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22
고민하던 여문염은 주씨 노인을 불러 한 가지 분부를 했다. 주씨 노인은 공손한 태도로 알겠다고 답한 뒤 곧장 동굴을 떠났다. 그리고 지난 이틀 동안 몸 상태를 거의 회복한 한제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이 한제 도우, 오늘 밤에는 도우가 순찰을 좀 해줘야겠어.”
손님은 여문염의 분부를 받고 한제를 찾아온 주씨 노인이었다. 한제의 동굴 밖에 선 그는 거절 따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주씨 노인은 한제를 중요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비록 대혼문의 장로라고는 해도 수준이 너무 낮았다. 아마도 무슨 연줄이 닿아서 운 좋게 장로가 됐으리라.
이는 여러 종파에서 흔한 일이었다. 대신 그런 자들은 종파에서 중시를 받지 않고 그저 허울뿐인 지위를 유지했을 뿐이다. 그런 자들의 본모습은 전장에 서면 낱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주씨 노인은 내심 한제를 경멸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틀 전의 전투에서도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않았어. 한데 여 장로가 저자에게 순찰을 맡기려는 것을 보면 뭔가 있는 건데⋯⋯. 어쩌면 대혼문으로부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 궁전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동굴에서 지내는 거겠지.’
주씨 노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노인의 말에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잔잔했다. 그는 어둠에 녹아든 듯 숨어 있는 상태라 심지어 백발마저 어둠에 완전히 잠겨 보이지 않았다.
“이 장로 내 말 못 들었는가?”
주씨 노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외쳤다. 한제가 대혼문 장로라는 신분만 믿고 자신을 무시하는 거라는 생각에 불쾌해진 것이다. 이에 주씨 노인은 소매를 휘둘렀고 그러자 동굴의 문은 콰쾅 소리와 함께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봐,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답을…”
이어서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던 주씨 노인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동굴 안에 가부좌를 튼 한제의 차가운 눈빛에 어째서인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섰기 때문이다. 마치 여문염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가 자네에게 내 동굴을 파괴할 자격을 주었던가?”
한제는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한 마디를 툭 던지더니 주씨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한제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주씨 노인은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 동굴에 들어선 순간 본 것은 수련자가 아니라 원고의 짙은 살기를 품은 채 쉬다가 휴식을 방해 받은 한 마리 흉수 같았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느낌일 뿐이었지만 그는 지금 진정한 공포에 질린 상태였고 주씨 노인은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원신도 마찬가지였다.
주씨 노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느덧 동굴 밖까지 물러난 그의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 이 장로! 이, 이게 무슨 짓인가!”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든 주씨 노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한제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다가왔다.
이내 어둠에서 벗어난 한제가 빛 아래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 주씨 노인은 숨을 쉬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이렇게 강력한 압력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제는 10척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주씨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주는 압력에 주씨 노인의 머리는 텅 비어 버렸다.
“여, 여문염 장로가⋯⋯.”
감당하기 힘든 묵직한 압박에 주씨 노인은 그대로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고 이에 재빨리 진실을 고했다.
그때. 한제의 눈빛이 저 멀리 떨어진 궁전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으로 향했다. 여문염이 머무는 곳이었다.
한제의 시선이 이동한 순간, 궁전 안의 여문염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궁전의 벽을 사이에 둔 채 한제의 시선을 마주했다.
주씨 노인은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그를 잠식했던 두려움은 그에게 잊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상태였다.
‘저자는 운 좋게 무슨 연줄로 장로가 된 것이 아니구나! 저자의 실력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주씨 노인은 속으로 외쳤다.
‘저런 무시무시한 사람을 건드리게 되다니… 여문염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잠시 후 여문염의 궁전으로부터 눈을 뗀 한제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주씨 노인의 곁을 스쳐가면서 오른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살짝 쳤다.
“내 동굴의 문을 파괴한 사람은 죽음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할 터. 허나 자네는 다른 이의 사주를 받은 것이니 목숨은 살려주지. 내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동굴의 문을 완벽하게 고쳐놓도록!”
말을 마친 한제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다가 사라졌다.
그는 순찰 임무를 거절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의 총 책임자인 여문염의 지시였다. 괜히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쿨럭, 쿨럭! 크으으…”
한제가 떠난 뒤 주씨 노인은 몸을 바르르 떨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그의 눈은 두려움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그는 곧장 어디론가 질주하려 했다. 한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새로운 동굴 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주 도우, 잠깐 이리 와보게.”
하지만 주씨 노인은 귓가에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문염이었다.
‘둘 사이의 갈등에 어찌 나를 끌어들이려 하는가!’
주씨 노인의 표정은 매우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여문염의 소환에 응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그는 어쩔 수 없이 궁전으로 향했다. 여문염과 만난 뒤에도 한제의 동굴 문을 고칠 시간이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지 않았을 경우의 결과를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 ★ ★
극천 초원 땅속에서 솟구쳐 올라가던 한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밤에 접어든 만큼 더욱 밝아진 달빛이 초원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허나 그 달빛은 한제가 나타나자 겹겹의 검은 구름에 가려졌고 대지 역시 금세 어두워졌다. 한제의 모습 또한 그 어둠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한제는 조용히 초원 위를 걸었다. 지면의 풀들이 사라락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밤중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은 검은 구름에 완전히 뒤덮였다. 저 멀리서 습한 바람이 불어와 한제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날렸지만 그마저도 어둠 속에 가려진 터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초원을 걸으며 한제는 모완을 떠올렸다. 두 눈에는 슬픔이 깃들었다. 그는 저물공간 안에 잠들어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자신의 오른손을 매만졌다. 그러고 있노라니 오른손의 온기가 꼭 모완의 온기처럼 느껴졌다.
허덕재
2천여 년은 매우 긴 동시에 그만큼 짧기도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이 낯선 대륙의 어둠 속을 계속해서 거닐었다.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 때문인지 외로움은 깊어졌다.
‘나는 네가 더 이상 춥지 않게 하려고 화염으로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네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려고 온 세상을 천둥으로 뒤흔들었으며, 네가 숨 쉴 수 있게 하려고 수만 리를 걷고 하나하나의 계를 관통했다. 또한 나는 네 눈을 뜨게 하려고 마도에 입문했고 선인을 죽였으며, 하늘과 땅을 뒤집었다.’
한제는 사색에 잠긴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둠을 깊은 밤을 좋아했다.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외로운 모습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상자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그 기억은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그 상자와 함께 자신마저 잊어버린 채 찾아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상자를 걸어 잠그고 열쇠를 삼켜버렸다. 열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그것을 건드리지도 못하도록.
어떤 사람은 그 상자를 손에 쥔 채 스스로에게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상자를 아주 깊은 곳에 묻어버린 채 따뜻한 봄을 맞아 꽃들이 피어날 때를 기다렸다.
상자 안에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 감정은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내 상자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군.”
한제가 중얼거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그의 외로움도 쓸쓸함도 적막함도 보이지 않았다.
순찰은 지루했다. 하지만 한제는 지루함에 혼자 걷는 것에 어둠으로 스며드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달은 검은 구름에 가려졌지만 완전히 뒤덮인 것은 아니었다. 한제는 마치 방향을 가르쳐주듯 살짝 드러난 달빛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깊은 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이 점점 짙어지는가 싶더니 먹먹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바람도 휘, 휘 불어닥쳤다.
꽈르릉!
쏴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붓듯이 내릴 때가 되어서야 걸음을 멈춘 한제는 비에 뒤덮인 세상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흔들어 금제 나침반을 소환했다. 전방에서 열 개가 넘는 녹색 빛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곧장 물러났고 방향을 틀어 눈 깜짝할 사이 수만 척을 이동했다. 나침반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번득였다.
한제가 방향을 튼 순간, 나침반에 나타난 십여 개의 녹색 빛 또한 같은 쪽으로 방향을 틀어 빠르게 그를 추격해왔다. 그와 동시에 나침반에서는 다른 세 방향에서도 십여 개의 녹색 빛이 나타났다. 모든 빛은 한제를 포위하려는 듯 빠르게 달려들었다.
“이게 바로 여문염의 목표였군.”
이 모든 것이 여문염의 계획임을 한제 또한 진즉 알고 있었다. 여문염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자신에게 순찰을 맡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녹마주 수련자들이 보일 반응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사실 한제는 순찰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내 숨어만 있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때로는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를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만약 내가 여문염이라면 이 순간 지하 궁전으로 진입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을 거야!”
한제는 대지를 박찼지만 그 순간 느껴진 것은 대지에 녹아들어 지하 궁전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저지하는 강력한 반동뿐이었다.
“역시 그렇군!”
한제는 냉소하며 자신의 사방을 포위하듯 달려드는 나침반 속의 녹색 빛들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사실 한제가 지하 궁전에서 나오기로 한 것은 최대한 빨리 청우 진인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함이었다.
“두 무리에는 공겁기 중기 수련자가 다른 두 무리에는 공겁기 초기 수련자가 있다. 보아하니 내가 금제 나침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유지원을 죽인 사람이라는 것도 눈치챈 모양이군!”
몸을 훌쩍 날린 한제는 그 순간 발아래 일어난 파문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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