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24
“헛!”
허덕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면서 얼른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고래 흉수의 허상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가 늦었다.
허덕재의 고래 흉수는 뒤로 물러날 틈도 없이 지하마수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허덕재는 창백한 얼굴로 피를 왈칵 토해냈다.
“내… 내 천도가!”
비통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목소리였다. 허덕재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천도를 잃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제가 같은 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천도가 천도를 삼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한제는 천도를 데리고 동부계를 떠나온 상태였으나 녀석에 의해 세워진 규칙의 변화는 그대로였다.
한편, 무려 1만 척 뒤로 물러나던 한제는 천도를 공간석으로 거두었다.
이제 가까스로 숨 돌릴 틈을 갖게 된 한제는 몸 곳곳에서 밀려드는 극심한 고통을 억누르며 신중한 눈으로 저 멀리 허덕재를 바라보았다.
‘수련자가 이렇게 빠르게 신통술을 발휘할 수는 없어. 분명 뭔가가 있다. 아주 희귀한 신통술을 익혔을 거야. 만약 그 신통술을 배울 수 있다면⋯⋯.’
한제의 눈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번득였다. 동시에 심장도 쿵쾅거렸다.
한제는 돌진하는 대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발아래 일어난 파문과 함께 찰나의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방금 전까지 한제가 있었던 자리에 허덕재의 신통술이 콰쾅 하고 떨어졌다.
허덕재는 광분한 눈빛으로 몸을 홱 돌렸다.
“내 천도를 삼켰으니 네 천도를 내놔라!”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한제의 기운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내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허덕재였지만 지금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 무렵, 세 방향에서 공겁기 중기 수련자 두 명과 공겁기 초기 수준의 여자 수련자가 무리에서 벗어나 빠른 속도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제는 그보다 훨씬 멀리, 세 공겁기 수련자가 남겨두고 떠난 무리 근처에 나타났다. 지금이라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을 터였다.
★ ★ ★
극천 초원 가장자리. 수천 명의 수련자에게 둘러싸인 공겁기 수준의 여자 수련자는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앞에 놓인 허상의 나침반에서는 한제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한제를 상징하는 빛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난 것을 보자마자 그를 쫓고 있는 동료 수련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한데 그 빛은 또다시 사라졌다가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났고 여인은 불안해졌다.
“나이법을 발휘하는 법보를 가지고 있을 터. 그런 법보는 녹마주 전역을 통틀어도 세 개뿐이야. 천우주에도 많지는 않을 텐데 저자가 그런 법보를 가지고 있다니…”
그때, 한제를 상징하는 빛이 한 무리의 녹색 빛 옆에 나타났고 그 순간 녹색 빛 무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뒤이어 이 하얀 빛은 한 번 더 사라졌다가 다시 한참 떨어진 곳의 또 다른 녹색 빛 무리 옆에 나타났다.
여인은 다급하게 이 기이한 현상을 다른 공겁기 수련자들에게 알렸다.
★ ★ ★
같은 시각. 안개에 뒤덮인 녹마주 수련자 십여 명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이 비명이 잠잠해지자 안개는 꿈틀거렸고 이내 한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제의 얼굴은 혈색이 도는 듯 약간 붉었다. 허덕재와의 싸움에서 수많은 신통술에 심각한 내상을 입었지만 동부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련자들의 피와 살, 그리고 원신을 삼켜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이다.
연달아 두 무리의 녹마주 수련자를 삼킨 한제는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약 2각 후, 한제를 쫓던 녹마주 수련자의 세 번째 무리 역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제 초원에는 두 명의 공겁기 중기 노인과 두 명의 공겁기 초기 수련자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공겁기 중기와 초기 한 사람씩 짝을 이룬 채 한제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해왔다.
나침반을 통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한제의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그의 목표는 좀 전에 맞붙었던 공겁기 초기 수련자였다. 그자의 특이한 신통술을 어떻게든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하늘은 점차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는 더욱 거세어졌다. 쏴아아 하고 떨어지는 빗물에 초원 곳곳에는 진흙탕이 생겨나 그 위를 지나면 철퍽철퍽 소리가 났다.
한제는 나침반에 나타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네 개의 빛들 중 자신과 맞붙었던 공겁기 초기 수련자를 상징하는 빛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은 아깝지만 그 내부 구조와 금제는 모두 이해했으니 재료만 충분하다면 언제든 다시 만들어낼 수 있겠지.”
중얼거리던 한제는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어두운 색의 원신이 나타났다.
세 번째 무리의 녹마주 수련자들을 죽이면서 선별한 것으로 수준도 일정한 정도에 이른 상태였다. 다만 이 원신의 의지는 이미 지운 터라 남아 있는 것은 원신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한제가 왼손으로 꽉 쥐자 이 원신은 순간 무너져 내렸다. 한제는 그것이 완전히 흩어져 버리기 전에 신식 한 줄기를 그 안에 녹여 넣더니 오른손에 쥔 나침반에 주입했다.
원신은 하얀 연기가 되어 나침반 안팎을 맴돌다가 한제가 그 나침반을 내던지자 곧장 그 안에 스며들었다.
이어서 활활 타오르며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다 곧 모습을 감추었다. 원신이 스스로를 소모하여 얻어낸 엄청난 속도로 하늘 끄트머리를 향해 질주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리 오랫동안 날지는 못하고 타오르다가 천천히 흩어져 사라져 버리고 원신이 완전히 소멸되면 나침반은 그대로 추락해 어딘가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더욱이 이제 나침반은 없지만 그 안에 주입한 원신에 한 줄기 신식을 남겨뒀기 때문에 한제는 나침반에 떠오른 녹마주 수련자들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었다.
매미가 허물을 벗음을 뜻하는 이러한 금선탈각(金蟬脫殼)의 계 덕분에 한제는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그는 몸을 훌쩍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극천 초원의 또 다른 어딘가에 나타나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고 좌선을 했다. 화염의 본원 때문에 앉은 곳의 진흙탕은 그대로 말라버렸다.
그가 나침반의 내용을 감지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눈 깜짝할 사이 한 시진이 지났다. 그동안 녹마주의 공겁기 수련자 넷 사이의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두 공겁기 중기 노인은 이 일을 오래 끌고 싶지 않은 듯 한제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속도를 높였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한제가 내던진 나침반이 있는 곳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뒤에 남겨졌다.
그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가슴팍을 문질렀다. 그의 체내에는 공간석이 있었는데 한제는 그 돌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알았지만 그것의 작용까지는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하마수가 나타나 허덕재의 천도를 삼키는 것을 본 순간, 이 물건의 용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마수가 뭔가를 삼키는 힘을 훨씬 증폭시킬 수 있어. 이 돌 안에는 독립된 공간이 수없이 많으니까. 지하마수와 융합시킨다면 엄청난 변화가 있을 거야.”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어스름한 빛을 발하는 공간석이 튀어나와 손에 떨어졌다. 이어서 한제는 뒤에서 나타난 파문과 함께 사라졌다. 다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공간석은 바닥에 떨어져 잡초 사이에 숨겨졌다.
지금 한제는 공간석 안에 나타난 상태였다. 직접 이 기이한 돌 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 안의 수많은 공간 중 하나를 택했다. 산도 있고 빛도 있고 대지도 있었지만 물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듯했지만 물이 없다는 것은 이곳이 불완전한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그리 넓지 않아 대략 10만 리 정도에 불과했다.
함정
가부좌를 튼 한제는 번득이는 눈으로 사방을 잠시 둘러보다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남색 우산이 튀어나와 하늘로 돌진하더니 그 안에 녹아들면서 천천히 이 공간의 하늘을 대체했다.
뒤이어 한제는 오른손을 한 번 더 휘둘러 3천만 도혼이 든 호리병을 소환했다. 호리병은 대지에 융합했고 그 순간 지면은 바르르 진동하면서 짙은 죽음의 기운을 풍겼다.
한제는 이내 오른손을 들어 현라에게서 받은 금색 문양을 꺼냈다. 이어서 원신의 기운을 한 움큼 뿜어냈다. 이 기운과 충돌한 금색 문양은 밝은 금빛을 발산하며 떠밀리더니 남색 우산으로 대체된 하늘에 떠올라 태양이 되었다.
작업을 마친 한제는 자신이 만든 귀범을 꺼내 휘둘렀다. 깃발은 춤을 추다가 구름으로 변해 하늘에 걸렸다. 이 구름은 평범해 보였지만 사실 만물로 변화할 수 있는 심오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제가 꺼낸 것은 꼭두각시 이사와 흡혈마수였다. 흡혈마수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 크기를 변화시키더니 하늘에 뜬 흰 구름 속에 숨어들어 자취를 감췄다.
한편 이사는 대지에 녹아들어 지면에서 피어오른 3천만 도혼의 죽음의 기운을 숨겼다.
“이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없어.”
가부좌를 튼 채 중얼거리는 한제의 미간에서 회오리가 나타나 원인과 결과의 본원을 응집했다. 응집된 원인과 결과의 본원은 한 자루 검이 되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삶과 죽음도 진실과 거짓도⋯⋯.”
미간에서 연달아 튀어나온 두 개의 본원 역시 검이 되어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살육과 금제도⋯⋯.”
짙은 살기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이 어두워졌다. 시커멓게 몰려든 구름에서는 눈이 내리기까지 했다. 기이하게도 검은 눈송이 하나하나는 금제의 본원을 품은 채 천천히 떨어져 차곡차곡 쌓였다.
“화염과 천둥번개, 물도⋯⋯.”
한제는 두 팔을 휘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왼쪽 눈에서는 불바다가 일었고 오른쪽 눈에서는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내리쳤다. 이어서 불바다는 한 자루의 검이 되더니 곧 화산으로 변했다.
한편 천둥번개 역시 한 자루의 검이 되더니 검은 뇌해(雷海)로 바뀌었다. 물이 아니 천둥번개로 이루어진 바다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극천 초원의 어딘가 잡초 속에 숨겨진 공간석으로부터 부드러우면서도 어스름한 빛과 함께 나타났다. 이어서 그는 공간석을 집어 들더니 먼 곳을 내다보았다.
‘사냥터는 준비됐다. 이제는 사냥감을 끌어 들여오는 것만 남았군.’
나침반에 주입한 원신은 곧 소멸할 것이고 그럼 두 명의 공겁기 중기 노인에게 머지않아 따라잡힐 것이다. 그리고 두 노인 뒤로 한참 멀리 떨어진 두 명의 공겁기 초기 수련자 역시 온 힘을 다해 질주하는 중이었다.
한제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발아래에는 파문이 일어났지만 한제는 성급하게 세상에 녹아드는 대신 조금 더 기다렸다.
잠시 후, 한제는 나침반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 안에 주입했던 원신과 자신의 신식 한 줄기가 나침반과 함께 소멸된 것을 느꼈다. 원신이 사라지기 직전, 두 노인의 분노에 찬 포효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한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발을 쿵 굴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극천 초원. 긴 빛을 그리며 질주하는 허덕재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한제와의 전투에서 천도를 잃은 것은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천도는 그의 심신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그것을 잃은 순간 큰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허약해진 원신도 쉽사리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한제, 반드시 죽여주마! 쉽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실컷 고문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해주겠다!”
자신의 천도를 앗아간 한제에 대한 허덕재의 원한은 뼛속 깊이 사무친 상태였다.
한데 그때, 허덕재는 돌연 표정이 급변해 몸을 홱 돌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줄기 기이한 파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파동을 감지한 순간 허덕재는 저 멀리 허공에서 나타나 질주하는 한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상대가 자신에게 감지된 순간 화들짝 놀라며 속도를 더욱 높이는 것을 동시에 발아래에서 일어난 파문과 함께 기이한 방식으로 자리를 뜨려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한제! 거기 숨어 있었구나!”
허덕재는 금방이라도 발아래의 파문과 함께 사라지려는 한제를 보자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