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71
허나 지금 그녀의 마음에 그런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3년 만에 다시 나타난 한제가 손짓 한 번으로 자신을 한참이나 멈춰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다. 천존일뿐만 아니라 여자이기도 한 그녀로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꽁꽁 옭아 매인 듯했던 그 느낌이 비할 데 없는 수치였다.
나무의 본원을 응집할 수 있는 재료인 산해수의 영혼은 사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그녀의 원래 계획은 한제가 자신의 앞에 엎드려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저자세로 나온다면 같은 천존인 상대에게 어느 정도 내어줄 생각이었다.
허나 눈앞의 한제는 3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냉정하고 도도했다. 그녀의 아름다움 덕에 누구에게나 칭송받아온 해자 천존으로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태도였다.
수준도 신분도 높은 그녀에게 몇몇의 약천존을 제외한 수련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산해 전역을 점유한 그녀가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신분 덕이었다.
해자 천존이 다가오는 모습에 한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혼개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더는 해자 천존과 뒤얽히기 싫었지만 상대가 저렇게 나온다면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더 큰 치욕을 사려는 건가?”
한제는 차게 코웃음 치며 한 발 성큼 나섰다. 동시에 아흔일곱 개의 잔상을 소환하며 해자 천존을 향해 달려들어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순간 사방에서 아흔일곱 개의 잔상 역시 동시에 오른손을 든 채 융합되며 아흔여덟 개의 역령인을 소환했다. 그러자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 곧장 해자 천존을 향해 돌진했다.
해자 천존은 이를 악문 채 고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남색 빛이 그 손을 뒤덮으며 나타나 거대한 방울로 변했다. 빠른 속도로 팽창한 방울 안에서는 날카로운 쉭 소리와 함께 남색 새가 한 마리 나타났다.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70번의 날갯짓으로 일흔 개의 신통술을 발휘해 역령인으로 쏘아 보냈다.
해자 천존은 남색 새를 소환하자마자 다시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오명유신(吾命由身), 첫 번째 도!”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타원형 문양이 하나 나타났다. 일흔 개의 신통술을 품은 이 문양은 일흔 개의 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천불역(蒼天不逆), 두 번째 도!”
이를 악문 해자 천존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 사이로는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에게도 버거운 신통술인 모양이었다.
순간 타원형의 문양이 곧장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그 문양을 이루고 있던 일흔 개의 획 중 스물여섯 개가 분열해 두 배로 늘어났다. 원래 있던 일흔 개까지 더하면 총 아흔여섯 개가 된 것이다.
융합된 아흔여섯 개의 신통술과 마찬가지인 이 타원형 문양은 어마어마한 기운을 품은 채 돌진했다.
콰쾅!
역령인과 남색 새가 충돌했다. 그러자 남색 새는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방울로 돌아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때, 곧바로 타원형 문양이 역령인에 달려들었다.
콰르릉!
역령인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신통술이지?’
한제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타원형 문양을 바라보았다. 허나 짙은 위기감을 풍기고 있는 문양이 곧장 다가오는 통에 재빨리 두 손을 들면서 몸을 뒤로 마치 활처럼 굽혔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아흔일곱 개의 잔상이 나타나 마치 박치기를 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천우당!”
순간 도마종 천존 선조를 놀라게 한 천우의 신통술이 다시 발휘됐다. 아흔일곱 개의 잔상과 한제의 본체는 이때 한 마리의 거대한 천우가 되어 있었다. 아흔여덟 개의 신통술이 깃든 두 개의 큼직한 뿔이 타원형의 문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한편, 해저 깊은 곳, 한제가 뚫어놓은 구멍 안 산해수에서는 이때 기이한 변화가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산해수 옆, 즉 겹겹의 봉인 밖.
한제의 공격으로 거대한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 점점이 어스름한 빛이 나타나는 중이었다. 그 빛에서는 광기 어린 잔인함과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만 그 기운은 기이하게도 흩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한제와 해자 천존에게 감지되지도 않았다.
이 어스름한 빛은 점점 많아지다가 곧 빽빽해져 이내 10만 개가 넘어갔다. 이 빛들은 이내 하나하나 융합되다가 곧 완전한 하나로 응집됐다.
그렇게 응집된 빛으로 형성된 것은 이전의 그 얼굴이 아니라 잘린 손바닥이었다. 어떤 거대한 존재의 왼손인 듯했으나 손목 윗부분은 없었다.
원래 이 잘린 손바닥은 원래 그 폭이 1천 척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으나 형성되자마자 급속히 축소돼 일반인의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었다. 반투명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발견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 손바닥 안에 어떤 문양이 있었으나, 이 또한 어렴풋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찾았다, 선강 대륙에 속하지 않은 영혼! 봉인!”
이내 흐릿한 목소리를 울리던 잘린 손바닥은 위로 돌진했다.
허나 한제와 해자 천존은 이 잘린 손바닥이 해저 밑바닥으로부터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산해의 절반 정도는 굳어버린 먹물 같은 해수면에 봉쇄되어 있었다. 해자 천존이 배치한 이 진은 쉽게 파괴할 수 없을 터였다.
그 봉인과 해저 사이의 바닷속에서 한제와 해자 천존은 격렬히 맞서는 중이었다.
해자 천존이 쏘아 보낸 아흔여섯 개의 신통술이 담긴 타원형 문양에 한제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천우당으로 맞섰다. 거대한 천우의 허상이 순식간에 타원형 문양과 충돌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퍼져 나가며 바닷물마저 갈라지려 했다.
창백한 얼굴의 해자 천존이 뒤로 밀려났다. 방금 그녀가 시도한 공격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그 위력이 강맹했다. 아직 두 번째 도까지 완벽하게 발휘하지는 못함에도 불구하고 약천존 아래 누구도 감히 그녀와 맞서려 하지 못했다.
한데 지금 한제는 그녀와 맞붙고 있었다.
한제 역시 뒤로 밀려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천우의 허상이 와해되면서 혼개 역시 흩어져 사라질 조짐을 보였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 아흔일곱 개의 잔상을 소환해 해자 천존을 가리켰다.
“정! 정! 정!”
해자 천존에게만 두 번째로 발휘하는 정신술이었다.
사방에서 나타난 아흔일곱 개의 잔상은 한제의 본체와 융합했다.
“이한제, 네놈이⋯⋯.”
해자 천존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뒤로 밀려난 자세 그대로 멎어버렸다. 원신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문어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 그녀의 몸은 마치 시체처럼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나 이번만큼은 그녀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완벽하지도 않았고 이미 정신술에 당한 상태였으나, 정신술에 얽매인 것은 그녀의 원신일 뿐 두 눈에 담긴 빛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점점 멀어져 가는 한제를 응시하는 그녀의 두 눈에는 치욕으로 인한 분노가 차올랐다.
한편, 한제가 해자 천존과의 결투에서 곧장 정신술을 발휘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미 정신술에 당한 적이 있는 그녀가 아무런 대비 없이 달려들 리는 없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적절한 시기를 노려야만 했다.
또한, 해자 천존을 정신술로 옭아매더라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지 않는 이상 머지않아 움직임을 회복한 해자 천존이 추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정신술로 상대를 묶어두고 공격하기보다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서 중상을 입히는 편이 나을 터였다.
한제는 곧장 문어를 뒤로 물러나게 한 후, 해룡에 올라타 위로 솟아올랐다. 한데 무의식적으로 신식을 통해 해자 천존이 있던 쪽을 힐끗 살핀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와 해자 천존이 싸우고 있던 곳은 해저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지금 해자 천존은 해저 밑바닥의 구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데 흐릿한 파문이 구멍 안에서 빠른 속도로 흘러나와 모든 저항력을 잃은 해자 천존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파문에는 무언가 깃들어 있는 듯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찾았다, 선강 대륙에 속하지 않은 영혼! 봉인!”
그 순간 흐릿한 신식 한 줄기가 그 파문에서 확산되어 한제의 심신으로 파고들었다.
“살아 있었단 말인가!”
한제는 머리가 저릿해졌다. 산해수의 봉인에서 나타났던 거대한 얼굴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떠나가려다가 다시 우뚝 멈춰 섰다.
변화
한편, 저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해자 천존은 비록 원신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두 눈에는 의식이 맴돌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바닷속의 파문과 그 안에 들어 있는 흐릿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위기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쳤다. 한제와 맞섰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심지어 평생 느껴본 적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나 그녀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기에 그저 파문에 휩싸인 허상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하며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강인하고 도도한 모습만을 보여왔던 해자 천존의 두 눈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꽁꽁 옭아매고 있는 정신술에서 벗어나려는 듯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일렁이는 파문 안에는 산해수에서 나타난 잘린 손바닥이 들어 있었는데 계속해서 신식을 통해 외쳐대고 있었다.
“찾았다, 선강 대륙에 속하지 않은 영혼! 봉인!”
한제는 마음만 먹는다면 해자 천존을 미끼로 삼아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허나 그는 잠시 갈등하는 듯하더니 이내 몸을 홱 돌려 엄청난 속도로 해자 천존을 향해 질주했다.
‘나 이한제는 소인도 군자도 아니다. 평생 부끄러움 없이 하늘을 우러를 수 있기만을 바라왔을 뿐. 해자 천존은 나의 원수도 아니고 이곳은 그녀의 영역이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나선 것도 당연한 일이지.’
엄청난 속도로 몸을 날린 한제는 순식간에 1만 척을 뛰어넘었다.
‘산해수 봉인은 내가 자극한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난 존재가 그녀를 해하려 하는 지금, 그녀는 나 때문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그녀를 희생시켜 혼자 살아남는다면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부끄러움 없는 삶을 스스로 거부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하늘을 거역하고 무엇을 근거로 모완의 부활을 고집하며 무엇을 근거로 세상 꼭대기에 서겠다는 신념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해자 천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절망에 빠져 있던 해자 천존은 그런 한제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한제는 눈 깜짝할 사이 4백 척 거리에 이르렀다. 허나 그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파문 속의 투명한 손바닥보다 빠르지는 못해, 이 손바닥은 해자 천존의 3백 척 거리에 이르러 있었다.
피에 굶주린 잔인한 느낌과 형용할 수 없는 광기를 품은 손바닥은 해자 천존을 움켜쥐려는 듯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쳤다.
정신술은 일단 발휘한 이상 자신보다 수준이 한참 낮은 자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닌 바에야 다시 거둘 수는 없었다. 천존에 이른 해자 천존은 엄밀히 말해 한제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기에 지금 정신술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해자 천존의 봉인으로 인해 해저에서는 순간이동도 할 수 없었다.
기이한 손바닥에 붙잡히기 직전, 해자 천존이 두 눈이 절망감으로 물든 순간, 한제가 낮게 기합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는 체내의 다섯 갈래 신맥을 최대의 속도로 가동했다. 덕분에 한제는 전에 없이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속신결의 위력을 전력으로 가동한 덕분이었다.
한제는 돌진하며 아흔일곱 개의 잔상을 그려냈고 아흔여덟 번째 잔상까지 소환해냈다. 본체까지 총 아흔아홉 명의 한제가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