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23
같은 시각, 저 먼 곳에는 공겁기 초기 수준의 여자 수련자가 녹마주 수련자 수천 명과 함께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앞에는 허상의 나침반이 하나 떠 있었는데 그 안에 한제가 가진 나침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여인은 이를 토대로 다른 이들에게 한제의 위치를 알리는 중이었다.
꽈르릉!
우렁찬 천둥소리와 함께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허덕재는 녹마주의 공겁기 초기 수준 수련자였다. 이 수준은 그의 한계치로 특별한 행운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수준을 높일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적잖은 이득을 약속한 마도종의 제안을 받은 그는 천우주와의 전투에 응했고 지금은 세 번째 혈을 노리는 대군에 속해 있었다.
이때 그가 이끄는 십여 명의 수련자 중 수준이 가장 높은 이는 공현기 중기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천쇠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허덕재를 위수로 십여 갈래의 빛을 그리며 돌진했다.
허덕재는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유지원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전에 나서기 전, 도마종의 장 장로가 했던 약속 때문이다.
“이한제를 죽이는 자에게는 내 직접 종주께 간청하여 도마종 천갱(天坑)에서 1천 년간 수련할 기회를 줄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녹마주의 마갈(磨蝎)을 봉인하기 전, 선조가 그 마단(魔丹)을 거두었을 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무너진 마단의 일부가 대지에 떨어지면서 다섯 개의 천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섯 천갱 안에는 무궁무진한 마기가 담겨 있어 누구든 그 안에서 수련한다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수준이 오랫동안 정체된 허덕재에게는 꿈에 그리던 기회였다.
‘이한제, 난 널 죽이고 그 기회를 잡아야겠다!’
허덕재는 서늘한 눈빛으로 입술을 핥았다.
한데 그때, 돌연 한 줄기 충격이 심신에 떠올랐다.
“끄아악!”
몸을 홱 돌린 허덕재의 귀에 처연한 비명이 꽂혔다.
그를 따르던 자들 중 열 명의 머리가 날아가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들의 원신 역시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허덕재가 본 것이라고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누군가였다.
붉은 검을 쥔 그는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단칼에 열 명의 수련자를 죽였고 뒤로 물러나 곧장 사라졌다.
허덕재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한제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허덕재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한제!”
그는 곧장 몸을 뒤로 물리면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비 내리는 검은 하늘에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의 허상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 꽃은 하늘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컸고 일견하기에 무척 아름다웠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꽃은 수많은 해골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골 꽃이 하늘에 나타난 순간, 한제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적들은 다섯이 남았으나 공겁기 수련자 허덕재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문제될 게 없었다. 실제로 그 네 명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때, 한제가 다시 움직였고 혈살검이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질주해 두 사람을 휩쓸었다. 그들은 경련을 일으키다가 끔찍한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나침반과 융합된 한제는 세 무리의 녹마주 수련자들이 빠른 속도로 돌진하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두 명의 공겁기 중기 노인은 아예 무리에서 이탈해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중이었다. 그들의 속도라면 반 시진 안에 이 근처에 이르게 될 터였다.
또 다른 공겁기 초기 수련자 역시 무리에서 이탈하여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반 시진⋯⋯.”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허덕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때 해골 꽃으로 신호를 보낸 허덕재는 내심 크게 기뻐했다. 누구보다 먼저 한제를 발견하고 신호를 보냈으니 다른 이들이 올 때까지 시간만 끈다면 큰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이끌던 무리의 다른 이들이 죽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한제가 달려들자 곧장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휘둘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쏟아지듯 나타난 백만여 개의 문양이 거대한 사자의 허상을 이루었다. 몸길이가 수천 척에 달하는 이 사자의 허상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렁차게 포효하며 한제를 향해 돌진했다.
한제는 이토록 빨리 결인을 그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한제는 달려드는 사자에게 혈살검을 휘둘렀다.
콰르릉!
격렬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충격으로 인해 지면의 풀과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이 흩어졌다. 한제를 중심으로 반경 10만 척에는 비가 그친 듯한 모습이었다.
신통술을 발휘하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세 걸음을 물러난 허덕재는 대지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 손이 지면에 닿기 전까지의 짧은 순간에 4백만 개에 달하는 문양을 소환한 그의 손은 곧 대지를 꾹 눌렀다.
콰쾅!
순간 소리와 함께 네 명의 거대한 진흙 인간이 지면으로부터 빠르게 솟아올라 사자 허상과 맞붙고 있는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사자 허상을 무너뜨린 한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네 명의 거대한 진흙 인간을 마주해야 했다. 그간 수많은 위기를 겪어온 그로서도 처음 마주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지?’
한제의 두 눈동자가 졸아들었다. 그는 네 명의 진흙 인간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동안 허덕재가 다시 한번 세 걸음을 물러나면서 왼손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그려진 5백만 개에 달하는 문양이 한 가닥의 향이 되었다. 허덕재는 이 향을 손에 쥐더니 한제를 향해 절을 했다.
그 순간, 한제는 심신에서 쾅 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기이한 힘 한 줄기가 심신으로 마구 파고들었다.
뒤이어 그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한 마리의 고래 같은 거대한 흉수가 되어 입을 쩍 벌린 채 한제를 집어삼키려는 듯 돌진해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허덕재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향을 바닥에 꽂은 뒤 몸을 훌쩍 날리듯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왼손으로 6백만 개에 달하는 결인을 그렸다. 동시에 오른손으로도 같은 양의 결인을 그린 그는 두 손으로 동시에 대지를 꾹 눌렀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제 주위의 진흙이 꿈틀거리더니 소용돌이가 되었다. 가장자리가 높이 솟은 진흙 소용돌이는 한제를 그 안에 꽁꽁 가두었다. 멀리서 보면 한제가 거대한 진흙 덩어리에 휩싸인 형태였다.
“죽어라!”
허덕재가 낮게 외치자 진흙 덩어리가 수축하기 시작했다.
허덕재가 녹마주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이유가 바로 신통술을 발휘하는 속도 면에서 남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속도 덕에 그는 동급 수련자들과의 전투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끝없이 쏟아붓는 신통술에 상대는 압도당하기 일쑤였다. 이는 도마종에서 소속된 종파가 없는 떠돌이 수련자인 그를 공손히 초빙한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진흙 덩어리에 갇힌 한제의 주위로 네 명의 진흙 인간이 몰려들고 있었다. 한제의 체내에는 방금 전 허덕재가 향을 든 채 절을 했을 때 밀려든 강력한 힘이 먹먹한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중이었다.
그때, 고래 같은 흉수의 허상은 입을 쩍 벌린 채 달려들다가 거대한 진흙 덩어리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러자 고래의 허상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진흙 덩어리는 여전히 남아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신 그 주위로 아홉 마리 검은 뱀이 허상으로 나타나 진흙 덩어리를 향해 독을 내뿜었다. 이 독은 진흙 덩어리 속에 끊임없이 스며들었다.
콰르릉!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진흙 덩어리가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서 강력한 한 줄기 힘이 뿜어져 나와 거대한 주먹으로 변했다. 이 주먹이 여러 마리의 검은 뱀을 무너뜨리며 진흙 덩어리를 완전히 흩어버리자 그 안에 들어 있던, 만신창이가 된 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생 수많은 전투를 치러왔던 한제였지만 이렇게까지 숨 돌릴 틈 없는 전투는 처음이었다.
천도를 삼키다
한제가 무너진 진흙 덩어리에서 빠져나온 순간, 저 멀리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노란색 비검들이 달려들었다. 뒤이어 그 비검 뒤로 진흙 거인 열여덟 명이 쿵, 쿵 하고 달려왔다.
끝이 아니었다. 진흙 거인 뒤로는 한 폭의 두루마리가 비단 띠처럼 펼쳐진 채 꿈틀거리며 빠르게 접근해왔다. 게다가 어스름한 빛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뼈가 마치 누군가가 던진 것처럼 한제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뒤에서는 꿈틀거리다 일제히 대지로부터 뽑혀 나온 대량의 풀이 녹색 물방울로 변해 쉭 하고 달려들었다. 또한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짙은 안개가 두 개의 거대한 손바닥이 되어 양쪽에서 급속도로 들이닥쳤다.
마지막으로 방금 전 한제를 삼킨 뒤 사라지면서 아홉 마리의 검은 독사로 변했던 고래의 허상이 다시 나타났다.
입을 쩍 벌린 녀석은 또다시 한제를 삼킬 기세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이 고래는 기이한 흉수로 녀석에게 세 번 이상 삼켜지면 허덕재와 동급의 수련자라 해도 중상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광경에 한제는 머리가 저릿해졌다. 그로서는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싼 신통술들을 본 한제는 자신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싸우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할 틈 따위는 없었다. 노란색 비검이 쉭 하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강철이라도 단번에 베어버릴 듯 매서운 기세였다.
까깡!
비검이 한제의 몸을 베었을 때, 마치 강철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달아 쏟아지는 비검에 한제는 연거푸 뒤로 물러나야 했다. 옷자락은 진즉 갈기갈기 찢겨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까지 만신창이가 된 것은 또 처음이로군.’
만약 도고의 육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비검만으로도 중상을 입고도 남았을 것이다.
비검에 이어 열여덟 명의 진흙 거인이 닥쳐왔다. 그들은 수백 척 떨어진 곳에 이르자마자 일제히 자폭했다.
콰콰쾅!
폭발로 인한 회오리 폭풍이 한제를 휩쓸었다.
“큭!”
한제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진흙 거인을 뒤따르던 두루마리가 회오리가 되더니 한제를 휘감았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 두루마리는 10만 8천 가닥의 얇은 실을 뿜어내 엄청난 속도로 한제의 체내를 파고들어 끔찍한 상처를 안겼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는 뼈가 날아들었다. 그 순간, 새카만 하늘에 한 줄기 거대한 균열이 벌어지더니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냈고 그 안에서 거대한 개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피에 굶주린 듯 무척 사나워 보이는 녀석은 붉은 두 눈으로 한제 근처에 이른 뼈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돌연 튀어나왔다.
이 흉수는 허덕재가 잡아서 기른 녀석으로 항상 적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어스름한 빛을 발하는 뼈를 덥석 물었고 그와 동시에 그 거대한 머리는 한제와 충돌했다.
“크윽!”
한제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며 튕겨나갔다. 그러는 사이 대량의 녹색 물방울이 그를 쫓았다. 이 액체가 한 방울씩 몸에 떨어질 때마다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뒤이어 더 큰 위기가 몰려왔다. 양쪽에서 매서운 기세로 다가오던 거대한 두 손바닥이 1백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한제의 체내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펑, 펑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제는 돌연 두 손을 들어 양쪽에서 다가오는 손바닥을 막았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거대한 고래 흉수가 그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콰쾅!
거대한 소리가 극천 초원에 울려 퍼졌다.
두 개의 거대한 손바닥이 한제의 두 손과 충돌한 순간, 그의 온몸에서는 피 안개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한제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고래 흉수는 이미 한제의 코앞에 이르러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허덕재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한제가 입을 쩍 벌려 검은 돌 하나를 뱉어냈다. 이 돌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검은색 빛을 발산하면서 어둠에 녹아들더니 고래 흉수와 비슷한,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허상이 되었다.
한제의 천도 지하마수였다.
멍하면서도 잔인해 보이는 눈을 굴리던 지하마수는 두려움 따위 잊은 듯 맹렬하게 달려들어 허덕재의 고래 흉수를 집어삼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