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52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반경 수천 리 안으로 힘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 범위 안에는 아직 한 덩어리 순수한 힘이 남아 있었다. 전갈의 혼이었다.
‘넷!’
몸을 훌쩍 날린 한제는 두 손으로 마갈 사당을 꾹 누르며 흡입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사당은 바르르 진동했고 그 안에서는 처연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섯!’
그 순간, 사당 안에서 나타난 한 덩어리 안개가 한제의 두 손을 통해 그의 체내로 빨려 들어갔다. 일전에 여섯 조각으로 쪼개졌던 전갈의 분혼 중 한제가 흡수하고 남은 두 조각 중 하나였다. 얼마 전만 해도 이 분혼 조각을 찾기란 쉽지 않았겠지만 한제는 지금 수준이 대폭 오른 데다가 이미 흡수한 네 개의 조각을 통해 감응을 일으킴으로써 곧장 찾아낼 수 있었다.
한제는 전갈의 혼에 담긴 힘을 흡수했고 그러자 비쩍 말라가던 그의 원신은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여섯!’
한제의 원신은 다시 마르기 시작했지만 전갈의 혼에 담긴 힘 덕분에 어느 정도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허나 그 균형은 금세 무너졌다. 세상의 힘을 더 많이 찾아내 원신을 보충하지 않으면 얼마 버티지 못할 터였다.
이 현겁을 통과한 수련자 대부분은 대량의 단약을 삼켜대거나 그 외의 다른 힘을 흡수해 저항했다. 모든 원신은 일곱을 셀 무렵이면 사라지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버텨내 총 열을 셀 때까지 견디면 그제야 이 겁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셋은 그전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단약을 소화하는 속도보다 빨리 원신이 허약해지기 때문이다. 단약의 품질이 높을수록 유리하긴 하나, 아무리 좋은 단약이 있다 해도 통과하기란 쉽지 않았다.
십식고신겁에는 누구든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수동적인 대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날 때까지 버텨낼 뿐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한편 대량의 단약을 삼켜대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천존도 마찬가지였다. 전설에 따르면 아홉 차례의 현겁을 쉬지 않고 연거푸 통과했다는 두 명의 대천존 역시 이 겁 앞에서는 그저 이를 악문 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을 뿐이라고 한다.
시간은 무정하게 흘렀다.
‘일곱!’
잠시 유지되던 평형은 금세 깨져버렸고 한제의 원신은 곧장 대폭 말라붙었다. 하지만 한제는 덤덤해 보였다. 체내 원신이 잠깐이나마 평형을 유지한 순간 머리를 굴려 이 겁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현겁은 재앙이자 행운이다. 이 현겁은 매우 기이하긴 해도 어쨌든 한 차례의 현겁에 불과하지. 이 겁의 힘이 센지, 아니면 이 이한제의 신념이 더 센지 보자!”
고개를 번쩍 쳐든 한제는 두 눈을 기이하게 번득였다. 그 눈빛 안에는 강력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한제는 이 현겁을 통과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을 파악해냈다. 그로서는 이 겁의 위력 앞에 수동적으로 휩쓸리는 것이, 그저 목숨만 부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다름없는 그런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게는 충분한 신념이 있고 내 원신 역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과연 이 겁이 나의 신념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자!’
고개를 들어 하늘의 어스름한 문양을 바라보는 한제의 눈에서는 굳은 의지가 드러났다.
평생 수차례 천벌을 마주해온 그에게는 애초에 하늘에 대한 경외심이란 없었다. 오히려 강한 저항심과 반발심만 남았을 뿐이다.
‘여덟!’
한제 체내의 원신은 급속도로 말라붙어 이제 단 한 가닥만 남게 됐다. 하지만 이 한 가닥의 원신에는 한제의 신념과 여태껏 수련해오면서 쌓아온 불굴의 의지, 그리고 모완을 부활시키고 말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이 한 줄기 원신은 시간이 흐름에도 말라붙거나 와해되지 않았고 한제의 성격처럼 굳건히 남았다.
“난 내 원신이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 내 존재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내 인생이 오로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다!”
아홉!
한제의 몸은 바르르 진동했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동시에 그의 원신은 강한 신념을 품은 채 십식고신겁의 위력 앞에서도 버텨냈다.
지금 이 원신은 더 이상 원신이 아니라 신념이었다. 하늘의 위력은 세상 모든 원신을 지워 없앨 수 있지만 신념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만약 신념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하늘에 좌우된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끝내 하늘을 탓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스스로 초래한 결과일 뿐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버린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한제는 달랐다. 그의 신념은 마치 화염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늘의 문양을 향한 그의 눈에서는 하늘마저 놀라게 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번득였다.
공겁
“난 이 모든 현겁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모완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 세상의 정점에 서리라는 것을 믿는다!”
한제는 하늘을 향해 맹세와 같은 신념을 외쳤다.
열!
한제의 신념을 파괴하려는 힘이 강림했다. 성난 파도와 같은 그것은 한 줄기 신념으로 남은 한제의 원신을 그대로 잠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제의 원신은 끝내 버텨냈다. 뿐만 아니라 콰쾅 하고 폭발하기까지 했다.
“하늘의 위엄은 내 육신을 내 원신을 그리고 내 영혼을 파괴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내 신념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한제는 낮게 외치며 하늘을 향해 한 발 나섰다. 하늘에 비하면 개미만도 못해 보였지만 그의 체내에서는 그 하늘을 변화시키는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기세와 함께 어스름한 빛으로 이루어진 문양을 향해 달려든 한제는 곧장 두 손을 들어 올려 허상의 문양을 죽 찢어냈다.
한제의 신념에서 기인한 힘에 실체를 갖추게 된 허상의 문양은 그대로 찢겨 무너져 내렸다.
콰르릉!
그 순간, 비쩍 말랐던 한제의 원신은 곧장 원상태를 회복하더니 이어서 더욱 증폭했다.
이렇게 일곱 번째 현겁인 십식고신겁까지 통과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온 세상에 엄청난 변화가 일더니 번득이는 노을빛과 함께 두 번째 문양이 허상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문양은 훨씬 복잡했고 서늘한 기운까지 풍겼다. 그리고 이 문양이 나타난 순간 여덟 번째 현겁인 수혼겁(壽魂劫)이 강림했다.
십식수혼겁은 원신은 건드리지 않고 오직 영혼의 수명만을 노린다. 이 겁이 발휘되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이 찰나는 수만 년이 될 수도 채 수백 년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수련자의 수명은 무한하지 않아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어 있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영혼 또한 수명이 끝에 달하면 죽음을 맞게 된다.
영혼의 수명을 단박에 없애버리는 수혼겁은 십식고신겁보다 훨씬 기이했다. 이 겁의 목표는 수련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수련자들이 스스로 수명을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겁은 아홉 번째 현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수혼겁 앞에 10만 년의 수명을 내놓는다면 아홉 번째 현겁까지도 굉장히 수월하고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지만 공현기 수련자 중 10만 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 이는 매우 드물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수명을 바치지 않는다면 아홉 번째 현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1할도 채 되지 않는다.
여덟 번째 현겁은 이전의 겁과 달리 수련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얼마만큼의 수명을 내놓을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일종의 선택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여덟 번째 현겁에 이른 수련자라면 나름의 계획이 있게 마련이다. 대부분은 수련에 필요한 수명을 계산해 나머지 수명을 바침으로써 아홉 번째 현겁에 이를 기회를 얻는다.
허나 공겁기 수준에 이른 뒤로는 대천존 급에 이르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수명을 늘릴 수가 없다. 말하자면 여덟 번째 현겁에 바치고 남은 수명이 그 수련자가 누릴 수 있는 수명의 전부인 것이다. 이는 특별한 행운을 얻지 않는 이상 바꿀 수 없는 운명이 된다.
두 번째 문양을 응시한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이는 특수한 방식을 통해 한제가 단숨에 여덟 번째 현겁의 모든 것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흠…”
한제는 고민에 잠겼다. 그는 칠채선존이 이 현겁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으리라는 것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한제는 자신이 지금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그가 만난 이들 중 아홉 번째 현겁에 이른 것 같다고 느꼈던 수련자 대부분은 여덟 번째 현겁에서 그 걸음을 멈춘 상태였던 것이다.
이 현겁은 통과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수명을 바치기만 하면 곧장 물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 1년의 수명만 바쳐도 여덟 번째 현겁을 통과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그다음에 맞게 될 아홉 번째 현겁이 훨씬 강력해지게 마련이다.
한참을 침묵하던 한제는 번득이는 눈으로 하늘의 문양을 바라보다가 몸을 훌쩍 날려 오른손으로 꾹 눌렀다.
“1년을 바치지!”
그 순간, 한제의 몸은 경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거의 눈치챌 수 없을 정도의 떨림이었다. 이어서 문양은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덟 번째 현겁이 끝난 것이다.
이제 한제는 현겁에서 물러날 수도 있게 됐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현겁을 기다렸다. 마지막 현겁마저 통과한다면 그의 수준은 공겁기 초기에 이를 터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번득이는 금빛과 함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이광의 활이 나타났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활의 시위를 당겼다. 어스름한 빛으로 응집된 이광의 화살이 시위에 매겨졌다. 뒤에 선 오행 진신 역시 두 손을 쳐들었는데 그 손에는 이광의 활과 화살 허상이 나타나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제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이때 그의 미간에서 천둥번개가 번득이며 튀어나오더니 오행 진신 뒤에 이르러 천둥번개 본원의 진신을 형성했다. 파멸적인 기운을 품은 진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 자세를 취하자 이광의 활과 화살 허상이 나타났다.
여덟 번째 현겁에 단 1년의 수명을 바치기로 한 것은 이 아홉 번째 현겁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이 현겁이 얼마나 강력하건 상관없다. 그저 힘겹게 버텨내고 통과하는 것은 이전 여덟 차례의 현겁으로 충분하다. 아예 파괴해주지!’
한제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천벌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다. 이는 수차례의 천벌을 마주하는 동안 명확하게 생겨난 감정이었다. 그 뿌리는 모완을 끌어안은 채 천도를 향해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한편, 한제가 시위를 당기자 선조의 머리카락으로 형성된 경맥에서는 짙은 선력이 발산되어 온몸을 맴돌며 두 팔로 몰려들어 이광의 활과 화살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활에서는 전보다 더 짙은 금빛이 뿜어져 나와 한제를 완전히 뒤덮었다.
뒤이어 이 금빛은 마치 한 마리 용처럼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달려들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기세였다.
동시에 한제의 좌측에 선 오행 진신이 쥔 활에서는 파란색, 붉은색, 노란색의 빛이 발산됐다. 물과 화염, 흙 본원에 대응하는 각각의 빛은 하나로 응집하더니 더욱 밝아졌고 각자 다른 색을 띤 세 마리의 용이 되어 포효했다.
한제의 우측에 선 천둥번개 본원 진신이 쥔 활에서는 번득이는 전광이 튀어나와 다섯 번째 용이 됐다. 전광으로 형성된 뇌룡의 온몸에는 수많은 번개가 흘렀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녀석에게서는 심지어 오행 진신과 한제의 본체마저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다섯 마리의 용이 하늘을 잡아먹을 듯 거칠고 매섭게 포효하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때, 하늘에 나타난 마지막 문양과 함께 아홉 번째 현겁이 강림했다.
윤회겁(輪回劫). 세월을 바꾸고 한 사람을 윤회에 빠뜨려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겁. 공겁기 대존이 되려 하는 수련자들의 발길을 잡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 문양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강력한 위력을 뿜어냈다.
“훼겁(毁劫)!”
한제의 우렁찬 외침이 그를 감싼 금빛을 뚫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눈 깜짝할 사이 수천 리를 뒤덮었고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녹마주 수련자들의 귀에도 닿았다.
“훼겁이라니! 현겁을 파괴하려 하고 있어!”
“이런 오만한 일은 오직 녹마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이들의 창백한 얼굴이 충격으로 뒤덮인 그때, 한제는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짙은 선력을 품은 채 쏘아져 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소리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멀리서 보면 화살이 아니라 한 마리 금룡처럼 보였다. 날카로운 소리는 이 용의 포효이고 금빛을 번득이는 화살은 그 몸통이었다.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했고 만물이 진동했다.
금룡은 형용할 수 없는 기세를 품은 채 돌진했다. 그 뒤를 이어 오행 진신 역시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놓았고 파랗고 붉고 노란 용이 거칠게 포효하며 금룡을 따랐다.
네 마리의 용이 된 네 개의 화살이 폭발하듯 쏘아져 나갔다.
아니, 다섯 이었다. 천둥번개 본원의 진신 역시 시위를 놓았기 때문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천둥번개로 이루어진 뇌룡이 되어 돌진했다. 파멸적인 기운과 함께 금제 규칙의 기운, 천둥번개의 위엄을 품은 이 용은 그 자체로 치명적이었다.
다섯 마리의 용이 하늘을 찢고 다섯 개의 화살이 하늘의 숨통을 끊으려 했다.
한제의 금빛 화살이 가장 먼저 아홉 번째 현겁인 윤회겁을 상징하는 문양에 떨어졌다.
꽈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