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98
무봉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미소를 지었다.
“왔군!”
무봉의 말과 함께 하늘에는 돌연 한 줄기 빛의 파문이 나타났다. 그 빛의 파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자 천존과 그녀의 스승이었다.
“이한제!”
해자 천존은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곧장 한제 곁으로 다가왔다.
“한동안 사라져 흔적도 보이지 않다가 대뜸 나타나서는 천존열 열일곱 번째 궁전까지 통과하다니!”
그녀를 만난 한제도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가까이 다가온 해자 천존에게서는 아찔한 향이 훅 끼쳐왔지만 한제는 피하지 않았다. 천존열 시험장에서 다른 천존들이 자신을 비난하던 그 순간에 해자 천존이 자신을 위해 나서줬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내가 제산에 대해 말했던 거 기억해? 나랑 같이 그곳에 가서 낙엽 구경을 하자. 어때?”
해자 천존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며 망설이던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꼭 찾아가지.”
“언젠가? 지금이 아니라?”
해자 천존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해자 천존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근 3천 년을 살아온 그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이 자신을 연모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호감은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러한 호감은 결국 애정으로 변하게 될 터였다.
허나 한제로서는 그녀의 감정이 그렇게 발전하도록 둘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동부계의 여인 몇 명이 그러했듯 그녀 역시 끝내 슬픔에 처하게 될 테니까.
한제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해자 천존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상대를 살짝 토닥였다.
“그래? 제산으로 초대해 예쁜 여자 수련자들을 소개해주려 했는데… 싫다면 관둬.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니까.”
한제는 쓰게 웃었다.
“해자 그만 해라!”
뒤에서 지켜보던 구제 대천존이 외쳤다. 그의 표정은 엄숙했지만 그에게서 대천존의 위엄은 느껴지지 않았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평범해 보일 정도였다.
“이한제, 나는 너를 제자로 삼으려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제 대천존은 선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고고한 말에도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었다.
“내 제안에 응한다면 태고 신경이 열릴 때 너를 들여보내주겠다고 약속하마! 네가 대천존이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이다!”
대천존이라도 쉬이 할 수 있는 약속은 아니었다. 이런 약속을 지키려면 얼마나 많은 대가를 들여야 하는지는 오직 대천존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명도 존에게 했던 제안과 같았다. 하지만 명도 존은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선황의 알 수 없는 제안에 응했다.
“내 도움을 받는다면 태고 신경이 열릴 때 대천존에 등극할 확률이 3할은 높아질 것이다. 게다가 내 제자가 되면 선황이라도 감히 네게 손을 대지는 못할 터! 선황과 너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건 내가 처리해줄 수 있다! 대천존 중 이미 죽어버린 동림 외에 나와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쌍자뿐. 허나 쌍자는 지난 환생 도중 불의의 사고로 인해 영혼이 갈라져 매우 약해져 있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는 바로 나다!”
한제는 각각 다른 조건을 제시한 도일과 무봉, 구제 대천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도일은 법보를 무봉은 평등을 구제는 보장을 약속했다.
만약 그가 선족 구역에서 오랫동안 지낼 예정이라면 구제를 택하는 편이 가장 타당하고 적합했다. 또는 무봉을 택해도 선족 구역 안에서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도일은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는 당시 현라와도 싸운 적이 있었다. 천역주가 바로 그 두 사람의 싸움 와중에 칠채선존이 얻었던 것 아닌가?
허나 동시에 도일은 선택하더라도 마음의 짐이 생기지 않을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제시한 법보들은 분명 한제의 마음을 흔들었고 만약 선황이 공격해온다면 도일이 과연 자신을 도우려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제는 선족 중 가장 강한 대천존이야. 그의 편에 붙는다면 난 최대한 신중하게 굴어야 해. 허나 그는 중주에 있으니 내가 중주 황성에 가더라도 안전은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겠지!’
고민하던 한제는 결심을 내리고 구제 대천존을 향해 포권 하려 했다.
그때, 구제 대천존이 돌연 고개를 홱 쳐들었다. 뒤이어 무봉과 도일도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던 하늘에서는 세 갈래의 빛이 휙 날아들어 순식간에 이곳에 이르렀다.
“이한제, 정말 너였구나! 아하하하!”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 너머, 세 갈래 빛 안으로 쌍자 대천존과 고애 천존이 보였다.
한제 옆으로 훌쩍 다가온 아가는 손뼉을 치면서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이한제! 나 기억해?”
“이한제! 나 기억해?”
하영이라는 소녀도 다가오면서 한 손에 쥐고 있던 수련자를 옆으로 홱 내팽개쳤다.
“탐랑…”
“이, 이 도우. 정말 오랜만…”
탐랑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좋아, 대머리, 가면 그리고 거기 늙은이는 이만 물러가. 이 이한제는 우리 거야!”
아가는 왼손을 허리에 얹은 채 오른손을 들어 나머지 대천존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그래, 이한제는 우리 거야! 누구라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혼쭐을 내줄 거야!”
하영이라는 소녀는 당장이라도 누굴 때릴 듯 손을 홱 쳐들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제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고애 천존은 몇 걸음 물러나 쓰게 웃고 있었다. 그로서는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도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무봉은 표정이 더욱 진중해졌다.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소녀를 바라보던 구제는 이내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한제에게 말했다.
“이한제, 어떻게 하겠느냐?”
“어, 늙은이! 우리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야?”
“늙은이, 기억났어. 그때 너는 우리를 이기지 못했잖아!”
두 소녀는 구제 대천존이 입을 연 순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쌍자 환생 이후 영혼이 분열된 것으로도 모자라 그런 성미까지 갖게 된 것인가! 이한제는 열일곱 번째 궁전을 통과한 뒤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니 조건을 제시하고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지, 어찌…”
구제 대천존은 미간을 팩 찌푸렸지만 말을 채 맺지도 못했다. 두 소녀가 순간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영, 저놈들을 때려주자!”
아가가 화가 잔뜩 난 듯 외쳤다.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던 두 소녀의 인영은 순간 겹쳐지면서 어마어마한 기운을 발산했다.
두 소녀는 동시에 두 손을 들어 몸으로 하나의 원을 그렸다. 그러자 원은 마치 금빛 태양처럼 강력한 금색 빛을 마구 뿜어냈다.
태양의 빛이 찰나의 순간 세상 모든 빛을 대체하더니 다른 대천존들을 뒤덮었다. 덕분에 밖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콰쾅!
강력한 빛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도일 대천존이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다. 그는 잔뜩 분노한 얼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빛을 그리며 달아났다.
다음으로 튀어나온 것은 무봉 대천존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금색 빛에서 물러난 뒤 긴 한숨을 내쉬며 이내 사라져 자취를 감췄다.
“제멋대로인 꼬맹이들 주제에 감히 선강 대륙 아홉 태양의 힘을 발휘해 정말로 싸우려 들다니⋯⋯. 윽!”
세 번째로 구제 대천존마저 밀려났다. 미간을 찌푸린 채 금빛 밖으로 튕겨 나온 그는 소매를 휙 휘둘렀다. 그러자 이 세상을 뒤덮은 듯했던 강력한 금빛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이한제, 제산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뒤이어 그는 허공을 움켜쥐더니 해자 천존을 데리고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쌍자 대천존의 광기 어린 공격에 세 명의 대천존은 단박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금빛이 흩어져 사라지자 두 소녀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허공에서 한제를 내려다보았다.
“고애, 어때? 우리 대단하지? 저 세 녀석은 아홉 태양의 힘을 사용할 엄두도 못 내. 하지만 우리는 그 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지!”
“겁먹고 도망치는 꼴 좀 보라지! 아하하하!”
고애는 얼른 다가와 칭찬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쌍자 대천존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른 대천존들이 감히 맞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군요! 이 고애, 진심으로 탄복했습니다!”
사실 그로서는 할 말도 많지 않았다. 한제를 포섭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우울했던 그에게 ‘기발한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말라던 두 소녀의 호언장담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저 힘으로 때려서 쫓아낸다는 게 그 기발한 방법이었나? 기발하다기보다는 기가 막힌다. 하아…’
뒤이어 고애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백발 약천존을 뵙습니다. 갑작스레 죄송하게 됐습니다. 분명 여러 대천존의 제안을 받으셨겠지만 쌍자 대천존의 제안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쌍자 대천존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선량하십니다. 그분을 따르신다면 분명 후하게 대접할 것입니다. 선배님의 어떠한 요구라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실 거라고 대신 약속드립니다.”
고애 천존은 말을 마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한제는 한쪽에서 우울해하고 있는 탐랑을 힐끗 보더니 고민에 잠겼다.
“고애, 무슨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하는 거야? 이한제, 이제 이곳에 다른 대천존은 없어. 우리뿐이야. 자 가자!”
하영이 입술을 비죽이며 한제를 흘겨보았으나 더욱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한제는 그런 하영의 모습에 어린 시절 주은혜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한제, 내가 너를 구해줬잖아! 기억하지? 그치? 기억하지? 은혜를 저버리겠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흥!”
곁에 있던 아가도 눈을 부릅뜨며 뺨을 불룩 부풀렸다.
한제는 한층 난감해진 얼굴로 쓰게 웃고 있는 고애를 바라보았다.
고애는 어느 약천존도 대천존으로부터 이런 식의 포섭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제처럼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약천존을 포섭하려면 대천존이라도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짜, 가짜
“저, 선배님…”
고애가 막 입을 열어 변명을 하려 했다.
그때 하영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한제 앞에 섰다. 그러나 작은 키 때문에 한제를 올려다봐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다시 몸을 살짝 띄워 머리 하나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러더니 의기양양한 태도로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는 천진한 두 눈을 깜빡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