개를 헤치며 나아갔다. 특히 공겁기 중기의 두 노인이 어마어마한 수준을 자랑하듯 돌진하자 짙은 안개는 뒤로 물러날 조짐을 보였다.
공겁기 중기는 선강 대륙에서도 한 지역의 패주가 되거나 중급 종파를 세우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9종 13문 같은 종파 내 장로 중에도 이 정도 수준에 이른 이는 많지 않았다.
녹마주의 서로 다른 마문(魔門)에 속한 공겁기 중기 노인 장씨와 조씨가 공격할 때마다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 여문염이 긴 빛을 그리면서 달려들자 장씨 노인이 안개 속에서 그를 막아섰다.
콰르릉! 콰쾅!
거대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층층의 광풍과 같은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양측의 수련자는 감히 두 사람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고 재빨리 물러났다.
녹마주의 조씨 노인은 장씨 노인과 함께 여문염에게 달려들었다. 여문염만 꺾는다면 다른 자들은 신경 쓸 것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조씨 노인이 막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염란과 허동덕, 그리고 또 다른 공겁기 초기 수준 수련자가 다급하게 달려들어 그를 막아섰다.
사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봐야 공겁기 중기 수련자를 막아내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공겁기의 수준별 차이는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한제는 일곱 개의 본원을 가지고 공겁기 초기 수련자와 맞붙은 적이 있지만 공겁기 중기 수련자에게는 여덟 개의 본원을 가진 지금이라 해도 감히 맞설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 극천 초원에 드리운 천우혈의 진에서 짙은 안개의 도움을 받는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염란을 비롯한 세 사람은 조씨 노인에게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더라도 막아서는 정도라면 가능했다.
허나 녹마주 수련자 중에는 아직 공겁기 초기 수준의 수련자가 넷이나 더 있었다. 이 두 쌍의 남녀는 화려한 복장으로 미루어 그 신분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꼭 녹마주 쪽에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천우주 쪽에도 각 종파의 선조인 공겁기 초기 수련자 세 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명의 수련자가 안개의 힘을 마구 빨아들이며 녹마주의 공겁기 수련자 넷에 맞서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온 세상이 진동했다. 이제 양측의 모든 공겁기 수련자들이 치열한 접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양측 수련자들의 대대적인 살육이 시작됐다. 양상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2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한데 뒤얽혔는데 짙은 안개 때문에 그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곳곳에서 어지럽게 비명과 고함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한제는 그 안개 속에서 마치 유혼처럼 움직였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나침반의 지도는 하얀 빛과 녹색 빛으로 빽빽했다.
사방에서 쉭, 쉭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신통술을 발휘할 때 나타나는 빛은 안개에 가려져 어렴풋했지만 그 짙은 살기와 한기까지는 가려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던 한제는 돌연 오른손을 쳐들어 오른편의 안개를 가리켰다. 그 손짓에 붉은 빛과 함께 나타난 혈살검이 강력한 기세를 발산하며 쏘아져 나가더니 한 녹마주 수련자의 미간을 관통했다.
한제는 다시 나아갔다. 그의 목표는 저 멀리 공겁기 수준 강자들이었다.
그가 질주하듯 이동하는 동안 주위를 감싼 안개 속에는 검은 안개가 한층 더 나타났다. 천우칠혈의 진으로 생성된 안개와는 다른 이 검은 안개에서는 포악하고 잔인한 느낌이 짙게 풍겼고 그 안에서는 붉은 혀가 수시로 날름날름 나타나곤 했다.
한제는 뒤섞여 치열한 전투 중인 일곱 명의 공겁기 초기 수준 수련자들에게서 수만 척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공겁기 초기 수련자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꼭두각시 이사를 활용한다 해도 쉽지 않지.’
한제는 아홉 차례의 현겁을 뛰어넘어 진정한 공겁기에 이른 수련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고 있었다.
동부계 안에서 정말로 공겁기 초기에 이르렀던 것은 전가 노인과 칠채도인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세 번째 주혼과 융합하는 데 성공해 칠채선존이 되었다면 그 수준은 공겁기 중기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지금의 한제는 공겁기에 미치지 못한 이들이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단해에서 공겁기 직전의 여덟 번 내지는 아홉 번의 현겁을 거친 세 명의 남녀를 죽인 경험도 있다. 허나 진정한 공겁기에 발을 들인 이들을 죽이려면 특별한 준비가 필요했다.
선강 대륙에서도 공겁기 수련자가 죽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해당 종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공겁기 중기 수련자라면 더욱 드문 일이다.
한제는 꿈틀거리는 안개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는 일곱 명의 수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승부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사실 승부를 가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모두 공겁기에 이른 상태라 신중하게 굴기만 한다면 죽음은 충분히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제는 조급해하지 않았고 가부좌를 틀었다. 꼭두각시 이사의 검은 안개와 사방을 뒤덮은 안개에 휩싸인 덕분에 다른 이들에게 발각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일곱 명의 공겁기 초기 수련자가 싸우고 있는 곳에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그 여파에 휩쓸릴 수 있기에 누구도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직 한제만이 가까이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한 번의 공격으로 공겁기 초기의 수련자 한 명을 죽일 기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사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고 혈살검은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어. 역령인은 상대가 도망칠 수 없도록 막을 테고 다중환술은 시간을 벌어주겠지. 마지막으로는 혼환귀술을 날려야 해! 허나 그것만으로는 그저 중상을 입히는 데 그치고 말 거야. 죽일 수는 없어.’
한제는 고민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몇 시진이 지났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살육의 소리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격렬해졌다. 양측에서는 이미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허나 한제는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기다렸다.
기습
녹마주 도마종의 장로인 유지원은 이제 막 공겁기 초기에 이른 수련자였다. 도마종 종주와 혈연으로 이어진 직계 후손이기도 했다.
같은 종파의 장로인 허미와 두 명의 다른 종파 출신 도우와 함께 이번 작전에 참여한 그는 자신과 같은 공겁기 초기 수준의 천우주 수련자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수만 따지면 자신들은 네 명으로 상대의 세 명보다 많았으나 상대는 마치 무한한 힘을 가진 것처럼 갖가지 신통술을 끊임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자신과 녹마주 동료들은 주위를 감싼 안개에 신식이 제한을 받았기에 몇 시진 후에는 전투에서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쾅! 콰쾅!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공겁기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지원은 체내의 선력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방을 뒤덮은 안개가 선력을 빼앗아가기까지 했다.
‘이 빌어먹을 안개! 사자들은 언제쯤 오는 것인가!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결인을 그려 한 송이의 검은 연꽃을 소환해 천우주의 공겁기 수련자가 소환해낸 검은 용을 막아냈다.
콰르릉!
두 허상이 충돌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유지원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세 동료는 그의 목적을 파악한 듯 몸을 훌쩍 날려 다른 공격들을 막음으로써 유지원이 단약을 먹을 틈을 벌어주었다.
네 사람은 몇 시진 동안 이어진 교전에 단약으로 체내의 선력을 보충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싸움을 계속 이어갈 수 없을 터였다.
유지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가 수련한 공법은 여인의 음혼을 응집하여 검은 연꽃을 만들어내는 술법으로 그의 손에서 죽어간 여인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뒤쪽으로 수만 척 물러난 유지원은 허공을 움켜쥐어 열 개가 넘는 검은 빛 구슬을 소환했다. 각각의 빛 구슬 안에는 나체 상태의 작은 여인이 하나씩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에는 원한이 가득해 보였다.
유지원은 입을 쩍 벌려 그 빛 구슬들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려 했다.
한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내내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한제가 두 눈을 번득였다. 그토록 기다려온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저자다!”
한제의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청우 진인이 제시한 첫 번째 조건은 공겁기 초기 수련자 열 명을 죽이는 것이었으니 첫 걸음을 뗄 시간이었다.
벼락처럼 몸을 날린 한제가 손을 휘두르자 혈살검이 유지원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혈살검의 예리함은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쉭 소리를 내며 찰나의 순간 달려든 혈살검에 검은 빛 구슬들을 삼키려던 유지원은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곧장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연꽃 한 송이가 나타나 더없이 짙은 살기를 풍기며 돌진해오던 혈살검과 충돌했다.
콰쾅!
우렁찬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몸을 홱 돌린 유지원의 두 눈에서는 짙은 살기가 번득였다.
“누가 감히 이 몸을 기습하려 드느냐!”
하지만 그가 몸을 돌린 순간 한제는 대답 대신 곧바로 공격에 나섰다.
한제 뒤편의 안개로부터 포악한 포효와 함께 그 안에서 한쪽 팔을 잃은 이사가 튀어나와 유지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천 척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이사는 유지원이 몸을 돌렸을 때 이미 눈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헉!”
유지원은 안색이 급변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검은 안개 속에서 공겁기 초기 수준의 기운이 발산되는 것을 똑똑히 느낀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꼭두각시임을 알아차린 그는 다급하게 물러나면서 소매를 휘둘러 일곱 송이의 검은 연꽃을 소환했다.
콰쾅!
연꽃과 이사가 충돌하자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수만 척 떨어진 곳에서 교전 중이던 공겁기 초기 수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녹마주의 세 수련자는 표정이 급변해 곧장 그를 도우러 오려 했지만 천우주 수련자들이 앞을 막아섰다. 그들로서는 방금 전 굉음이 들려온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편, 일곱 송이의 검은 연꽃은 모두 무너져 내렸다. 허나 이사도 무사하지는 못해 곳곳에 부상을 입은 상태로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그러면서도 긴 혀로 마치 예리한 검처럼 유지원의 가슴팍을 뚫었다.
“크악!”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지독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유지원은 상처를 살필 틈도 없었다. 본래 남아 있던 선력이 얼마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주위를 감싼 안개에 흡수당하고 있던 데다가 방금 전 일곱 송이의 검은 연꽃을 소환하면서 힘이 거의 남질 않았다.
그는 질주하듯 뒤로 몸을 날리면서 오른손을 휘둘러 어스름한 빛 덩어리를 소환하더니 그대로 삼키려 했다.
거의 동시에 한제는 재빨리 거대한 깃발을 소환해 크게 휘둘렀다. 그 순간 이 하얀 깃발에서부터 여인의 흐느낌이 울려 퍼져 유지원의 심신을 파고들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하얀 옷을 입고 뒤돌아 앉아 흐느끼는 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이에 유지원은 빛 덩어리를 삼키는 것조차 잊은 채 우뚝 멈춰버렸다.
‘지금이다!’
한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후려쳤다.
콰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하늘을 뒤덮은 안개가 꿈틀거리더니 유지원의 상공에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나 내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유지원의 뒤에서는 확 터져 나온 불빛과 함께 화염으로 이루어진 손바닥이 접근해왔다.
유지원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하늘과 후방에서는 거대한 손바닥이 들이닥쳤고 머릿속에서는 백의 여인의 흐느낌이 갈수록 격렬해졌으며, 나가떨어졌던 꼭두각시가 다시 포효하며 달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붉은 검 역시 번득이면서 한 줄기 거대한 검광이 되어 돌진해왔다.
한제로서는 상대의 체내 선력이 바닥난 이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갖가지 신통술을 쏟아부은 것이다.
하지만 공겁기 초기 수련자를 죽이는 일이 그리 간단할 리 없었다. 유지원은 두 눈이 바짝 졸아든 상태에서도 혀끝을 깨물어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이 피는 붉은 갑옷이 되어 그의 온몸과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감싸더니 붉게 물들였다. 피부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