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93
‘선황이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성이 더럽혀진 자를 굳이 포섭할 필요는 없겠지.’
도일은 이미 한제를 포기한 것이다.
한데 그때였다. 인파 속에서 분노에 찬 여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닥쳐라! 이한제는 수십 년 전, 혼개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도 나와 싸웠다. 혼개의 위력에만 의지해 지금과 같은 성과를 보인 게 아냐! 하물며 혼개의 위력을 빌렸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이냐! 그것은 그가 천외 흉수의 영혼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자 그 역시 저자의 힘이란 말이다!”
여인의 일갈에 모든 주위는 짧은 순간이나마 고요해졌다.
“질투가 난다면 네놈들도 당장 가서 혼개를 구하면 될 일 아니더냐! 혼개를 얻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 천존열의 난관을 통과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보다 작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해자 천존이었다. 그녀는 선족 구역 전역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이는 그녀의 스승인 구제 대천존 덕분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수준 덕분이기도 했다.
이제 주위는 완전히 고요해졌다.
한데 정작 한제는 시종일관 아무 말도 없이 전송진 밖에 서 있었다. 모든 수련자의 경멸 어린 눈빛을 받아내던 그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서서 분노를 폭발시키는 해자 천존을 바라보았다.
“해자 쓸데없는 말은 마라. 언제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수준이다. 외부의 힘에 의지하다가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고 말지. 이한제 저자도 열세 번째 궁전이 한계다.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록 다음 관문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선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너희 모두 이 진리를 단단히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만약 외부의 힘에 지나치게 의지해 자신의 수행에 방해를 받는다면 저자와 같은 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외부의 힘? 그리 따진다면 대천존이라는 칭호 역시 태고 신경으로부터 전승받은 것이니 외부의 힘 아닌가? 만약 정말 자네의 말대로라면 우리 중 외부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대체 누구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무봉 대천존이 불쑥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선황이자 팔극 대천존인 자네도 예전에는 천존에 불과했지. 자네의 독특한 혈맥이 아니었다면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그 외부의 힘이 아니었다면 어찌 팔극이라는 칭호를 물려받을 수 있었겠는가? 외부의 힘 역시 힘의 일종이야. 그 힘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어떤 난관이라도 넘어설 수 있다면 누가 이를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무봉 대천존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자더러 계륵과 같은 존재라고 했는가? 선조의 눈에는 자네 같은 후손도 계륵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
무봉의 말은 갈수록 날카로워졌고 선황은 그런 상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봉, 대천존이라는 칭호를 어찌 혼개와 비교한단 말인가? 아직도 저자가 그리 귀하게 보인단 말인가? 놀랍군. 저자는 혼개를 입고도 열세 번째 궁전에서 한계에 봉착했어. 열아홉 번째까지 갈 것도 없이 저자가 오늘 열다섯 번째 궁전을 통과한다면 이 연도진은 칙령을 내려 온 세상과 모든 선족 수련자에게 선포하겠네. 저자가 선족 대천존 아래 최강자라고 말일세! 한데 과연 저자가 할 수 있을까?”
무봉은 입을 닫았다.
선황은 그런 무봉을 보며 미소를 짓더니 몸을 홱 돌렸다. 그의 허상은 점차 흩어져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명도 황궁으로 돌아와라. 여기서 볼일은 끝났다.”
선황의 명에 명도 존은 마지막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렸다.
도일도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섰고 다른 천존들과 약천존들 역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였다. 돌연 긴 한숨을 내쉰 한제가 막 흩어지려는 선황을 보며 툭 내뱉었다.
“열다섯 번째 궁전이라고 했나? 그럼 똑똑히 보게!”
한제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그 순간 그의 체내에서는 한 줄기 기운이 응집됐다. 그 힘은 이내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고 동시에 한제는 긴 빛을 드리며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막 이곳을 떠나려던 이들이 모두 움찔 멈추었다. 선황 또한 미간을 찌푸린 채 흩어지고 있던 허상을 다시 응집시켰다.
또다시 천존열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어 한제에게 집중했다.
명도 존 역시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누구냐!
제산의 구제 대천존은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 방금 전까지 선황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던 그는 갑작스러운 한제의 행동에 놀라고야 말았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 ★ ★
동주 자양종. 고애의 곁에는 실컷 놀다 들어온 쌍자 대천존이 서 있었다. 한제가 수많은 이들에게 지탄받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던 두 소녀는 그가 갑자기 날아올라 하늘로 솟구치자 기대감 어린 눈을 반짝였다.
그때, 한동안 괴롭힘을 받고 쌍자 대천존 뒤에 시무룩하게 서 있던 탐랑은 거울 속에 비친 광경을 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이한제?”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열세 번째 궁전에서 끝내려 했건만.’
한제는 계획을 틀어지게 만든 분노의 화염을 통해 오히려 황성에 가는 것이 매우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선황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내가 그 어떤 대천존의 제안도 받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겠지.’
이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밝게 빛나던 순간, 저 아래로 추락해버림으로써 가장 주목받던 존재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 정도야 무시할 수 있었다. 애초에 한제는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선황의 말은 모두에게 뜻밖의 충격을 안기겠다는 한제의 목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의 이름을 더럽혔다. 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가 선황이라도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열다섯 번째 궁전이라… 좋아, 오늘 내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선황, 그 비열한 행동을 통해 네 혈맥에 담긴 치졸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림종 아래 봉인된 그 사람은 죽어서도 원한을 풀지 못한 채 연운결이라는 이름을 되뇌며 비열하다 욕하고 있었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던 한제는 엄청난 속도로 열네 번째 궁전 앞에 도착했다. 그 상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선황, 두 눈 크게 뜨고 잘 봐라!”
“무엄하다!”
한제의 말에 명도 존이 호통을 쳤다. 허나 정작 선황은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켜보마. 네가 정말 열다섯 번째 궁전까지 통과할 수 있을지.”
허나 그의 두 눈동자는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졸아들었다.
한제는 이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열네 번째 궁전에 들어섰다.
‘혼개의 유효 기간은 거의 다 됐어. 이제 선강 대륙의 법칙을 이용해 만든 분신을 사용해야만 해! 분신, 영혼을 따라 융합하라!’
한제의 모습이 열네 번째 궁전 안으로 사라졌고 모든 수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상황은 너무도 급격하게 전환되고 있었다.
“세상을 속이려 들었던 저런 사기꾼이 통과할 리 없어!”
“재미있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려나.”
“당연한 걸 뭘 묻나? 혼개의 기한도 거의 다 됐을 텐데 저자가 어떻게 열네 번째 궁전을 통과하겠어?”
천존 수련자들은 여전히 한제를 비난하기에 바빴다.
수십여 명의 약천존들 역시 대부분은 한제가 실패할 것이라 여겼다. 한제의 도전을 우리에 갇힌 짐승의 발작 같은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일 대천존도 한제가 열네 번째 궁전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황의 몇 마디 자극을 못 참고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법석을 피우다니, 포섭할 가치가 없겠군.’
한편, 명도 존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두려움도 느껴졌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 때문이었다.
그의 곁에 선 선황은 역시 말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으나, 내심 의아해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저자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행동을 취하지 않을 터인데⋯⋯. 허나 혼개 없이는 열네 번째 궁전을 통과할 수 없어. 할 수 있었다면 진즉 그리 했겠지. 그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에 불과해!’
한데 그때였다. 한제가 열네 번째 궁전에 들어간 후 열을 세기도 전에 돌연 하늘에서 눈부신 금빛이 마구 발산됐다. 열네 번째 궁전에서 뿜어져 나온 그 금빛은 주위의 구름과 안개를 뚫고 퍼져 나갔다.
“마, 맙소사! 그냥 통과한 것도 아니고 열세 번째 궁전보다 더 빨리 통과했어!”
“호, 혼개의 유효 기간은 다한 것 아니었나? 한데 도대체…?”
“설마 혼개를 두 개 가지고 있었던 건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일 대천존은 또다시 마음을 돌렸다.
‘역시 포섭할 가치가 있는 자야!’
반면 명도 존은 한층 살기가 짙어진 눈으로 하늘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괜찮다. 열네 번째 궁전일 뿐이야.”
선황은 말은 그리 하면서도 눈동자는 살짝 졸아들어 있었다.
한편, 한제는 열네 번째 궁전을 나오자마자 다음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다섯 번째 궁전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금빛이 사방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그 순간, 선황의 얼굴에서는 드물게도 충격의 빛이 드러났다.
도일 대천존은 허탈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자를 잘못 본 모양이군. 명도 존보다도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자야. 혼개 역시 저자의 힘의 일부일 뿐. 심지어 같은 혼개를 가지고 있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열다섯 번째 궁전을 통과하지 못했을 터!”
무봉 대천존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선황에게 반기를 든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한제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기억할 테니 당장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후에 대천존이 될 경우 좋은 연을 맺는 기반이 될 테니까
“열다섯 번째 궁전도 통과…”
명도 존은 분노와 살기가 뒤섞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거만하고 고고한 그로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결국 몸을 훌쩍 날려 하늘로 달려들었다.
이제 천존열의 안과 밖, 그 어느 곳의 어느 누구도 한제를 비웃지 못했다. 오히려 한제에게 조금 전보다 더욱 탄복했을 뿐이다. 어떤 수단을 이용했건 열다섯 번째 궁전을 통과했다는 것은 의미가 컸다.
한편, 해자 천존은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제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갈수록 멀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이제는 다른 천존들이 그러하듯 상대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때, 훌쩍 날아오른 명도 존의 모습을 본 수련자들은 더욱 환호했다. 그가 열다섯 번째 궁전에서 나온 한제와 함께 거의 동시에 열여섯 번째 궁전에 이른 것이다.
천존열 시험장은 한 번에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가더라도 각자 따로 시험을 치르게 된다.
“명도 존과 이한제가 동시에 열여섯 번째 궁전에 도전했군. 과연 성공하는 자가 있을 것인가?”
한 명은 오랫동안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뜻밖의 충격을 선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동시에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더욱이 명도 존은 이전에 열여섯 번째 궁전에 두 번 도전해 모두 실패한 바 있었다.
선황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그가 한제에게 내건 조건이 보이지 않는 손바닥이 되어 그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이에 그의 두 눈에서는 어렴풋한 한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