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30
한제는 준비한대로 축지성촌을 발휘해 혼개의 전방에 나타나 여문염의 접근을 저지했다.
“이한제!”
여문염의 두 눈이 살기와 함께 충격으로 번득였다. 자신이 지하 궁전을 봉쇄할 때 분명 상대가 들어오지 못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데 죽기는커녕 버젓이 나타나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온 기회를 가로채려 하자 살기를 숨길 수 없었다.
“감히 내 앞길을 막다니, 죽고 싶은 게냐!”
여문염은 한제를 향해 달려들면서 오른손을 들어 공겁기 중기 수준의 위력을 발휘했다.
“대혼문의 장로이자 청우 진인의 명을 받아 이곳으로 파견 나온 나를 공격하는 것인가? 대혼문이, 선조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은가? 외세와의 전쟁 중 같은 편을 죽이겠다는 건가?”
한제는 여문염의 공격을 피하려 하지도 않은 채 힘차게 외쳤다.
그 일갈에 1천여 명의 수련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여문염 역시 안색이 급변한 채 속도를 살짝 늦췄다.
한제는 이 기회를 틈타 뒤로 몸을 살짝 물려 혼개와 접촉했다. 하지만 혼개와 융합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한제는 눈빛이 살짝 굳었다.
그런 한제의 모습에 여문염의 눈빛에서는 살기와 함께 비웃음이 드러났다.
“아직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다. 그전까지는 혼개와 융합하지 못해!”
“융합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네가 혼개를 차지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어!”
한제는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 올 때부터 조용히 지내왔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그가 대혼문의 장로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허나 이 순간, 한제는 당당히 자신의 기세를 내보였다.
그의 말과 행동에 1천여 수련자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들은 한제가 한참 부족한 수준으로 감히 여문염에 맞서는 것에 놀랐으나, 그의 당당한 말은 그 어떤 법보보다 예리하게 여문염을 저지했다.
‘저놈의 말대로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저자를 죽일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이곳의 모두를 죽이지 않는 이상 대혼문에서 나를 쫓을 거야. 심지어 모두를 죽인다 해도 선조가 예측하지 못할 리 없다. 그리 되면 나로서는 더 이상 천우주에 머물 수 없게 되지.’
그러한 상황을 떠올린 여문염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공격을 멈춘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이 장로였군. 갑자기 나타난 바람에 혼개를 훔치려는 외부인인 줄 알았지 뭔가. 부디 오해는 말게.”
여문염의 말에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 허나 여 장로 이 혼개를 자네가 갖는 것에는 내 동의할 수 없네.”
여문염은 하나 남은 주먹을 소매 속에서 바르쥐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누가 갖는 것이 좋겠는가? 자네인가?”
여문염은 이유는 묻지 않은 채 한제를 공격하듯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이 장로가 혼개를 가지고 싶은 모양이군. 자신의 욕심을 채우겠다고 이곳에 모인 동료들의 생사는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건가? 이 장로 내가 자네를 잘못 본 모양이야. 허나 자네가 혼개를 차지하고 싶다 해도 과연 자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를 이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네!”
여문염은 굉장히 영리한 자였다. 몇 마디 말로 한제를 탐욕이나 부리는 파렴치한 자로 몰아감으로써 위기를 벗어났다.
한데 그때였다.
“난 이 장로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염란이 한 걸음 나서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지하 궁전에 널리 퍼졌다.
그녀는 한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염 장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할 것이네!”
염란을 응시하는 여문염의 표정은 싸늘했다.
“이 나이 먹도록 그 정도도 모르겠나? 여 장로가 알려줄 필요는 없네.”
염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이 장로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곁에 있던 허동덕도 한 걸음 나섰다.
공겁기 수련자이자 같은 대혼문의 장로들이 나서며 한제를 옹호하자 1천여 명의 수련자들은 웅성이기 시작했다.
“허 장로도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좋아.”
여문염은 더욱 싸늘해진 눈으로 허동덕을 훑어보았다. 분노가 극에 달해 오히려 냉철해진 상태였다.
“자네들은 어떤가. 자네들도 이 장로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1천여 명의 생명과 천우주의 안위를 이 장로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여문염은 다른 종파에서 파견 나온 세 명의 공겁기 초기 수준 수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 사람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 쪽 손을 들어주건 대혼문 장로에게 미움을 받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한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세 사람이 입을 꾹 다물자 여문염은 냉소하며 아래로 시선을 돌려 1천여 명의 수련자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에 닿은 이들은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여 장로 다른 사람에게 묻는 건 그만두고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한제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문염은 잠시 한제를 바라보다가 불쑥 웃었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잠재우고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이 장로에게는 확실히 그럴 자격이 있네. 그렇다면 이제 자네에게 묻고 싶네. 왜 내게 혼개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공은 충분치 않았으니까.”
한제의 덤덤한 말에 여문염은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내 공이 충분치 않았다고? 으하하하! 재미있군. 난 모두를 이끌고 두 차례나 반격에 나섰고 지하 궁전으로 무사히 피신시켰네. 두 번의 전투에서 모두 상대편의 공겁기 중기 수련자와 맞섰지. 내가 없었더라면 지금 살아남은 이들의 목숨은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도 내 공이 충분치 않다? 그렇다면 이 장로 자네는 대체 어떤 공을 세웠나?”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유지원의 머리가 허상으로 떠올라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녹마주의 공겁기 수련자라네. 자네들도 내가 이자를 죽이는 것을 봤겠지?”
분노가 된 수치심
지하 궁전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가 이어서 시끌벅적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녹마주의 공겁기 수련자가 죽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허나 누가 죽인 것인지는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 주인공이 밝혀진 순간 흥분이 차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저 사람이었단 말인가! 궁전에 들어가지도 않고 우리와 같이 동굴에서 지내던 자인데!”
“수준이 공현기에도 미치지 못했거늘 어찌 공겁기 수련자를!”
“대혼문의 장로인데 약할 리가 없지! 분명 수준을 숨기고 있는 거야!”
“저런 사람이라면 혼개를 얻을 자격은 충분해!”
한편, 이미 그 정체를 예상하고 있었던 염란조차 유지원의 머리를 본 순간 찬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한제를 향한 그녀의 눈빛도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역시 저자였군!’
곁에 있던 허동덕 역시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조용하던 세 명의 공겁기 수련자들 또한 놀란 눈으로 한제를 돌아보았다.
주씨 노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는 여태 고쳐놓지 못한 한제의 동굴 문이 떠올랐다.
여문염 역시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한제의 손에 들린 유지원의 머리를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그는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라면 한제의 공이 자신보다 작지 않을 터였다.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농담이 심하군, 이 장로. 난 그때 수준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선배 한 분이 유지원을 죽인 뒤 머리를 잘라 한쪽으로 던져두는 것을 똑똑히 보았네. 한데 자네가 그 머리를 챙겨 공을 가로채려 들 줄이야!”
혼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상대를 모욕하고 깎아내려야 했다.
또한 혼개와의 융합을 위한 마지막 과정에는 이곳의 모든 이들의 참여와 동의가 필요했다. 이들이 인정하고 각자의 의지를 천우의 혼에 주입해야만 혼개와 융합할 수 있는 것이다. 여문염은 융합 이후의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 장로 자네가 공겁기 수준 수련자 앞에서 겁에 질려 숨어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어. 허나 남의 공을 가로채려 들다니! 이곳에서 수많은 동료가 용맹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네. 나는 그들을 잊지 않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럴 걸세. 천우주는 절대 그들을 잊지 않을 거야!”
마치 웅변을 하듯 1천여 명의 수련자를 둘러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 여문염은 다시 한제를 돌아보았다.
“그 머리를 거두고 이만 물러나게. 그러면 자네의 그 치졸한 행동은 눈감아줄 수 있어. 허나 계속해서 우리를 농락하려 든다면 난 장렬히 전사한 동료들을 대신해 직접 자네를 벌할 걸세! 천우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1만 명에 달하는 도우들과 우리 모두를 모욕하는 거야!”
여문염은 기이한 힘이 깃든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격앙된 표정은 마치 한제의 행동에 격분했지만 애써 참으려 노력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1천여 명의 수련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한제를 분노와 혐오가 깃든 눈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듣고 보니 맞아. 어찌 저자가 공겁기 수련자를 죽일 수 있겠는가?”
“남의 공을 가로채려 하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
“한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여 장로가 그런 상황을 목격했다면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지? 그리고 저 공겁기 수련자를 죽였다는 선배는 왜 지금은 도움을 주지 않는 걸까?”
“여 장로가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가운데 공겁기 수련자들은 각자 판단을 내린 후 침착한 표정으로 한제와 여문염을 바라보았다.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조소가 어린 눈빛을 숨기지 않고 여문염을 쳐다보았다.
여문염은 어째서인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괜한 걱정이야. 증거가 있을 리 없잖아! 원신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에⋯⋯.’
그렇게 생각하자 여문염은 마음이 놓였다. 유지원이 죽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죽기 직전 원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큼은 똑똑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이걸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군.”
한제는 더 이상 입씨름을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휘둘러 두 번째 머리를 소환했다. 허덕재의 머리였다. 두 눈에는 깊은 두려움과 원한이 어려 있었고 칠규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지하 궁전은 죽음과 같은 적막으로 뒤덮였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 머리에 고정됐고 심지어 공겁기 수련자들 역시 흠칫 놀랐다.
“저자는 허덕재 아닌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신통술을 발휘하던 그자야!”
“어째 두 번째 전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죽은 거였어!”
다른 종파에서 파견된 세 명의 공겁기 수련자는 첫 번째 전투에서 맞붙었던 허덕재의 놀라운 속도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염란과 허동덕 역시 심신이 흔들렸다. 특히 한제를 향한 허동덕의 눈빛에서는 처음으로 깊은 두려움이 나타났다. 그가 한제의 편을 들어준 것은 그저 여문염의 가식적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 결정은 매우 정확했다.
‘이 장로에게 혼개를 가질 자격이 없다면 누구에게 있겠는가?’
1천여 명의 수련자들 역시 잠깐의 침묵 이후 전보다 훨씬 큰 충격에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 입장에서는 한없이 높고 아득한 존재인 공겁기 수련자의 머리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 한제의 모습에 온몸이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