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65
황급히 한제를 쫓아온 정천림과 종주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종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제가 갑자기 지문으로 들이닥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 표정만 보아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선배님, 이곳은 저희 지문의 5등 제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얼른 설명에 나서려던 정천림은 돌연 생각이 바뀌었다.
“5등 제자들은 들어라. 모두 밖으로 나와 선배님을 맞이하라!”
그가 생각을 바꾼 것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천존 수련자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5등 제자 중 저 천존 선배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그의 원한을 산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등 제자라 다행이야. 이들을 전부 죽여 버린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정천림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 무렵, 5등 제자 구역에서는 수천 명의 수련자가 하나둘 밖으로 나오더니 창백한 얼굴로 재빨리 무릎을 꿇고 막 절을 올리려 했다.
그중에는 청과 그 곁을 지키던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막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한제가 몸을 훌쩍 날리며 빠르게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부드러운 힘 한 줄기가 날아가 그 두 사람이 무릎을 꿇지 못하도록 막았다.
청을 향한 한제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했다.
“주 형⋯⋯.”
한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청 사이에 있던 지문의 제자들은 어떤 힘에 조종당하듯 양쪽으로 밀려났다.
한제는 청이라는 사내의 곁에 섰다.
“선배님⋯⋯.”
사내는 흠칫 놀란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곁에 선 여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 입장에서 한제는 금존 선조와 종주조차 떨게 만든, 예측 불가의 강력한 존재였다.
한편, 이 모습을 본 정천림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의혹이 피어올랐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기에 자중해야 했다.
그때, 지문 종주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한제의 기세에 억눌려 여태 한 마디도 하지 못한 데다가 상대의 뒷모습만 보느라 표정도 살피지 못한 그는 곧장 청이라는 사내를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겁도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선배님께서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먼저 너희 둘을 벌하여 종파에서 쫓아낼 것이다!”
동시에 그가 막 몸을 훌쩍 날리려 한 그때였다.
“멍청한 놈!”
정천림은 표정이 급변해 재빨리 종주의 행동을 막으려 했다.
허나 이미 한제가 홱 돌아선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러웠던 그의 눈빛은 더없이 싸늘했다.
“꺼져라!”
그 한마디는 마치 천둥처럼 지문 전역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수많은 메아리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곧장 지문 종주의 몸을 때렸고 이에 종주는 바르르 경련하며 피를 왈칵 토해내고는 저 멀리로 튕겨나갔다.
가을바람을 기다리며⋯⋯
한 마디 외침으로 공겁기 후기 수련자에게 중상을 입히고 튕겨낸 한제의 위력에 정천림은 경악해 재빨리 포권을 했다.
“선배님, 진정하십시오. 저 녀석은 수련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천부적인 자질은 뛰어나나 행실이 아둔하지요. 다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입니다. 저 녀석을 종주 자리에서 폐하고 선배님께 넘길 테니 원하시는 대로 처리하십시오. 종주에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 앉히겠습니다!”
이 충격적인 광경에 수천 명의 5등 제자들은 경악했다. 한제를 향한 이들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두려움이 어린 상태였다.
청은 심지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곁에 있는 여인 또한 덜덜 떨며 청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한제는 청이라는 사내에게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여인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불타버린 사내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문정 결정을 자신에게 넘겨주고 타오르는 영혼으로 적과 맞섰던 사내가 떠올랐다.
또한 검령이 된 후로도 기억을 잃어 더없이 냉랭한 청상을 바라보던, 고통 속에서도 그런 청상의 곁을 묵묵히 지키던, 끝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의 사랑은 하늘을 놀라게 했고 땅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환생조차도 그 천년의 사랑을 덮어 없애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저는 청이라 합니다.”
사내는 한제를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이 순간에도 그의 몸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청⋯⋯ 외자인가.”
한제는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파왔다. 눈앞의 이 사내의 파란만장한 전생을 알고 있었기에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그렇습니다. 고아인 제가 스스로 지은 이름입니다.”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선 여인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환생했다고 해서 감정까지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전생에서 1천 년간 사랑하는 여인의 시신을 지켰던 그는 그 여인이 깨어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에도 묵묵히 기다려왔어. 그리고 다시 태어난 지금, 자신의 이름을 청이라고 지었다. 아마도 평생을 사랑했던 여인 청상으로부터 따온 이름이겠지.’
한제는 서늘한 기운이 흐르는 사내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청수와는 다른 그 서늘함은 검령으로 살았던 전생에서 기인했으리라. 감정과는 무관한 검령으로서의 서늘함은 환생 후에도 이어져 온 것이다.
‘난 당시 주 형과 청상의 환생에 약간 손을 댔지. 특히 청상에 대해서는 청림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많은 변화를 주었어!’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이내 곁에 선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긴장한 듯한 여인의 두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그녀는 혹여나 그를 잃을까 걱정스러운 듯, 이 손을 놓는 순간 모든 희망도 사라진다는 듯 사랑하는 사내의 손을 꼭 쥐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한제가 묻자 여인은 몸을 바르르 떨며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사내의 뒤에 숨었다. 사내의 손을 꼭 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해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여정이라 합니다.”
대답을 한 것은 청이라는 사내였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주여정이라⋯⋯.”
한제는 그 이름을 되뇌며 여인을 한참 바라보았다.
‘당시 주 선배는 청상을 정아라고 불렀지. 아마도 이 여인은 이번 생에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할 터.’
한제는 두 눈을 감은 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기억을 가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한제는 당시 청상이 환생하려 할 때 그녀의 기억을 몰래 지워버렸다.
이는 봉인이 아니라 삭제였다. 청상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지만 환생한 지금도 그 흔적은 여전히 영혼에 남아 있었다. 주여정이 한제를 보자마자 저토록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청상은 주일에 대한 기억을 되찾지 못한 것이 아니야. 기억하지 못하는 척했을 뿐이지! 그 모든 것을 목격한 나는 모든 기억을 잊고 환생하겠다는 청상의 의도적인 선택에 이를 도운 것뿐이다. 그러니 청상은 전생을 떠올리지 못할 터. 그녀의 모든 기억은 현생에서의 기억뿐이지.’
다른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누군가가 이러한 한제의 의도를 알아차린 적도 없었다. 주일을 돕고자 한제 혼자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선배님, 제게 풀지 못한 의혹이 하나 있습니다. 선배님이라면 풀어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머뭇거리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여인은 잡고 있던 손을 힘껏 당겼다. 한제에 대한 두려움마저 잊은 듯 그녀의 얼굴에는 온통 슬픔뿐이었다.
“청, 그건 꿈이야! 그저 꿈일 뿐이라고!”
두 눈을 번쩍 뜬 한제는 망설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여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난 답을 알고 싶을 뿐이야. 여태까지 수련을 해오면서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해봤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지금의 수준에 이르렀지. 그러는 동안 수백 년간 똑같은 꿈을 꿨어. 항상 같은 꿈을 말이야.”
그는 이어서 한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꿈속에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저는 그녀의 뒷모습만 볼 수 있지요. 하얀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매우 낯이 익습니다. 허나 그녀를 볼 때면… 저는 마음이 너무도 아파옵니다. 저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보려 하지요. 동시에 그녀가 내 전생의 아내일 거라는 직감도 듭니다. 마치 그녀가 제 존재의 이유인 것만 같지요.”
말을 잇던 사내의 얼굴에 깊은 혼란이 어려 있었다. 동부계 안에서 수천 년간 시신을 지키며 그 시신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바라던 당시의 모습과 같았다.
고요한 가운데 사내의 목소리만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정천림은 이 광경과 한제의 표정을 보고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한제는 청상의 기억을 지웠지만 주일의 기억까지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주일은 그에게 벗이자 그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주일이 스스로 삶을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어느 봄날, 나무 밑을 지나다가 이파리 하나를 본 적이 있다. 아주 마음에 들었지. 그래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쯤 다시 그 나무 밑으로 가봤어. 허나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그 녹색 이파리는 찾을 수 없더군. 난 다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
한제의 목소리가 쓸쓸한 가을바람처럼 울려 퍼졌다.
“난 그 이파리가 색만 붉게 변했을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던 거야. 슬픔에 빠져 그곳을 떠나려던 그때, 가을바람이 불어와 이파리 하나를 내게 날려 보냈지. 그 이파리는 떠나는 내 곁을 계속해서 맴돌았지만 난 슬픔에 빠진 채 녹색 이파리만 생각하느라 그것을 보지도 못했어. 내가 그토록 찾던 것이 바로 내 곁에 있음을 몰라본 거지. 이게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답이다.”
한제는 몽롱한 눈빛으로 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언젠가 정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단약을 먹어라. 그 후로는 그 꿈을 다시 꾸지 않게 될 것이다.”
노란색 단약 한 알을 남긴 한제는 돌아 서서 허공에 떠 있는 해룡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단약은 마치 낙엽처럼 청의 앞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정천림, 저 부부는 전생에 나와 친하게 지냈던 벗들이다. 저들이 이곳에 속해 있는 한,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내 너희들을 세 번은 도와줄 것이다. 대신 저 둘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그 죄는 오직 너에게 물을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정천림의 심신에 한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한제의 낙인이 새겨진 옥패 하나가 그 노인 앞에 툭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정천림은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즉각 한제에게 절을 올렸다. 그와 지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사내와 여인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 사이 빠져나온 두 올의 서로 다른 머리카락은 바람 속에서 한데 뒤얽혀 춤추듯 날아갔다.
봉인된 기억을 풀어주는 대신 직접 선택하게 한 한제는 고개를 돌려 청, 그러니까 주일을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거둔 그는 해룡의 등에 올라탄 채 날아갔다.
‘주일, 주 형… 나를 잊고 동부계를 잊고 전생의 모든 것을 잊으십시오. 그리고 이생에서는 곁에 있는 귀한 사람과 함께하십시오. 지금 주 형의 곁에 있는 그 여인이 바로 주 형이 평생을 기다렸던, 꿈속의 그 여인이니…’
“청상한테는 불공평한 일일지도 몰라. 그녀에게는 몹쓸 짓이었지. 허나 수천 년 동안 사랑에 목맸던 주 형은⋯⋯. 됐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지.”
한제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해룡은 포효하며 모래폭풍으로 뒤덮인 지문을 빠져나왔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주일과 청상을 만나게 될 줄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사도환, 청수, 허이국, 유금표⋯⋯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벗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한제는 해룡의 머리 위에 가부좌를 튼 채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사도환은 그가 말했던 것처럼 왕의 삶을 살고 있을까? 청수 사형은 어디에 계실까? 교활한 허이국은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사기에 능했던 유금표는 지금도 그런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