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04
광장의 수련자들은 여전히 한제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수만 명의 금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모인 수련자 중에는 조성의 4대 저택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부를 제외한 세 저택 사람들의 눈빛은 각기 달랐다. 특히 세 가주들의 눈빛은 복잡했다.
한제가 포권을 올리자 사방은 고요함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선도전 안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책봉 사자를 내던지다니, 책봉식을 어찌 진행하란 것이냐?”
동시에 닫혀 있던 선도전의 문이 안으로 열리면서 대전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그 깊은 곳에는 산 모양의 대가 서 있었고 그 위로 거대한 용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 용상은 진짜 용 같았는데 허공으로 치켜든 머리에 박힌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한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용상에는 황포를 입고 왕관을 쓴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살짝 비뚤어진 자세로 앉아 있는 그에게서는 위엄이 절로 느껴졌다.
사내의 옆에는 거친 천으로 된 옷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피부는 백옥처럼 하얗고 두 눈은 가늘고 긴 이 청년은 손에 쥔 보라색 구슬 두 개를 끊임없이 굴리며 미소를 띤 채 온화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청년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한제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인생을 바꿀 만한 순간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바르르 떨리던 심신을 빠르게 다잡은 한제는 바짝 졸아든 두 눈으로 청년을 마주보았다.
청년은 살짝 놀란 듯 눈이 커지는 듯하더니 이내 웃음을 머금은 채 한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국사 상현도!’
청년과 눈을 맞춘 순간 떠오른 이름이었다.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상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용상에 앉은 선황은 한제가 천존열에서 보았던 허상과 겉모습은 똑같았으나 위엄과 기세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세상이 그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로 막강한 존재감이었다.
“됐다. 약천존 최강자인 네게 불손하게 굴었으니 살려준 것만으로도 자비를 베푼 셈이겠지. 현도 대신 책봉식을 진행하도록.”
“예.”
용상에 앉은 선황의 말에 거친 천으로 된 옷을 입은 청년은 몸을 살짝 숙인 뒤 대전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 상현도였군!’
한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곁을 지나쳐 가던 순간에도 상현도는 미소 띤 얼굴로 한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대전 앞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수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책봉식은 내가 진행하도록 하겠다. 이제 피를 바쳐 선도(仙道)를 열 것이다!”
국사 상현도가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순간 한 줄기 붉은 빛이 하늘로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거대한 황궁의 99개 모서리에서 요란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마치 죽음을 맞기 직전 흉수의 절규 같았다.
뒤이어 99개의 붉은 기둥이 황궁 곳곳에서 하늘로 튀어 올랐다. 한제는 각각의 붉은 기둥 안에 서로 다른 99마리 흉수의 혼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흔아홉 마리의 흉수를 죽여 그 피로 어렴풋한 선도를 여는 것인가!’
한제는 침착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99개의 붉은 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자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신비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문이 열렸다. 문 너머는 허무로 가득 차 있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붉은 기둥 안 흉수들의 혼은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허무 안으로 사라졌고 황궁은 죽음과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황궁뿐만 아니라 모든 선족 구역 전역이 그랬다. 각 종파 사람들 역시 숨을 죽인 채 붉게 물든 황궁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책봉식에는 선도를 여는 의식도 포함된다. 피를 바쳐 천외의 영혼을 끌어들이는 것. 그렇게 끌려온 천외의 영혼은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지만 선황은 그것을 죽여 피로 대지를 물들이고 그 혼을 법보로 제련해 책봉식의 주인공인 약천존에게 하사하지.’
책봉식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한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당시 명도 존은 검 형태의 영혼을 끌어들였고 선황이 그것을 죽여 한 자루 검으로 만들었지. 백발 약천존은 어떤 천외의 영혼을 끌어들일까?”
“순전히 운에 달렸지, 뭐. 이한제의 운은 어떨까?”
모든 수련자의 눈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그때, 붉은 하늘의 거대한 회오리 너머 검은 허무 속에서 곧 사자처럼 생긴 흉수 한 마리가 휙 하고 튀어나왔다.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든 흉수의 목 부분의 살점은 문드러져 있었는데 녀석이 포효를 내지를 때마다 상처에서 금빛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허무 속에서 도망치다가 돌연 나타난 회오리에 빨려들어 끌려온 것이다.
녀석의 등장에 광장의 수련자 수만 명은 분분히 탄성을 내질렀다.
“천사(天獅)다! 선조께서 봉인하셨던 천사 흉수야!”
“소문에 의하면 천사주는 천사 흉수의 황제로 만들어진 것이라 했지. 저 녀석은 털이 금빛이 아닌 것으로 미루어 황제는 아닌 모양이야. 어쨌든 성체인 것 같긴 하군!”
곳곳에서 수련자들이 수군대는 것과 달리 국사 상현도는 마치 이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침착했다.
‘선조께서 봉인을 남기신 만큼 지나치게 강한 천외 흉수는 들어올 수 없다. 저 천사 흉수도 부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을 터! 이한제, 운이 좋은 자로군!’
상현도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하늘에서는 우렁찬 포효가 울려 퍼졌다.
“캬오오오!”
심신을 뒤흔들 듯 우렁찬 소리였다. 수준이 높지 않은 자라면 천적을 만난 듯 벌벌 떨 수밖에 없을 만큼.
목에 부상을 입은 천사 흉수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했으나 이내 공포에 질린 듯 포효하며 뒤로 물러났다. 회오리를 통해 다시 빠져나가려는 듯했다.
그때, 선황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사 흉수로군.”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선도전 용상에 앉아 있던 선황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자세 그대로 남은 손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오색찬란한 불꽃 한 덩이가 선도전 밖으로 튀어나갔다. 하늘을 뒤덮을 듯 강렬한 열기를 품은 이 불꽃은 대전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장 천사 흉수에게로 돌진했다.
눈 깜짝할 사이 불바다로 변한 불꽃이 천사 흉수의 온몸을 뒤덮었다.
“크아아아!”
처연한 비명이 울렸으나 이어진 폭발음에 묻혔고 다음 순간 붉은 피가 터져 나가며 끓는 기름처럼 황궁 위로 흩뿌려졌다.
이 광경에 수많은 수련자들은 심신이 진동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꿇어앉아 선도전을 향해 절을 했다.
“선황 폐하 만세!”
“선황 폐하 만세!”
수만 명의 외침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선황의 강대함에 경외심을 느낀 것이다.
한제 역시 그 강력함에 감탄했다. 자신도 부상 입은 천사 흉수를 죽일 수야 있겠지만 혼개의 힘과 진신의 힘까지 동원해야 할 것이다. 한데 선황은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역시 대천존⋯⋯.’
그러나 한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때, 하늘을 뒤덮었던 불바다가 흩어져 사라지고 뒤이어 타오르던 하늘에서 하얀 머리카락 한 올이 내려왔다. 그 백발의 등장에 상현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상에 앉아 있던 선황 역시 놀란 눈으로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내 극화도로도 태울 수 없는 머리카락이라⋯⋯ 저것은⋯⋯?’
한제도 기이한 눈빛을 번득였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하얀 머리카락으로부터 강렬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허나 그 느낌은 착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한제가 망설임 없이 하늘로 달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선도전 안의 선황도 오른손으로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오색찬란한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나 하얀 머리카락을 쥐려 했다.
한제의 속도로 선황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으니, 이 머리카락은 결국 불꽃으로 이루어진 손바닥에 쥐어졌다.
한데 그때였다. 이 머리카락이 거대한 손바닥을 그대로 뚫고 나와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주위의 모든 이들은 거의 넋을 놓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가운데 한제가 그것을 덥석 쥐었다.
“선황 폐하, 보물을 하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뒤이어 한제는 곧장 선도전을 향해 절을 올렸다.
머리카락을 손에 쥔 순간, 익숙한 느낌은 더욱 또렷해졌다. 한제 자신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이 머리카락이 자신의 신체 일부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더구나 머리카락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머리카락처럼 양 끝이 축 처진 채 바람에 하늘하늘 날렸을 뿐이다.
잠시 침묵하던 선황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것은 네게 주려 했던 것이 아니나 원한다면 가져도 좋다.”
한제가 이미 감사 인사까지 한 마당에 수많은 수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선황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천사 흉수는 한제의 책봉식에서 소환된 존재인 만큼 그것이 죽고 나타난 것을 한제가 취한다고 해도 선황이 빼앗는 것도 이상할 터였다.
상현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피를 바치는 과정은 끝났으니 이제 책봉식의 마지막 단계다. 이한제, 이곳에 있는 누구든 네게 도전할 수 있다. 허나 그 기회는 세 번으로 제한되지. 세 번의 도전이 끝나면 선황께서 너를 책봉하실 것이다!”
국사의 말이 끝나자 아래쪽에 있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이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저택의 가주 선조들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 노인들의 수준은 모두 약천존이었다.
그중 붉은 도포를 입은 사람이 몸을 훌쩍 날려 긴 빛을 그리며 1천 척 떨어진 곳에 이르더니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내가 첫 번째 도전자가 되겠네. 백발 약천존과 한번 맞붙고 싶군!”
노인은 두 눈을 어스름하게 번득이며 한제를 바라보다가 그의 답이 나오기도 전에 허공에 가부좌를 틀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핏줄이 잔뜩 돋아난 몸에서 줄기줄기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응집되더니 거대한 그림자를 형성했다. 동시에 황궁의 하늘과 땅은 기색이 변하고 바람과 구름이 몰아쳤다.
마치 검은색 갑옷을 입은 듯 얼굴이 흐릿한 검은 그림자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광인
“이한제, 한 수 가르침을 주게!”
노인은 낮게 외치며 혀끝을 깨물어 피를 뿜어냈다. 이 피가 마치 안개처럼 검은 그림자에 뿌려지자 검은 그림자는 두 눈을 번쩍 떴다. 피처럼 붉은 눈이었다.
“키야아아!”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며 오른손을 들어 올린 검은 그림자는 검은색 창을 소환해 곧장 달려들었다.
한제는 눈을 번득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조성에 4대 왕 중 하나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극강의 힘을 담은 채 하늘을 가를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돌진해왔다. 허나 이 매서운 기세에도 한제는 물러나기는커녕 천우 혼개로 온몸을 뒤덮은 채 주먹을 휘둘렀다.
콰쾅!
주먹과 검은 그림자가 소환한 창이 충돌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한제는 휘청거리며 오른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의 앞에서는 검은 그림자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더니 갈기갈기 찢기며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