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37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노라니 운일봉은 감개무량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쨌든 동부계에서의 수만 년은 그의 삶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난 귀일종으로 돌아온 뒤 종파의 힘을 빌려 자네를 찾기 시작했네. 그런데도 끝내 찾지 못했건만 이리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그러니 내 이런 식으로 밖에는 기쁨을 표할 수가 없더군. 이해하게. 하하하!”
한제를 향해 성큼 다가서며 두 팔을 벌리는 운일봉에게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한제는 잠시 머뭇거리며 운일봉을 바라보다가 이내 마주 다가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운일봉이 한제와 그간 쌓인 회포를 풀려는 순간, 엄숙한 목소리가 대전에서 흘러나왔다.
“다들 모였군.”
한제를 한산한 곳으로 안내하던 운일봉은 한제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 섰다.
“우리 귀일종의 종주시네. 공겁기 후기 수준이시지.”
운일봉의 목소리가 신식을 통해 한제의 심신으로 전해졌다. 이에 한제는 엎드려 있는 거대한 흉수 같은 대전을 바라보았다.
“거기 셋, 이름을 고하라.”
위엄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휴생문의 당지아라 합니다!”
당지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소속 종파가 없는 떠돌이, 변운이라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도 대전을 향해 포권을 했다.
“대혼문의 이한제입니다!”
대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광장 주변을 감싼 금제 때문에 그 밖으로는 흘러나가지 않았다. 허나 그보다 한제를 놀라게 한 것은 금제로 인해 이곳의 변화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귀일종 전체를 근본으로 삼아 이곳에 응집된 금제였다.
“천우칠혈 중 세 개가 파괴됐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세 명의 천우사자는 죽었다. 허나 너희 넷은 각자 맡은 혈을 잘 지켜내는 공을 세웠기에 귀일종과 대혼문은 상을 내리기로 했다!”
엄숙한 목소리에서 오래된 기운도 풍기는 것으로 보아 목소리의 주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임이 분명했다.
“변운!”
“예!”
호명된 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넌 네 번째 혈을 잘 지켜냈다. 이에 난 너를 귀일종의 금계 장로로 삼고 귀일종의 보물인 금계오행개(金系五行鎧)를 하사한다!”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한 줄기 금빛이 대전에서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그 빛에서 발산된 서늘한 검기가 광장을 곧장 에워쌌다. 그리고 변운 앞에 멈춰 선 금빛은 금색 갑옷으로 변했다.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풍기는 갑옷을 본 변운은 격앙된 표정으로 대전을 향해 깊게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종주!”
그 순간, 금색 빛은 수많은 금색 선으로 변해 변운의 체내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당지아!”
다시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는 여섯 번째 혈을 잘 지켜냈다. 이에 네가 속한 휴생문을 세 배로 확장시켜주고자 한다. 앞으로 휴생문에서는 그만큼 많은 제자를 받아들이고 그만큼 많은 물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너에게는 귀일종의 보물인 수계오행개(水系五行鎧)를 하사한다!”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대전에서 튀어나온 한 줄기 남색 빛이 바닷물처럼 사방을 휩쓸며 당지아의 몸을 뒤덮었다. 몸에 달라붙은 빛이 온몸의 모공을 통해 체내로 스며들자 당지아는 바르르 경련하더니 감격한 듯한 표정으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운일봉!”
위엄 있는 운일봉은 잔뜩 긴장한 듯 진지한 얼굴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너는 다섯 번째 혈을 잘 지켜냈다. 이미 목계오행개(木系五行鎧)를 가지고 있는 네게는 귀일종의 4대 신통술 중 하나와 선기(仙器)인 도령(屠靈) 비수를 하사한다!”
곧 대전에서는 두 갈래 빛이 튀어나오더니 각각 옥패와 검은 비수 하나로 변했다. 비수는 무척 기이했다. 겨우 단검 정도 되는 길이에 원뿔 형태였는데 가시가 아홉 개나 달려 있어 꽤나 무시무시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종주!”
운일봉은 두 법보를 챙기더니 대전을 향해 깍듯하게 절을 올렸다.
“이한제!”
대전에서는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제는 침착한 얼굴로 대전을 바라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는 세 번째 혈을 잘 지켜냈다. 이에 나는 네게 화계오행개(火系五行鎧)를 하사한다!”
그러자 대전에서는 번쩍이는 빛과 함께 불바다가 튀어나왔다. 허공에서 타오르던 불바다는 화염으로 이루어진 듯한 갑옷이 되어 한제에게로 달려들었다.
“보상은 끝났다. 이제는 너희에게 극비 임무를 맡길 차례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데 운일봉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나와 앞선 두 사람은 모두 두 가지 선물을 받았다. 한데 어째서 이 형만 한 가지 선물을 받은 것이지?’
당지아와 변운도 이상하다 여겼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성격이 음험한 변운은 남의 일인 만큼 관심을 거두었고 한제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당지아 역시 이 문제를 무시하고 말았다.
천우주를 배반하다
“너희들이 맡을 임무는⋯⋯.”
위엄 있는 목소리가 막 임무를 설명하려는 순간, 한제가 외쳤다.
“잠깐!”
그는 서늘한 눈으로 대전을 응시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순간 운일봉은 경악한 듯 한제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당지아는 물론 심지어 변운마저도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
“너희들이 맡을 임무는 녹마주의 마갈 사당에 잠입하여 녹마의 조각상을 파괴하고 녹마의 혼에 중상을 입히는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면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엄숙한 목소리는 한제를 무시한 채 임무를 설명했다. 그리고 변운과 당지아, 운일봉은 임무의 내용이 워낙 놀라웠던 탓에 방금 전 한제의 돌출행동은 잊은 듯 입을 쩍 벌렸다.
녹마주에 진입하는 것만 해도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녹마주는 거의 비어 있다. 또한 녹마주의 강력한 선조들을 견제할 이들은 따로 준비되어 있어. 이걸로 임무 설명은 끝이다. 이한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내 말을 끊었지?”
목소리는 여전히 엄숙했다. 세상 그 무엇도 하염없이 태연한 그 목소리를 흔들지는 못할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상을 두 개씩 받았건만 어째서 저는 하나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제의 말투는 그리 공손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떠돌이 수련자가 아니라 대혼문 소속의 장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제아무리 귀일종의 종주라 해도 말이다.
“넌 수준이 가장 낮으니 갑옷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우리 귀일종과 대혼문의 협의에 따른 것이다. 불만은 이해하나 받아들이도록. 화계오행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다시 거둬들이도록 하겠다.”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짐에 따라 허공에 떠 있던 화염 갑옷은 곧장 다시 불바다 형태로 돌아가더니 대전으로 끌려 들어갔다.
“협의를 거쳐 결정된 일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한제가 대전을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대전에서는 한 줄기 어스름한 빛이 튀어나왔다. 빛에는 하얀 머리카락 한 올이 들어 있었는데 이 머리카락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펑 터지더니 한 사람의 허상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청우 선조였다.
“이렇게 보상을 한 상황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내 생각에 변함은 없을 것이네. 만약 이한제가 이를 속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천우주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게!”
한제는 허상으로 나타난 청우 선조를 응시했다. 이것이 청우 선조의 분신이 아니라 한 줄기 신식의 낙인이라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증거를 보여줬으니 이만 물러가거라!”
귀일종 종주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정말로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대혼문과의 협의를 통해 정해진 것이라면 더 이상 청우 진인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필요도 없으리라.’
한제는 입을 다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태도였다. 심지어 귀일종 종주가 상으로 내렸던 갑옷을 회수한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듯했다.
“이제 신통술을 발휘해 귀일종에서 지난 1만 년간 한 번도 연 적 없던 진을 열겠다. 그 진을 통해 녹마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 일단 한 줄기의 명혼을 내놓아라. 그 명혼은 너희가 임무를 완수한 후 다시 이곳으로 순간이동 시킬 때 사용할 것이다!”
명혼을 내놓으라는 말에 한제의 두 눈동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졸아들었다. 귀일종 종주의 말에 따른다면 녹마주에서 할 일을 한 순간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단점도 있다. 자신의 행적을 상대가 언제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귀일종 제자인 운일봉은 당연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미간을 두드렸다. 그는 순간 경련을 일으켰고 몸에서는 한 줄기 혼이 흘러나와 공처럼 응집되더니 대전을 향해 날아들었다.
변운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명혼 한 줄기를 뽑아내 대전으로 보냈다.
당지아는 한참이나 결정하지 못한 듯 이를 악물었다. 허나 그녀는 종파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기에 결국 명혼을 내놓았다. 사실 그러지 않는다면 녹마주에서 되돌아 올 가능성도 줄어들 터였다.
세 사람의 명혼이 대전으로 흘러가는 내내 한제는 대전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불쑥 말했다.
“저는 일단 거절하겠습니다. 대혼문으로 돌아가 선조를 만난 뒤에 결정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한제는 뒤로 물러나 광장을 벗어나려 했다.
“떠나는 것은 좋으나 혼개는 두고 가야 한다!”
순간 대전에서는 목소리와 함께 안개로 이루어진 검고 커다란 손이 쑥 빠져나왔다.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손이 한제를 향해 다가왔다.
한제는 찰나의 순간 수백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상황이 워낙 급작스럽게 바뀐 탓에 그로서는 대체 무슨 일인지에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었다.
청우 선조의 바뀐 태도와 귀일종의 갑작스러운 압박에 그는 무척 곤란했다. 자신이 알지 못한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그는 혼개를 내놓는다면 귀일종을 빠져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혼개를 잃는다면 수준을 증폭시키지 못할 테니 더욱 위험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직감일 뿐이었으나 매우 강렬했다. 사실 한제는 혼개를 독점할 마음은 없었다. 그의 원래 계획은 청우 진인이 맡긴 세 가지 임무를 완수해 대혼문으로부터 받은 세 가지 선물에 보답한 뒤 혼개를 천우주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었다. 혼개는 그의 소유물이 아니라 천우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강한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귀일종 종주의 말만 듣고 순순히 혼개를 내놓을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다. 더 따지고 들어봐야 더욱 깊은 덫에 걸리게 될 뿐. 허나 그렇다고 명혼을 내놓는다면 그때부터는 저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터. 이 상황은 결국 나를 노린 것이다. 분명 뭔가가 있어. 귀일종은 내 신분을 알고 있다. 내가 동부계에서 온 것도 현라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도. 그런데도 날 이렇게 대한다는 건…?’
한제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깊게 고민해볼 상황은 아니었다.
짧은 순간, 혼개를 포기하고 알 수 없는 결과를 기다리는 것과 혼개를 내놓지 않고 상대와 맞붙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던 한제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