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01
바닥에 두껍게 쌓인 눈은 서늘한 은빛으로 번득였고 꽉 닫힌 저택의 문에서는 강력한 위압감이 흘렀다.
저택 문밖에는 두 마리의 돌사자가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기운이 느껴져 만약 눈을 뜬다면 얼마나 더 강력한 기운이 느껴질지 짐작도 안 될 정도였다.
저택 대문에는 붉은 바탕에 푸른 테두리가 둘러진 문패에 두 글자가 금색으로 쓰여 있었다.
이부(李府).
이 글자에서 발산되고 있는 놀랄 만큼 강력한 기운이 사방의 눈과 바람에 살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수많은 긴 복도와 아름다운 누각으로 이루어진 저택은 내리는 눈 속에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저택의 긴 복도 뒤로는 청석으로 만들어진 밀실이 있었다. 쌓인 눈에서 발산된 은빛에 뒤덮인 밀실은 고요했다. 허나 한제가 동문을 통해 동성에 발을 들인 순간, 이 밀실에서는 웅 하고 활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또렷하게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밀실 안에는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고 그 앞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받침대가 하나 있었다. 보라색의 이 받침대는 일견 평범해 보였지만 기이하게도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 위에 활 한 자루가 얹혀 있어야만 비로소 완전해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때 그 받침대 위에 활 자루가 흐릿하게 나타나더니 끊임없이 웅, 웅 소리를 냈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노인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매서운 눈으로 나무 받침대를 응시했다.
“선조의 활 받침대가 울었어! 오직 선조의 활이 가까이 있을 때만 일어나는 현상인데… 설마 선조의 활이 나타났단 말인가!”
흠칫 놀란 노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받침대 쪽으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보라색 빛이 나타나 번득이며 화살 형태로 응집되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석실 밖 먼 곳으로 휙 날아갔다.
“이운, 이산! 따라가서 선조의 활의 기운이 느껴지는지 찾아봐라!”
노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고요했던 저택의 두 누각에서 각각 사람의 인영이 하나씩 튀어나와 보라색 화살을 쫓아 연기처럼 몸을 날렸다.
★ ★ ★
이 무렵, 한제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동성의 눈 쌓인 길을 걷고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도시는 내 평생 처음이군.’
동성이 이 정도이니 조성 전체가 얼마나 거대할지는 실감도 나지 않았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런 한제를 힐긋 보고 지나칠 뿐이었다.
사방의 점포와 각각의 저택에서는 짙은 선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이러한 선기로 둘러싸인 동성에서 한제는 매우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달빛이 환해질 무렵 몇 층 높이의 객잔에 선석 몇 개를 지불하고 묵었다.
객잔은 크지도 않았고 평범했다. 허나 그 안에서는 바깥보다 훨씬 짙은 선기가 느껴졌다. 사방의 벽과 창문에는 금제와 봉인이 뒤덮여 있어 원하기만 한다면 방 안에서도 충분히 폐관수련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금표는 곁에서 흥분한 듯 주위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어깨 위에는 손가락 굵기로 몸을 줄인 해룡이 나른하게 엎드려 있었다.
해룡과 유금표가 이토록 친밀해진 것에 대해 한제는 조금도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다. 유금표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터였다.
밤이 깊어지자 눈보라는 한층 약해졌다.
창가에 서서 점점 늘어 가는 행인들과 불을 밝힌 상점을 보고 있던 유금표는 곳곳에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다소 흥분한 듯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전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일반인 도시와 별 차이가 없네요. 보십시오. 저기에는 분명 죽여주는 미인이 있을 겁니다!”
유금표는 불이 환하게 밝혀진 저 먼 곳의 점포를 가리켰다.
“주인님, 허이국의 본성이 어디 갔겠습니까? 만약 그가 아직 이곳 중주에 있다면 분명 밤마다 유흥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자를 찾으시려면 저런 곳을 뒤지고 다녀야 하죠. 흠, 이렇게 하시죠. 이 유금표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군자라 저런 곳에 발을 들이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으니 제가 가서 허이국이 있는지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유금표는 격앙된 감정을 애써 참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유금표가 이 방에 처박혀 있는 것을 답답해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한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금표는 순간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해룡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유금표가 떠나자 한제는 홀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연도비는 과연 아직 동부계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창밖의 달빛이 깊어지고 눈발이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을 때, 한제의 술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술병을 내려놓더니 도롱이를 걸친 채 밖으로 나가 밤이 깊었음에도 그리 어둡지 않은 동성을 거닐었다.
밤하늘 아래, 동성 여기저기서 울리는 음악과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 한제는 고독에 휩싸인 채 홀로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에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고 이내 홀로 내리는 눈을 맞고 있었다.
한데 한제는 어느 순간 멈춰 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쑥 말했다.
“뭘 원하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 실린 무형의 위압감에 사방의 눈보라가 순간 멈춘 듯했다. 허공에 숨어든 존재라도 단박에 튀어나오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압감이었다.
그의 뒤편 허공에서 파문이 일더니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인영이 또렷해지기도 전에 보라색 화살 하나가 쉭 하고 달려들었다.
인영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허상의 활 한 자루를 소환했는데 이 활은 스스로 또 하나의 화살을 발사했다.
이번 화살은 조금 전 날아든 보라색 화살과 함께 한제에게 돌진해왔다.
“이씨 가문?”
도롱이를 입은 채 삿갓을 깊게 눌러선 채로 휙 돌아 선 한제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의 손짓에 보라색 화살의 허상은 허공에서 무너져 내렸고 뒤를 따르던 또 다른 화살 역시 바르르 진동하다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살을 쏜 사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존에 이른 자신이 전력을 다해 쏜 화살이 이렇게 간단히 무력화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탓이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설 정도로 무시무시한 상대의 힘에 그는 곧장 뒤로 물러나면서 피를 한 움큼 왈칵 뱉어냈다. 그리고 그 피로 혈둔술을 발휘해 눈 깜짝할 사이 1천 리를 멀어져갔다.
물론 한제가 추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상대는 결코 도망칠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한제는 제자리에 선 채 도망치는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뒤쫓지는 않았다.
‘동성에 들어오자마자 이씨 가문의 시선을 받게 되다니⋯⋯. 체내에 남겨진 이광의 활 때문이겠지. 그것과 이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활의 존재를 감지한 것일 터. 허나 내 정체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군. 고작 두 명의 금존만을 보낸 것을 보면 말이야.’
한제는 이씨 가문과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그러니 자신을 뒤쫓은 그 두 사람을 죽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다음은 없을 거다!”
한제는 그 짧은 한 마디만을 남겼을 뿐이다. 한데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1만 리 밖까지 도망친 이운의 심신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크아악! 쿨럭, 쿨럭! 대, 대체 저자의 수준은…? 도대체 누구냐? 선조께 알려야 한다! 저자는 천존 이상의 수준임이 분명해! 이런, 이산은 저자의 동료를 사로잡으러 갔는데…”
이운은 또 한 번 피를 토해냈고 화들짝 놀라더니 ‘가문의 이번 결정이 어쩌면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한편, 짧게 이운을 꾸짖은 한제는 곧장 돌아 서서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채 거리를 걸었다. 특정한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혼자서 조용히 걷고 싶을 뿐이었다.
어느새 눈앞에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환하게 불이 밝혀진 건물이 나타났다.
한제는 이 건물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한데 그냥 지나치려던 그는 무언가를 느낀 듯 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기이한 눈빛으로 건물을 응시했다.
모든 것을 꿰뚫을 듯한 그의 눈빛은 건물 3층에 이르렀다. 붉은 옷을 입은 채 의기양양해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 한제에게는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 사내 뒤로는 호위병으로 보이는 수련자들이 서 있었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른 그들은 모두 사내에게 매우 공손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만 존재를 느낄 수 있다니. 누군가가 저자의 몸에 봉인을 남겨둔 것이 분명해!’
한제의 눈이 가늘게 변했고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허이국…”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 건물로 들어서려 했다. 한데 그 순간,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몸을 돌려 어딘가를 내다보았다.
“이부, 도가 지나치군!”
뒤이어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사라졌다.
그때, 화려한 건물 안 붉은 옷의 사내는 술잔을 내던지며 누군가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게 술이냐? 어디 감히 이 허 영감을 속이려 드느냐? 이 가게에 몇 천 년 묵은 좋은 술이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왔다. 얼른 그 술을 내오지 않으면 너희를 베어버릴 것이다!”
사내는 매우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방금 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누군가의 눈빛이 자신을 살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 ★
동성의 길 위. 몸을 1백 척으로 축소시킨 해룡은 낮게 포효하며 곧장 몸을 날렸다. 허나 녀석은 얼마 솟아오르지도 못했다. 이곳은 강력한 위압감으로 둘러싸여 너무 높이 올랐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녀석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특히 복부에는 검은 화살이 하나 박혀 온몸이 검은 연기로 뒤덮힌 채 생기가 파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등에는 유금표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방금 전 날아든 화살을 해룡이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저 화살은 해룡의 모든 신통술을 파괴하고 곧장 복부에 박혔어. 그만큼 강력한 화살이야. 대체 누가 나를 죽이려 하는 거지? 이곳에 와서 속인 사람이라고 해봐야 일곱 명에 불과한데…’
유금표는 화가 났으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젠장할, 감히 나를 화나게 하다니! 내 주인님께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이때 해룡의 뒤로는 검은 인영이 어두운 밤에 녹아든 채 빠른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다. 어둠 탓에 상대가 사내인지 여인인지, 늙은이인지 젊은이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해룡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추격해오면서 또 한 발의 화살을 발사했다.
쉭!
이번 화살은 사방의 선기를 머금은 채 날아들었다. 서늘한 살기를 품은 화살은 당장이라도 해룡과 유금표를 죽일 기세였다.
“크아아! 이 망할 놈들아! 내가 누군 줄 아는 게냐!”
유금표는 크게 외치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해룡 역시 날카롭게 포효하면서 수증기를 내뿜어 층층의 파문을 일으켰다.
이를 본 추격자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화살은 자신과 같은 수준의 수련자라도 막아내기 힘든 존재였다. 저들을 죽일 마음은 없으니 이번 일격으로 중상을 입힌 후 끌고 가 큰 공을 세울 생각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그의 얼굴에 어렸던 조소가 사라지더니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가 쏜 화살이 막 표적에 명중하려는 순간, 돌연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도롱이 차림의 사내는 그저 삿갓을 들춰 눈을 드러냈을 뿐이다. 한데 그 눈에서 금빛이 번득이며 튀어나와 날아들던 화살을 막아섰고 그 순간 화살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