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63
“곧장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군요. 대천존님,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한제는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청했다.
대천존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당장 결정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도마종 천존 선조와 맞붙는 동안 천존의 도를 약간이나마 깨달은 그는 아직 자신의 명성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더욱 명성을 떨친 후에 자신이 따를 대천존을 선택해야만 선족 황성에서 겪을 위기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의 청년은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았다. 지혜로 반짝이는 눈은 마치 한제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했다.
이내 도일은 미소를 지었다.
“시간을 주마. 너라면 천존열(天尊涅)에 도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아홉 번째 층을 통과한다면 다시 찾아오마.”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 선 그는 도마종 천존 선조의 도포로 녹아들어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멈춰 있던 모든 것이 움직임을 되찾았다. 피어올랐던 먼지가 가라앉고 바람이 불었다.
한제가 느꼈던 묵직한 위압감 역시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때 도마종 천존 선조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도마종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네. 허나 자네, 좋은 기회를 놓쳤군.”
강자는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는 법. 한 번의 교전으로 한제는 도마종 천존 선조에게 인정과 존중을 받게 됐다.
말을 마친 붉은 머리의 노인은 곧장 자리를 뜨려했다.
“기다려주게. 내가 도마종을 파괴한 이유를 말해주겠네. 예전에 도마종이 전력을 다해 나를 죽이려 한 일이 있었지. 한두 명의 짓이 아니었어.”
변명이나 설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한제가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강력한 도마종 천존 선조를 존중하게 된 것이다.
한제의 말에 우뚝 멈춰 선 도마종 선조는 한동안 침묵했다.
“됐네. 세상사, 인과는 순환하는 법이지. 도마종은 파괴됐지만 덕분에 난 더는 이쪽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됐네. 앞으로 나는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고 도만을 추구할 걸세.”
붉은 머리의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제를 힐긋 보았다.
“도일 대천존은 우리 선족의 다섯 대천존 중 자기 사람의 결점을 가장 잘 감싸주시는 분이네. 자네도 그분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걸세. 선황이신 팔극 대천존은 거만하고 중주의 구제 대천존은 포악하며, 북주의 현봉 대천존은 워낙 초연하여 약천존이 아니면 포섭하려 하지도 않네. 그리고 동주의 자양종 쌍자 대천존은⋯⋯.”
여기서 말을 끊은 노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본디 가장 강한 대천존이었으나 지난번 환생을 거치는 도중 영혼이 분열돼 두 사람으로 나뉘어 버렸지. 이번 생에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할 거야. 소문에 의하면 성격은 매우 온화하다고 하나 나라면 절대 그녀를 택하지는 않을 걸세.”
붉은 머리의 노인은 이미 도마종이 완전히 소멸해버린 지금, 그 이유만으로 다른 천존과 악연을 이어갈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제는 너무도 강력했기에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천존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한제에게 일러주었다.
한제로서는 좋은 정보를 얻게 되자 내심 기뻤다.
“고맙네.”
한제가 포권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천존열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겠지? 천존열이란, 선족 선조가 당시 선족 구역에 만들어둔 기이한 장소라네. 총 열아홉 층으로 나뉜 그곳은 천존을 위해 준비된 장소로 오직 천존 수련자만이 들어갈 수 있고 자신의 수준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지. 난 5백 년 전에 들어가 봤지만 세 번째 층까지밖에 이르지 못했다네.”
붉은 머리의 노인이 말했다.
“천존열이라…”
한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노인의 예상대로 한제는 그게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약간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도일 대천존으로부터 그곳은 선조께서 태고 신경을 흉내 내 만든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네. 만약 열아홉 번째 층까지 통과한다면 후에 태고 신경에 들어가게 됐을 때 대천존이 될 가능성이 남보다 월등히 높다는 뜻이라더군. 당시 무봉 대천존이 열아홉 번째 층을 통과했지.”
붉은 머리의 노인은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어차피 비밀스런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문
“천존열에는 어떻게 들어가나?”
한제가 물었다.
“간단하네. 천존 수련자가 된 후, 선족 구역 내 어디든 안전하게 폐관수련을 할 곳을 찾아 원신을 내보내면 되지. 그 원신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하늘을 향해 날려 보내면 곧 들어갈 수 있어!”
붉은 머리의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문으로는 고조 역시 고족 구역에 태고 신경을 흉내 낸 시험장을 만들었다는군. 선족 구역과 고족 구역에 있는 두 개의 시험장은 당시 선조와 고조 두 사람이 동시에 함께 만들어낸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지. 소문일 뿐이라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일세.”
붉은 머리의 노인은 설명을 마친 뒤 다시 포권을 했다.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네. 행운을 빌지. 그럼 이만!”
붉은 머리의 노인은 폐허가 된 도마종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몸을 훌쩍 날려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떠난 뒤에도 한제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먼 곳을 내다보았다. 도일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함으로써 한 번의 기회를 놓쳐버렸으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선황과 도일을 제외하면 세 명의 대천존이 남았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천존과 싸울 때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많은 천존과 싸울수록 깨달음도 커질 테고 명성도 높아지겠지. 그나저나 천존열 시험장이라⋯⋯. 그런 곳이 있을 줄이야.”
한제는 곧장 가부좌를 틀었다. 머릿속에서는 도마종 천존 선조와 맞붙었던 과정과 도일이 휘둘렀던 주먹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도일 대천존의 주먹질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뒤덮었다.
겉보기에는 유약해 보였지만 사실 그 주먹에는 한제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의 힘이 담겨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몇 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가부좌를 튼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한제의 주위에는 한 층의 보호막이 있어 다른 생령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동안 천우주에서 돌아온 도마종 수련자들이 하나둘 발을 들였으나, 그들은 폐허가 된 종파의 모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태연하게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제를 보자마자 정체를 간파했으나, 그를 에워싼 보호막 안으로 한 걸음도 발을 들이지 못했다. 개중 일부는 두려움에 결국 얼른 그곳을 벗어났고 더러는 한제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머무는 이들도 있었다.
한제가 자리를 잡고 앉은 지도 어느덧 1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에게는 그 1년이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 주먹에 저항해낼 온갖 방법과 수단을 떠올려 백만 번 이상 예측해봤지만 마땅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고작 한 줄기 신식에 불과한데도⋯⋯.”
한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준이 높아졌다는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천존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도마종 천존 선조는 도를 체내에 녹여내 한 번의 주먹질로 스물일곱 가지의 신통술을 발휘했다. 그리고 난 그것을 모방해냈지.”
한제는 그 전투를 통해 실로 많은 수확을 얻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깨달음을 얻어야겠군.”
지금 한제의 수준이라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을 터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한제는 천우주에서 돌아온 도마종 수련자들이 주위에 포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됐어. 내 복수는 이미 끝났다.”
한제는 그들을 내버려둔 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삽시간에 3년이 흘렀다.
황성으로 오라는 선황 칙령에 기한은 적혀 있지 않았기에 한제로서는 당장 갈 필요는 없었다.
한제는 지난 3년 동안 맹토주의 어느 끝없는 사막 지하 동굴에서 폐관수련을 하며 도마종 천존 선조와의 전투에서 얻은 것들을 깨닫는 데 집중했다.
“아직은 수준이 부족해 혼개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는 아홉 개의 신통술을 품은 주먹밖에 깨달을 수가 없군.”
그가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자 먹먹한 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이 주먹은 3년 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당장 도마종 천존 선조와 맞붙는다면 혼개를 입지 않은 상태로도 첫 번째 주먹은 밀리지 않을 수 있어!”
당시 한제는 상대의 첫 번째 주먹에 세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허나 지금은 당시와 같은 수준임에도 전력은 적지 않게 높아진 상태였다.
“흠, 아쉽게도 금존 수련자로 생성할 수 있는 속신결의 신맥은 최대 여섯 개뿐인 듯하군. 게다가 지금 난 아홉 명의 금존이 필요하다.”
그는 도마종 천존 선조와의 전투를 통해 속신결의 강력함을 똑똑히 실감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제가 응집한 신맥의 질이 매우 높다는 것도 작용했다. 다만 그럴수록 새로운 신맥을 뚫기란 점점 어려워졌다. 도마종 종주의 원신으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신맥을 뚫었지만 여섯 번째 신맥을 뚫으려면 무려 아홉 개의 금존 수련자 원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속신결의 신맥을 뚫기는 너무도 어렵군. 여섯 번째 신맥을 뚫기 위해서는 아홉 개의 금존 원신이, 일곱 번째 신맥을 뚫기 위해서는 아홉 개의 천존 원신이 필요하지. 설마 여덟 번째 신맥을 뚫으려면 아홉 개의 약천존 원신이 필요한 걸까? 정말 그렇다면 아홉 번째 신맥을 위해서는 아홉 개의 대천존 원신이⋯⋯. 아니야, 한 명의 대천존만으로 충분할지도⋯⋯.”
한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속신결은 반드시 수련해야만 한다. 내 실제 수준은 공겁기 초기에 불과하기에 주먹에 녹여 넣을 수 있는 신통술의 수는 아홉 개뿐이지. 그러니 최대한 빨리 금속과 나무의 본원을 얻어 공겁기 중기에 이르러야 해. 그리 된다면 더 많은 신통술을 녹여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공겁기 중기에 이르면 몇 개의 신통술을 더 녹여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더 많은 천존과 싸워서 다른 대천존들의 시선도 끌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천존열에 진입하는 방법을 파악해야 하지. 도마종 천존 선조가 알려준 방법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한제는 3년 만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천존열 시험장에는 반드시 들어가 봐야지. 나의 수준으로 몇 층까지 이를 수 있을까?”
이어서 한제는 사막 지하 동굴에서 나와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저 아래에서 거대한 해룡이 한 마리 나타나더니 한제를 향해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해룡은 한제가 머리를 밟고 서자 빠르게 나아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맹토주에는 두 개의 종파가 있다. 하나는 지문(地門), 다른 하나는 맹토종(孟土宗). 모두 동주 9종 13문에 속해 있지만 두 종파에는 금존만 있을 뿐 천존은 없어!”
해룡의 머리 위에 가부좌를 튼 한제는 해룡이 나아가는 동안 머릿속으로 거북이 등껍질에 새겨져 있던 맹토주에 대한 설명을 떠올렸다.
“비록 지금 내게는 금존 수련자의 원신이 필요하지만 맹토주에 있는 두 종파는 나와 원수를 진 적이 없으니 지나치도록 하지.”
한제가 신식을 전달하자 해룡은 곧장 방향을 틀어 맹토주와 천주(天洲)의 경계로 향했다.
거북이 등껍질에는 천주의 천문(天門)에 천존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흐릿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이 지도는 매우 방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 불과해. 맹토종과 지문에 가서 그들의 지도를 받아야겠어.”
예전에는 지문과 맹토종 모두 강력한 상대였기 때문에 감히 건드릴 엄두를 낼 수가 없었으나 충분히 강력해진 지금,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가까운 지문부터 가자!”
그러자 해룡은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