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97
동주, 대성주.
한제는 평범한 산봉우리 위에 묵묵히 서서 뒷짐을 진 채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옷자락이 날렸지만 그의 백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눈은 마치 우주처럼 아득했고 몸은 꼿꼿해 마치 바람 속에 우뚝 선 소나무 같았다.
그는 천존열 시험장의 열일곱 번째 궁전을 통과했고 앞으로 여러 대천존이 찾아와 포섭하려 할 것임에도 전혀 자만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더없이 침착하고 덤덤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돌연 바람과 구름의 기색이 변하는가 싶더니 어둠에 가려졌던 하얀 구름이 다시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두워진 하늘 위에 태양도 하나 나타났다.
눈부신 햇빛이 어두운 밤을 비추면서 대지는 대낮처럼 환해졌다. 더불어 무궁무진한 열기까지 뿜어내던 태양에서 이내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에 도포를 입은 준수한 청년. 도일 대천존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세상 만물이 운행을 멈추었다. 바람도 그쳤고 나무는 흔들림도 없었다. 한제의 옷자락 역시 찰나의 순간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마치 온 세상이 보이지 않는 얼음에 봉인된 것처럼.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도일 대천존뿐이었다.
그는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한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닿자 돌연 한제 사방에서는 쩌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이 소리에 도일 대천존이 눈을 번득였다.
그 순간, 한제 사방의 허공에서는 무수히 많은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 상태였다. 마치 한제를 봉인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얼음이 무너져 내릴 조짐을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멎어 있던 한제의 옷자락이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불구하고 천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제는 고개를 번쩍 들어 도일 대천존을 바라보았다.
이때 도일 대천존의 눈이 더욱 강렬하게 번득였다. 세상 만물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자신의 위압감 아래에서 한제가 이토록 빨리 움직임을 회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지금 도일 대천존은 신식이나 분신이 아닌 본체로 온 상태였다.
“과연 열일곱 번째 궁전을 통과한, 선족 천존열 최강자답구나! 이한제, 나를 따라라. 난 당시 네게 약속했다. 나를 따른다면 내가 죽지 않는 이상 네가 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도일은 미소를 지었다. 천존열 시험장에서 한제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제는 말없이 포권을 했다.
도일 대천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얼른 표정을 푼 뒤 한제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한 자 한 자가 모종의 법칙처럼 온 세상을 벌벌 떨게 하는 듯했다.
“이것은 내가 직접 제련한 보물이다!”
도일 대천존이 오른손을 들자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금빛을 번득이며 날아올라 점점 커지더니 폭이 30척에 달하는 빛의 고리가 됐다.
“태고 신경에서 얻은 재료로 십만 년을 제련한 끝에 만들어낸 반지지. 신술을 통해 당시 선조의 보물을 흉내 낸 것으로 그 위력은 나로서도 당해내기 힘들 정도다.”
빛의 고리를 바라보는 한제는 두 눈이 번득였다. 분명 범상치 않은 반지였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간파할 수가 없었다. 또한 엄청난 위압감이 마치 대천존 자체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제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본 도일은 왼손을 휘둘러 푸른 대나무 조각 하나를 소환했다. 아름다운 푸른 빛을 발산하는 대나무에서 맑은 향기가 풍겼다.
“이 대나무 역시 엄청난 보물이다. 체내에 녹여 넣으면 본원을 진화시킬 수 있지. 또한 이 안에는 본존의 도가 깃들어 있어! 본존의 도를 완벽하게 깨닫는다면 비록 대천존에 등극하지는 못하더라도 대천존에 한없이 가까워질 것이다!”
한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나무 조각에서 풍기는 맑은 향기를 맡은 것만으로 체내의 본원이 곧장 자라났기 때문이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본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저것을 체내에 녹여 넣는다면 한제는 엄청난 이득을 거머쥐게 될 터였다.
한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도일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한제는 이런 법보를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 법보는 그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라 이것으로 한제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남는 장사인 셈이었다. 허나 그는 한제를 포섭하려는 자가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진정한 보물을 내놓지 않는다면 다른 대천존들과 경쟁하기 어려울 터였다.
“하나가 더 있지!”
도일 대천존은 내심 아쉬워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지금 꺼내놓으려는 것은 진정한 보물로 그로서도 여태껏 완전히 간파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전방에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났다. 그 회오리 안에는 주먹만 한 두개골이 하나 떠 있었다. 그 해골은 어스름한 빛으로 뒤덮인 채 놀랄 만한 죽음의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죽음의 기운은 주위를 휩쓸며 도일이 사방에 끼치고 있던 강력한 위압감을 그대로 무너뜨렸다. 이에 만물은 움직임을 회복했으나, 그 순간 죽음의 기운으로 물들었다.
두개골은 그 크기로 미루어 갓난아이의 것인 듯했다.
“이것은 태고 신경의 것이 아니라 내가 아주 오래 전 선강 대륙을 떠나 천외에 나갔을 때 폐허가 된 어느 대지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때 이것을 챙겨 떠나자 그 대지는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지. 이 안에는 나로서도 파악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 난 그저 이 힘을 흡수하면 대천존의 한계를 돌파하여 선조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도일의 눈빛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그만큼 아끼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내겐 이것을 얻는 행운이 따랐지만 이것을 파악할 운까지는 없는 모양이다. 아주 오랫동안 내 손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만약 네가 날 따르겠다면 네게 주마!”
결단을 내린 듯, 도일의 눈빛이 단호하게 변했다.
한제는 회오리 속 갓난아이의 두개골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간파할 수는 없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어디에서 봤는지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한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일 대천존.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도일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한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수준이라면 모든 대천존이 와서 포섭하려 할 터. 그러니 생각이 많은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때, 돌연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인 이곳에 낮은 기합 소리가 울렸다. 천둥처럼 우렁찬 기합은 순식간에 죽음의 기운을 뒤흔들었고 하늘에 파문이 일더니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큰 체구와 민머리, 거친 천으로 된 옷.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콰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세상 무엇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할 것만 같았다.
사내가 일곱 걸음을 걸어 나오자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만물이 물러났다. 죽음의 기운 또한 떨어져 나가며 허물어졌다. 마치 포악한 전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허공에 뜬 채로 도일과 한제 앞까지 다가왔다.
“무봉 대천존을 뵙습니다. 천존열 시험장에서 베풀어주신 도움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제는 민머리 거구의 사내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괜찮다. 난 원래 선황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 직언을 한 것뿐이지!”
무봉 대천존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 역시 천둥처럼 온 세상을 진동시켰다. 이는 도일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도일이 입을 꾹 다문 채 대천존으로서의 위용을 뽐냈다면 무봉은 친숙하게 말을 아끼지 않으며 호방한 기개를 보였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짐작하고 있겠지? 조건은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술이나 한잔할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내어주지 않는 술이 있거든.”
이어서 무봉은 손을 휘둘러 푸른 호리병을 하나 소환하더니 웃음을 머금은 채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 역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둘러어 호리병을 움켜쥐더니 들이켰다.
“좋다. 네가 나를 따르건 그러지 않건 상관없다. 언제든 북주 빙산에 온다면 환영해주마!”
무봉은 호탕하게 웃더니 고개를 살짝 틀어 도일을 힐끗 바라보았다.
“도일, 여러 대천존이 한 사람의 약천존을 포섭하려 할 때 조건을 제시할 기회는 단 한 번씩만 갖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겠지? 자네는 이미 조건을 제시한 모양이군.”
그는 세 개의 법보를 눈으로 슥 훑었는데 반지와 푸른 대나무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갓난아이의 두개골에 시선이 닿았을 때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로군.”
한제는 그 말에 흠칫 놀랐다. 여러 대천존이 동시에 포섭에 나서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닌 만큼 무봉이 이 사실을 굳이 언급한 데에는 분명 의도와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나를 도우려는 것인가?’
한제는 침착한 얼굴로 무봉을 바라보았다.
도일 대천존은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무봉의 말에 담긴 뜻을 당연히 알아챈 상태였다.
‘너무 일찍 왔군. 조금 늦게 올 것을⋯⋯. 다른 자들이 조건을 제시한 뒤에 왔다면 더 매혹적인 제안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가장 먼저 한제를 찾아온 것은 일전에도 한제에게 가장 먼저 제안했던 대천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상대가 법보를 매우 좋아한다고 생각했기에 남보다 앞서 좋은 법보를 제시함으로써 한제의 마음을 사고 싶었다. 한데 무봉이 저리 나올 줄이야…
“이게 끝일 리 있겠나? 아직도 보여줄 게 많이 남아 있지!”
결단을 내린 도일은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옷자락이 휘날리다가 잠잠해졌고 뒤이어 펼쳐진 그의 손에서는 여러 색채로 반짝이는 수정이 하나 나타나 위로 살짝 떠올랐다.
“이한제, 이것은 본존의 도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오직 일방향으로만 작용하는 물건이지. 이것을 체내에 녹여 넣는다면 네 목숨이 다할 때 나는 부상을 입게 되지만 내가 부상을 입더라도 네게 영향이 미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이걸 갖는 한 너를 다치게 하려는 자는 곧 내 적이 되는 것이다!”
도일은 내심 속이 탔다. 이것은 그가 양보할 수 있는 최후의 물건으로 원래는 내놓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허나 무봉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한 수가 필요해졌다.
그 수정을 본 무봉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도일을 한 번 살폈다가 한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천존이 저런 도정(道晶)을 내놓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지. 저게 있으면 분명 네 안전은 보장할 수 있을 게다. 허나 난 구제 대천존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봉! 설마 이한제를 포섭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좋은 연을 맺어두려는 속셈인가?”
도일이 낮게 외쳤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하하하!”
무봉 대천존이 호탕하게 웃었다. 분명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한제가 자신을 따르기로 선택한다면 후한 대접을 해줄 작정이었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택한다 해도 좋은 연을 맺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무봉 자네는 어떤 조건을 내걸 참인지 궁금하군!”
도일은 살짝 짜증이 났으나 무봉과 지위가 같은 그로서는 상대가 그런 전략을 취한다고 한들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도일 자네만큼 많지는 않네. 난 태고 신경에서 자네와 같이 많은 행운을 거머쥐지는 못했으니까.”
말을 마친 무봉은 덤덤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 담긴 맑은 기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허나 만약 나를 따르겠다면 난 너를 내 휘하의 부하가 아닌 내 스승님의 제자 내 사제로 삼을 것이다. 나와 같은 지위에 있게 되는 것이니 내가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너도 갖게 될 터! 내가 제시할 단 하나의 조건이다.”
무봉은 한제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제가 후에 대천존에 등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봤고 그런 인물이라면 이러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한제
한편, 도일은 무봉의 조건을 듣고는 흠칫 놀랐다. 자신이 제시한 법보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무봉, 역시 거침없군. 허나 이한제가 분명 우수하긴 해도 그런 조건을 약속받을 정도는 아니야. 내 도정만 해도 과한 조건이었다고! 한데도 저런 조건을 제시했다는 건 무봉은 이한제가 대천존이 될 거라 생각해 도박을 하는 게야! 동등한 지위의 사제라⋯⋯. 만약 당시 명도 존에게 저런 조건을 제시했더라면 그는 무봉을 따랐겠지. 이한제, 저자도 저 제안에 응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될 터!’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무봉이 이런 조건을 제시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말에 거짓은 없다. 체내의 혈맥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어!”
무봉이 한제를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무봉, 미쳤군!’
곁에 있던 도일은 매우 어두워진 얼굴로 생각했다.
한제는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무봉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오랫동안 이곳 선족 구역에 있을 생각이라면 무봉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무봉 대천존. 허나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포권을 했다.
“괜찮다. 우리 중 최강자라 할 수 있는 구제 대천존은 아마도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가능성이 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