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81
청년의 목소리와 표정은 매우 공손했다.
동림종의 두 제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한제는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제자의 안내에 따라 중앙의 동림전으로 향하는 동안 한제는 사방에서 짙은 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두루미가 춤을 추듯 날아다녔고 약초밭과 처소의 제자들은 홀로 좌선을 하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선기가 짙게 배어 있어 이곳은 마치 도원경 같았다.
한제는 한 무리의 동림종 제자가 질주하듯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얼른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기도 했다.
동림종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고 한제에게 예의 바르게 굴었다. 마치 그가 귀한 손님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한데 중앙 동림전에 이르기 얼마 전, 강력한 기세가 담긴 두 갈래 빛이 휙 날아들어 순식간에 한제 앞에 이르렀다. 동시에 그 안에서는 호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동준, 소연, 너희는 이만 물러가라.”
웃음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두 수련자는 노인과 중년 사내였다. 두 사람은 웃음을 머금은 채 한제에게 포권을 해보였다. 두 사람 모두 금존으로 범상치 않아 보였다.
호쾌하게 웃던 노인이 인사를 건넸다.
“허천연이라 합니다. 동림종 대장로로서 선조의 명으로 선배님을 동림전까지 모시러 왔습니다.”
“동림종 종주 하도입니다.”
중년 사내도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한제의 눈에 얼핏 슬픔이 묻어났다.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으면 함께할 꿈을 만들어냈을까 싶었다.
“가지.”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금존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그를 동림전으로 안내했다.
“선조님은 안에 계십니다. 저희는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들어갈 수 없으니 선배님 홀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노인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림전의 문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곳의 모든 것이 꿈의 장막을 통한 허상임을 눈치챈 만큼 그 안에 녹아들지 않고도 폐허가 된 대전에 들어올 수 있었다. 굳이 꿈속의 허상들과 불필요한 대화나 인사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허나 그는 슬픔과 고독함을 충분히 느끼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동림종 선조를 존중하고 자신 역시 꿈속 허상으로 마주할 상대로부터 존중받기 위해서였다.
“금표, 밖에서 기다려라.”
한제는 유금표에게 한 마디만을 남기고는 동림전으로 향했다.
혼자 남겨진 유금표는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곳에서 내내 기이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제의 오른발이 대전에 들어선 순간, 고독과 슬픔이 배인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왔구나.”
대전 안, 전방에는 세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었다. 두 사내와 한 여인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들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각상들로부터는 흘러넘칠 듯 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조각상 아래로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갈색 반점이 가득한 얼굴의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일반인 노인 같았는데 그 표정에서 한제는 고통과 깊은 슬픔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에게서는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듯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제가 지금껏 보았던 모든 천존을 훨씬 능가할 만큼 강력한 기운이었다.
“왔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노인 앞으로 다가간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는 오른손을 휘둘러 술병을 소환했다.
“한잔하겠는가?”
한제가 술병을 건네며 묻자 노인은 잠시 술병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받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네게서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곳에 온 게 처음은 아닌 모양이구나.”
뒤이어 고개를 든 노인이 한제를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왔었지.”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병을 하나 더 소환해 들이켰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오랜 세월을 앉아 있었던 것일 수도 있지. 어쩌면 자네가 정말로 꿈속에서 이곳에 왔었을 수도 있고…”
노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대전의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동림종은 지금과 같았나?”
노인이 조용히 물었다.
“같았네.”
한제가 답했다. 그는 상대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군.”
노인은 두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사실 그 정도 수준에 이른 수련자에게서 눈물을 보기란 힘들었다.
“난 이곳에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었어. 허나 이 안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내게 익숙함을 느끼게 한 것은 자네뿐일세. 이곳은 나의 집이네. 일찍이 이곳을 떠났다가 약천존이 되어 돌아왔더니 이런 꼴이 되어 있었지.”
노인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 눈에는 고통과 짙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네. 찾아내지도 못했지. 난 그저 이곳에 앉아 내 기억에 근거한 꿈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어. 내가 죽는 날까지 그 꿈과 함께 동림종을 유지해나가는 수밖에⋯⋯.”
노인의 작은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있었다.
한제는 그런 노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슬펐기에 꿈으로 스스로를 속였고 얼마나 고독했기에 허상과 기억을 벗으로 삼은 것일까.
‘만약 완이 끝내 살아나지 못한다면…, 평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다면⋯⋯, 주작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면… 어쩌면 그때는 나 역시 홀로 폐허가 된 수련성에서 묵묵히 꿈에 취해 허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그 안에는 부모님도 있고 나도 있고 모완도 있고 평이도 있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함께할 테니까.’
한데 그때,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하늘의 의지를 봉인하고 어두운 시기를 새겨라. 모든 생명이 진정한 도를 얻지 못하고 고통의 바다에 침잠되며 진정한 길을 찾지 못한다. 얌전히 수련의 길을 기다려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제의 심신이 진동했다.
“우리 동림종을 파괴한 자가 동림종 수련자들의 피로 비석에 적어두었던 구절이다.”
“난 지난 오랜 세월 이 구절을 연구해왔다. 동림종을 파괴한 자가 대체 누구인지, 어째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고 싶었지. 우리 동림종은 한 번도 세상의 분쟁에 얽힌 적 없이 종파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왔으니 누군가의 원한을 살 일도 없었으니까. 나 역시 몇몇 벗만을 둔 채 수련에만 집중해왔단 말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동림종, 나의 집을 파괴하고 소멸시켰어.”
노인의 목소리는 마치 죽은 자의 그것처럼 고저가 없었다.
“난 대천존을 찾아가 범인이 누구인지 점쳐달라고 부탁했네. 허나 대천존조차 밝혀내지 못했어. 다섯 대천존과 황성의 국사까지 찾아가 부탁했지만 달라질 게 없었지. 국사는 예측 도중에 피를 한 움큼 토하더니 두려움에 떨더군.
이어서 나타난 것은 혼란이었어. 무려 사흘이나 넋이 나가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도 내가 부탁했던 예측의 내용은 완전히 잊었더군.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며칠간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처럼 말이야.”
중얼거리는 노인의 두 눈에서는 짙은 원한과 광기가 함께 드러났다.
“난 그 글귀를 이해하거나 간파하지는 못했지만 글자체만은 영혼 깊은 곳에 새겨놓았지. 그것이 그자를 찾을 유일한 단서니까!”
노인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두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에야 떴다.
“가서 그 비석을 한번 보겠나?”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오른손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부패한 죽음의 기운이 짙게 풍겼고 대전은 단숨에 수만 년을 보낸 듯 찬란하고 반짝거리던 모습에서 썩고 낡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곳곳에 부연 먼지가 쌓이고 몇몇 기둥에는 균열이 일어났다. 심지어 노인의 뒤에 있던 세 개의 조각상 역시 변해 부서지고 문드러졌다.
바닥에도 줄기줄기 균열이 나타났고 바깥쪽도 마찬가지였다. 부패의 기운을 담은 바람이 대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 동림종 전역을 휩쓸었다.
대전 밖의 광장은 쪼개지고 궁전 누각들은 찰나의 순간 폐허가 되었다. 푸르렀던 산은 눈 깜짝할 사이 황량해졌고 맑은 물은 말라버리며 악취를 풍겼다.
두 금존 수련자를 포함한 동림종 제자들도 전부 사라졌다. 수많은 해골들만이 대지와 처소에 가득 남았다.
온 동림종이 순간 죽음의 땅으로 변한 것이다.
대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금표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바짝 졸아든 눈으로 주위 광경을 살핀 그는 그제야 자신이 왜 이곳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던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의 곁에 쓰러져 있는 해골은 텅 빈 두 눈으로 그를 또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동림전 밖 광장 위로 높이가 1천 척은 될 법한 거대한 비석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비석에 위는 몇 문장이 피로 적혀 있었다.
“하늘의 의지를 봉인하고 어두운 시기를 새겨라. 모든 생명이 진정한 도를 얻지 못하고 고통의 바다에 침잠되며 진정한 길을 찾지 못한다. 얌전히 수련의 길을 기다려라!”
말라붙어 암갈색으로 변해버린 문장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운 기운이 흘렀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동림종 전역을 뒤덮고 하늘의 색을 어스름하게 변하게 했다. 마치 강력한 힘이 순간 하늘의 눈을 멀게 한 것만 같았다.
“바로 이 비석이네.”
노인은 두 눈으로 비석을 죽일 듯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한제도 비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콰쾅 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와 비슷한 비석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부계 칠채계에서의 일이었다.
그는 그 비석을 장존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제 보니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천운자의 기운
무엇보다 한제의 심신을 뒤흔든 것은 비석 위의 서체였다.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었다. 누군가가 직접 저 글귀를 적어 내려가던 것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한제는 그 서체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풍기는 기운에서도 익숙함을 느꼈다. 그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기운은 동부계에서 언제나 그에게 두려움을 선사했던 한 사람의 것이었다.
‘⋯⋯천운자.’
천도의 일부분인 천운자는 이미 한제의 손에 소멸됐지만 한제는 당시에도 그 이후로도 천운자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석에 적힌 문장과 그것으로부터 풍기는 기운이 칠채계의 비석과 똑같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사람이 적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비석을 보자 한제는 동부계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동부계, 선강 대륙, 동림종 세 곳 모두와 연관된 사람은 칠채선존뿐. 허나 그로부터 갈라져 나온 세 개의 혼은 소멸됐지. 세 번째 혼은 소도영이었고 난 당시 환각을 통해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 한데 어째서 이곳에 저 구절이 담긴 비석이 나타난 거지? 왜 이와 비슷한 비석이 동부계에도 있었던 걸까? 이곳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한제는 멍하니 비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누가 동림종을 파괴하고 이곳에 이런 비석을 남겨놓은 걸까? 이 글에서 풍기는 기운은 천운자의 것인데 그는 왜 이곳에 나타나 동림종을 파괴한 걸까? 그리고 칠채선존은 정말로 죽은 걸까?’
생각할수록 혼란은 가중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