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75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미 빛의 장막에 퍼져 있던 수많은 균열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면서 파편이 널리 퍼져 나갔고 동시에 붕괴의 여파는 한제와 해자 천존을 강하게 밀어냈다.
이 힘을 이용해 두 사람은 밖으로 튀어나가며, 동시에 해자 천존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타원형의 문양을 소환했다. 그 안에 담긴 아흔 개가 넘는 신통술 덕분에 문양은 극도로 밝게 빛났다.
콰르릉!
잘린 손바닥에서 나타난 인영과 문양이 충돌하면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이 허무의 공간을 무너뜨릴 법한 굉음에 인영은 뒤로 나가떨어지며 어스름한 빛으로 와해됐지만 눈 깜짝할 사이 다시 응집했다.
대천존에게 보이다
남주의 산해주, 산해의 상공. 세 인영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수련자들은 이들의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세 인영 중 검은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린 도포 차림의 청년은 눈썹이 날렵했고 두 눈은 별처럼 강렬하게 반짝여 누구든 푹 빠지게 될 것만 같았다. 고작 20대로 보였으나 그에게서는 오랜 세월의 기운이 느껴졌다. 덤덤한 표정의 그를 중심으로 주위의 모든 것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청년은 도일 대천존이었다.
수십 척 떨어진 곳에는 기골이 장대한 중년 사내가 있었다. 도일 대천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는 간소한 삼베 두루마기를 입은 채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한 올도 없었으나 기이하게도 그게 잘 어울렸고 약간 거친 외모에 폭풍 같은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수시로 번득이는 두 눈에서는 온 세상을 발아래 덜덜 떨게 할 무시무시한 기운이 풍겼다. 덤덤한 표정임에도 그 눈빛에서는 위엄이 절로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세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선도(仙道)와 무도(武道)의 극에 달한 듯한 기세였다. 무(武)로 도를 달성하고 도로 세상을 파괴해 대천존의 반열에 이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대천존이 된 순간, 자신의 무도를 봉인하고 애초의 순수함과 순박함으로 돌아가 이 세상과 하나가 된 그는 무봉 대천존이었다.
도일 대천존 주위의 만물이 꼼짝 못하고 멎은 것과 달리 이 사내의 옷자락은 바람에 살랑거렸다. 도일 대천존의 기운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두 사람의 옆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푸른 도포를 입은 채 조용히 서 있는 그에게서 비범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수련자처럼 보일 뿐이었고 심지어는 등이 약간 굽기까지 한 상태였다.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고 두 눈은 흐릿해 허약하고도 우울해 보였다.
허나 노인 또한 도일의 기운은 물론 무봉의 무시무시한 기운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구제, 자네의 제자가 빠져나왔군.”
도일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푸른 도포의 곱사등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보잘것없는 외모와 달리 구제 대천존이 선족의 다섯 대천존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자임을 도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저 노인은 선조가 존재했을 당시에도 살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본래 이름이 구제(九帝)였던 그는 얼굴 또한 무척 준수했는데 아홉 번째 환생에 성공한 후로는 구제(久帝)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네 둘이 아니었더라면 내 제자 녀석은 진즉 탈출했을 게야.”
푸른 도포의 곱추 노인이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난 이한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도일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자는 눈여겨보고 있어. 허나 뭔가 다른 내력이 있는 만큼 시험해볼 수밖에 없었지.”
무봉 대천존도 끼어들었다.
“현라가 우리 선족 구역에 왔었지. 저자가 현라와 관련이 있는 것만 아니라면 좋겠는데…”
도일 대천존이 산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도일이 돌연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무봉 또한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쪽을 응시했고 구제의 표정도 기이하게 변했다.
★ ★ ★
검고 단단한 막으로 뒤덮인 산해 깊은 곳의 구멍 안. 산해수의 줄기를 겹겹이 감싼 봉인에서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자 천존의 타원형 문양과 충돌하면서 인영이 무너져 내렸다가 다시 응집된 순간, 한제가 두 손을 들어 올리자 혼개가 형성됐다. 한제는 그 상태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신통술을 발휘했다.
‘밖에는 분명 대천존이 있을 거야. 무봉이나, 도일, 구제가 있을지도 모르지. 이 이한제의 내력과 실력이 궁금하다면 내 똑똑히 보여주지!’
한제는 몸을 날리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 순간, 빛의 장막 외부를 감싸고 있던 허무의 세상이 급변했다. 새카만 어둠으로 차 있던 하늘과 땅이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밤하늘 아래의 바다로 변했다. 동시에 이 바다의 가장자리에서는 부드러운 금빛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하늘을 뒤덮은 어둠이 순식간에 밀려나 사라졌다.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 태양 안에는 한제의 인영이 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태양과 함께 금빛에 휩싸여 있던 그는 밤을 찢어내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이 뜨인 순간, 태양에서 발산되던 무궁무진한 금빛에 한 줄기 신념이 담겼다. 한제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 덕분에 잔야는 신술로 거듭났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보여주지!”
한제의 눈에서도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난 모든 어둠이 물러날 것을 믿는다!”
“난 이 빛이 어두운 밤하늘을 관통해 대지를 비출 것을 믿는다!”
“난 나의 모든 적이 전부 다 흩어져 사라질 것을 믿는다!”
한제의 중얼거림에 햇빛은 더욱 멀리 퍼져 나가며 어둠을 파괴했고 그 너머 잘린 손바닥의 인영을 관통했다.
그러자 막 응집되던 인영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어스름한 빛들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저 멀리 떨어져 나가 다시 응집하려 들었으나, 색이 잔뜩 어두워진 것으로 미루어 이미 부상을 입은 듯했다.
강력한 햇빛은 계속해서 뻗어 나가 어두운 밤을 찢어내며 산해수의 어두운 허무를 파괴했다. 산해수 안에서는 마치 그 안에 태양이라도 있는 것처럼 줄기줄기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햇빛은 겹겹의 봉인을 뚫고 위로 돌진하더니 산해 해저 밑바닥에서 마구 솟구쳐 올랐다. 뒤이어 해수면을 뒤덮은 단단한 막까지 관통한 금빛은 그대로 튀어 올라 하늘로 향했다.
“신술!”
하늘까지 솟은 햇빛을 본 순간, 도일 대천존의 눈이 반짝였다.
“신술까지 깨우쳤단 말인가!”
무봉 대천존 역시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오직 구제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오른손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마치 파리를 쫓는 듯한, 지극히 평범한 손짓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햇빛에 관통당한 해수면에서 바닷물이 마치 끓어오르듯 요동쳤다. 그리고 거대한 손가락 하나가 형성돼 해저를 향해 돌진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한제는 바다에서 튀어나와 상공의 세 대천존을 무시한 채 한 줄기 빛을 그리며 질주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해자 천존을 바닷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소용돌이가 뒤쫓았고 그 안에는 잘린 손바닥이 있었다.
그 손바닥이 해자 천존을 붙잡으려던 순간, 바닷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가락이 날아들었다.
콰르릉!
굉음과 함께 잘린 손바닥은 주춤했고 그 틈에 해자 천존은 무사히 해수면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대한 손가락에 부딪혀 해저로 처박힌 잘린 손바닥은 하늘을 뒤덮을 듯 잔인한 기운을 발산했다.
“크아아아!”
잘린 손바닥의 인영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세 대천존을 노려보며 마구 포효하면서 달려들었다. 겨우 손가락 하나로는 꺾이지 않을 기세였다.
구제 대천존은 가볍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해자 천존과 잘린 손바닥 사이에 서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스승님!”
해자 천존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스승의 모습에 기뻐하다가 이미 멀어진 한제가 떠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산해 가장자리에서 세상에 녹아들며 자취를 감춘 한제는 산해주 내의 푸른 소나무로 가득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해수면 밖으로 튀어나오자마자 세 개의 묵직하고 강력한 기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전의 추측을 통해 그 기운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제는 소나무 위에 가부좌를 튼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랜 시간 비좁은 방어막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곳으로 나오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번에 산해에서 얻은 수확은 적지 않군. 산해수의 영혼뿐만 아니라 선극검의 조각까지 하나 더 얻었으니.’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바닥 안에서는 금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 빛의 장막 안에서는 흡수할 수 없었지. 이제 그곳을 벗어났으니 최대한 빨리 흡수해야겠어!’
한제는 대천존들의 존재에 대해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을 막지 않은 것을 보면 그들의 시험을 통과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제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지면서 소나무와 융합됐고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오래된 나무 안에 가부좌를 튼 그는 마지막 산해수의 영혼 두 개를 꺼냈다.
‘지난 몇 년간 산해수의 영혼을 흡수하면서 이미 나무의 본원을 어느 정도 완성한 덕에 세상 모든 나무 본원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 두 개의 영혼을 마저 흡수하면 본원 진신을 응집할 수 있을까? 한데 나무 본원은 조금 기이하다. 체내로 흡수하는 게 점점 느려지는 느낌이다. 이게 언제쯤 내 본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한제는 두 개의 영혼을 체내에 녹여 넣은 뒤 천천히 흡수해 제련에 들어갔다.
‘급할 것 없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일단 선극검 조각을 흡수하는 데 집중하자. 그 뒤에 앞으로 할 일을 정하는 거야.’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산해수 봉인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빼낸 선극검 조각이 짙은 금빛을 발산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손바닥만 한 조각의 테두리는 불규칙적이었지만 세상 만물을 갈라버릴 듯 강력한 기운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한제의 두 눈에서도 곧 같은 금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두 눈동자에서는 선극검 조각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있었다.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과 손에 들린 선극검 조각의 금빛이 뒤얽힌 순간, 한제의 심신에서는 기이한 흡입력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흡입력이 강해짐에 따라 손에 들린 선극검 조각은 금빛에 녹아든 채로 수많은 금색 선이 되어 한제의 두 눈으로 향했다.
마지막 한 줄기의 금색 선까지 두 눈에 완전히 스며든 순간, 소나무에서 발산되던 금빛은 흩어져 사라졌다. 어둠 속에 잠긴 한제는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숨을 골랐다.
낮과 밤이 뒤바뀌기를 몇 차례. 어느덧 7일이 지났다.
가을바람이 솔잎을 휩쓸었고 떨어져 내린 잎들은 집 떠난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한제는 그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눈꺼풀에 가려진 두 눈에서는 놀랄 만큼 짙고 강한 금빛이 번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