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02
화살
어둠에 녹아든 채 추격해오던 인영은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고 몸을 바르르 떨더니 튕겨져 나왔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상대와 눈빛을 마주한 순간, 만 자루의 검에 난도질을 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크윽!”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그 강력한 눈빛에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진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가 처박힌 땅에 쌓였던 눈들이 흩날렸다.
의식을 잃기 전, 그는 심지어 가주와 선조로부터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큰 두려움을 느꼈다.
“주인님! 드디어 오셨군요! 저자가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해룡도 다쳤고요!”
유금표는 한제를 보자마자 응석을 부리듯 외쳤다.
해룡은 몸을 홱 돌려 눈을 거칠게 번득이며 저 멀리 떨어진 인영을 노려보았다.
한제는 가만히 해룡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해룡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온몸을 뒤덮었던 검은 연기에서 벗어났고 복부에 박혀 있던 화살도 튀어나왔으며, 상처 역시 빠르게 회복됐다.
한제는 해룡의 배에서 빠져나온 검은 화살을 쥐고는 잠시 살피다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화살은 재가 되어 눈보라에 날렸다.
“이부, 도가 지나치군!”
뒤이어 한제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이부? 주인님, 저자를 알고 계십니까? 제가 누군가를 속여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유금표는 억울해 죽겠다는 듯 가련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가자. 이부에 가봐야겠다!”
한제는 별다른 대답 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않는 이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산의 몸은 둥실 떠올랐다.
어둠 밖으로 드러난 이산은 중년 사내였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두 눈을 꼭 감은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한제는 신식을 응집해 이산의 정수리에 녹여 넣어 필요한 정보를 획득한 후, 소매를 휘둘러 해룡과 유금표, 의식을 잃은 사내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나타난 곳은 동성 깊은 곳의 적막에 휩싸인 어느 저택 앞이었다.
“이 집의 주인에게 보자고 전해라.”
한제는 저택의 대문에 붙은 문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유금표는 정신을 바짝 차린 듯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즐거운지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거들먹거리며 굳게 닫힌 이부의 대문을 향해 다가갔다. 이렇게 거들먹거리는 유금표의 모습과 표정은 1년여 전 이곳에 왔던 어떤 사람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가 지나쳐갈 때도 돌사자들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장식품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유금표는 발로 문을 힘껏 차더니 버럭 외쳤다.
“우리 주인님께서 오셨으니 얼른 문을 열고 환대하여 맞아라!”
이 말 역시 1년여 전 이곳에 왔던 그 사람이 했던 말과 비슷했다. 만약 그 붉은 옷의 청년이 이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허이국이 찼을 때는 미동도 않던 문이 지금은 격렬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는 것이었다.
한데 정작 유금표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발길질이 그 정도로 위력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한제는 그런 유금표의 얼떨떨한 얼굴을 보며 웃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인이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들어가는 수밖에…”
말을 마친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쪽에 의식을 잃은 채 둥둥 떠 있던 이산이 곧장 대문 안으로 내던져졌다. 한제는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한데 그가 막 그 곁을 지나칠 무렵, 두 돌사자가 돌연 눈을 번쩍 뜨더니 우렁차게 포효했다.
“쿠오오!”
포효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 동성의 절반을 뒤덮었고 그 포효에 뒤덮인 범위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고요해졌다. 동시에 두 돌사자 위로 거대한 허상이 하나씩 떠올랐다. 몸길이가 수천 척에 달하는 사자의 허상은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포효하며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거대한 사자의 허상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었지만 한제에게 백 척 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애처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대문 양 옆의 두 돌사자는 쩌적 소리와 함께 균열로 뒤덮이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한제는 계속해서 걸었고 유금표는 겁먹은 듯 찬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흥분에 찬 눈빛으로 뒤를 따랐다. 한제가 강해질수록 자신의 지위 역시 올라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제가 이부의 대문에 발을 들인 순간, 돌연 수많은 인영이 쉭 소리와 함께 누각 곳곳에서 튀어나오더니 한제에게 화살을 쏘았다.
어마어마한 힘을 품은 수백 개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 내리면서 모종의 도안을 형성했다. 이 도안은 무궁무진한 붉은 빛과 함께 짙고 강력한 살기를 뿜어내면서 한제를 압박해왔다.
한제는 걸음조차 멈추지 않은 채 계속 나아가면서 손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그의 손짓에 지문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일 만큼 실체에 가까운 거대한 손바닥 허상이 나타나 곧장 수백 개의 화살과 충돌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면서 모든 화살이 무너져 내렸고 손바닥 허상 역시 흐릿해지다가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천존열 여섯 번째 궁전의 위력에 비할 만한 공격이로군.’
한제는 여전히 도롱이 위로 삿갓을 눌러쓴 채 걸었다. 그에게 화살을 쏜 수백 명의 수련자 중에는 사내도 있고 여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들의 공격은 천존이라도 날려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건만 눈앞의 상대는 겨우 손짓만으로 그 강력한 공격을 무력화하지 않았는가.
그때, 저택 곳곳에서 아홉 개의 화살이 휙 하고 쏘아져 나왔다. 각각의 화살은 순식간에 폭발하여 수백 개로 조각나면서 방금 전 수백 명의 수련자가 쏘아 보낸 공격에 결코 뒤지지 않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 화살이 아홉 개였으니 그 위력은 방금 전 쏟아진 공격의 아홉 배에 달하는 위력인 셈이었다.
화살 파편들은 하늘을 뒤덮은 채 폭풍을 형성했다. 마치 거대한 손이 한제를 힘껏 움켜쥐어 그대로 소멸시키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제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들더니 오른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 순간, 만물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비처럼 쏟아지던 화살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도 멎었다. 심지어 한제가 지나쳐 간 뒤로도 여전히 허공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아홉 개의 화살을 수백 수천 개의 파편으로 흩어 손바닥으로 응집하다니, 천존열 일곱 번째 궁전의 공격에 해당하는 위력이군. 너희 아홉은 분명 네 번째 궁전을 통과한 천존들이겠지. 과연 이부답군. 강력해!”
한제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리고 너희 셋 중 하나는 열 번째 층을 통과한 약천존이고 둘은 나머지 일곱 번째 층을 통과한 천존일 터. 힘을 합친다면 열 번째 층을 통과한 약천존의 힘과 비슷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난 여태 이부의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허나 너희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는다.”
한제는 수백 명의 이씨 가문 사람들 틈에서 세 곳을 잠시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길이 닿았던 곳에서 세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노인은 수준이 약천존에 이르러 있었다.
머리카락이 반은 검고 반은 하얀 그는 충격과 의혹이 어린 눈으로 한제를 살폈다. 허나 그로서는 한제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을 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난 이부와 적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이광의 유물은 내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어준 바 있지.”
실제로 이광의 활은 동부계에서 수많은 위험을 넘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너도 이만 나와라!”
한제는 고개를 홱 쳐들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두 눈에서 돌연 번득이는 강력한 금빛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품은 금빛은 동성을 뒤덮은 선력의 위압감을 뛰어넘었다. 이 금빛은 선극검의 위엄을 품은 채 사방의 모든 것을 억압하고 짓누르기 시작했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수백 명의 이씨 가문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던 활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는 천존 수련자들의 활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약천존의 활만 갈라지지 않았으나, 그 현은 재가 돼버렸다.
한제의 호통과 묵직한 눈빛에 이씨 가문 사람들은 감히 그와 눈을 맞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저 멀찍이 석실이 드러났다.
사방은 고요했다. 활을 잃은 수련자들은 어느새 한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볍게 떨고 있었다. 특히 한제의 정체를 알아차린 몇몇 천존의 표정은 급격히 변했다.
그때였다.
“백발 약천존…”
석실에서 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석실의 문이 열리더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자연스러운 위엄이 느껴지는 금색 도포의 노인은 씁쓸한 표정이었으나 한제의 눈빛을 피하지는 않았다.
한제가 삿갓을 벗자 그의 백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이 모습을 본 이씨 가문 사람들은 헉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고 모든 시선은 한제에게 쏠렸다.
지난 1년간 백발 약천존에 대한 소문이 선강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니 조성이라고 그런 소문이 닿지 않았을 리 없었다. 네 왕의 저택 중 하나인 이곳 이부의 사람들도 그 소문들을 통해 한제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약천존 최강자 대천존 아래 최강자인 이한제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설명을 해보시지.”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석실에서 걸어 나온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노인은 아마도 열한 번째 궁전을 통과하고 열두 번째나 열세 번째 궁전에 가로막힌 사람 중 하나일 터였다.
‘이곳에는 약천존이 둘이고 천존이 열하나다. 이런 세력이 조성에 세 군데나 더 있다 이건가?’
한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선조의 활 받침대가 진동했네. 선조의 활이 근처에 나타났다는 뜻이지. 선조의 활은 이광의 손에 전승됐다가 사라진 후 그 종적을 찾지 못했다네. 나로서는 사람을 보내 그 흔적을 찾을 수밖에 없었지. 그들의 거친 행동에 자네가 분노한 것은 이해하네. 선조의 활은 우리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
노인은 힘겹게나마 한제의 눈을 마주보고 있기는 했지만 점점 강해지는 위압감에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한제는 말없이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연 명불허전! 이한제는 대천존 아래 최강자로구나! 천존열의 일을 직접 보지 못해 소문이 과장되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전혀 아니었어!’
한제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던 노인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건 이 일은 우리 이씨 가문의 불찰이야. 책봉을 받으러 황성에 온 모양인데 우리 이부에 머물면 어떻겠나? 내 백발 약천존을 잘 모시고 황성까지 모시라 일러두겠네. 선조의 활을 가지고 있다면 자네도 우리 집안과 아예 연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 이부의 전각(箭閣)에는 선조가 남긴 전도(箭道)가 있다네. 약천존이라야 볼 수 있지.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하고자 하는데 어떤가?”
노인은 한제를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자신들의 선조가 굽히고 들어가는 듯한 모습에도 이씨 가문 사람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상대는 무려 대천존 아래 최강자가 아닌가? 그런 상대 앞에서는 조성 4대(四代) 왕의 저택 중 하나라 해도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만약 이들 때문에 한제가 부상을 입기라도 하면 대천존이 찾아와 그들을 벌할 것이다. 허나 반대로 이한제가 자신들을 죽인다 해도 대천존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선강 대륙의 암묵적인 약육강식의 법칙이었다.
실제로 황성을 떠나는 경우가 드물었던 명도 존이 어쩌다 한번 나올 때면 감히 그를 거스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4대 왕의 저택에서도 명도 존에게는 매우 공손했다. 본디 명도 존은 선족의 여섯 번째 태양이 될 재목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제는 그런 명도 존을 단번에 꺾은 장본인이다. 이부에서도 만약 그의 정체를 미리 알았더라면 감히 그를 건드릴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백발 약천존
“전각?”
한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이부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면 공손하게 나올 것임은 이미 예측했다. 노인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선조의 활에 대한 갈망도 엿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을 억지로 빼앗아가기란 불가능할 테니 아예 납죽 엎드려 자신이 내주기를 기대하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이 활…”
한제가 오른손을 들자 반짝이는 빛과 함께 이광의 활이 한제의 손에 나타났다. 서늘하고 오래된 기운이 풍기는 활을 본 노인의 두 눈에는 감격의 빛이 드러났다.
다른 이씨 가문 사람들도 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중에는 그 활을 본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야기만 들었을 뿐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