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05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노인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으나 이를 악물더니 두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그렇게 노인이 자신의 수명과 생기를 바치자 체내에서는 매우 짙은 검은색 기운이 발산됐다. 줄기줄기 기운이 흘러나올 때마다 노인은 눈에 띄게 늙어가 이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흘러넘칠 듯 짙은 검은색 기운 덕분에 검은 그림자는 완전히 회복됐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더 단단해진 듯했다. 그 상태로 어느새 생겨난 한 마리 말까지 탄 채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혼개를 착용한 채 검은 그림자가 달려드는 것을 진지하게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두 손을 머리 위에 얹더니 살짝 뒤로 굽혔던 손가락을 쏘아 보냈다.
천우당!
순간 그의 뒤로는 거대한 천우의 허상이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지르던 허상은 거대한 두 개의 뿔로 검은 그림자를 들이받았다.
콰콰쾅!
검은 그림자와 그를 태운 말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와해된 검은 그림자를 관통한 천우의 허상은 곧장 그 아래, 선도전 밖에 선 상현도를 향해 그대로 달려들었다. 마치 기가 막힌 우연처럼…
천우가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자 상현도는 덤덤한 표정으로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점을 치듯 손을 꼽다가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달려들던 천우의 허상이 바르르 진동했다.
“무(無)는 대도의 일종이다. 존재가 있어야 없어질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무다!”
그러자 그의 말을 그대로 그려내듯이 전방에 있던 천우의 허상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 순간, 한제의 두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었다. 방금 전 국사로부터 무시무시한 파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에 대한 한없이 깊은 깨달음의 파동이었다.
천우가 흩어져 사라졌을 때, 자신의 수명까지 바쳐 소환해낸 검은 그림자를 잃은 노인은 한층 노쇄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다음 도전…”
선도전 앞에 서 있던 상현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다가 어딘가를 돌아보며 미간을 홱 찌푸렸다. 수많은 수련자들 역시 같은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미간을 구겼다.
한제 역시 몸을 돌려 같은 곳을 내다보고 있었으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엇다.
“후후, 아주 겁도 없는 녀석들이구나. 이런 재미있는 일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 몸을 부르지도 않다니, 너희들의 안중에는 이 몸이 없는 게냐? 소홍, 소청, 소백, 소남! 얼른 길을 열어라!”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황궁 대전에 딸린 아홉 개의 문 너머 전송진이 번득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무리를 이끄는 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손에 부채를 든 청년이었다. 그는 화가 난 듯한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 바람에 머리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런 청년의 곁에는 창백한 얼굴의 허이국이 서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옆에 선 청의의 소년 역시 창백하게 질린 채 화려한 복장의 청년을 붙잡더니 거의 애원하듯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전하, 여기는 황궁입니다!”
“황궁이 뭐 어떻다고! 나는 왕이고 너희들은 노예다! 얼른 길을 열어!”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은 불만스럽다는 듯 자신을 붙잡은 소년을 앞으로 휙 떠밀었다.
“소홍, 이부에 갔을 때 보였던 위풍당당한 모습을 좀 보이란 말이다! 안 그러면 단단히 혼을 내줄 것이다!”
뒤이어 청년은 곁에 있는 허이국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덜덜 떨고 있던 허이국은 광장의 수많은 수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빠른 걸음으로 몇 걸음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곧장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며 그 자리에 엎어져 몇 번 움찔댔고 이후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잉? 죽었나?”
화려한 복장의 청년은 흠칫 놀라 자신의 발을 힐끗 보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 한제는 허공에 뜬 채로 멀리서 청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상대의 모습은 당시와 많이 달랐지만 한제는 그가 광인, 연도비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청년은 손에 쥔 부채를 가볍게 흔들면서 꼼짝도 않고 있는 허이국의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몇 차례 더 걷어찼다.
“흥! 죽은 척을 하는 게로군. 감히 이 몸 앞에서 죽은 척을 해? 난 이전에도 죽은 척을 하는 녀석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음, 그게 누구였더라…”
중얼거리던 청년은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깊은 고민에 빠졌으나,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한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쓰러져 있던 허이국마저 잊어버린 듯 거들먹거리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가자 광장에 모여 있던 수련자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길을 비켜주었다.
“왕을 뵙습니다!”
“왕을 뵙습니다!”
광인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한데 광인은 걷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근데 오늘 왜 이렇게들 모인 거지? 설마 형님께서 비라도 선발하시는 건가? 흠, 나 영감, 자네는 왜 이렇게 폭삭 늙었나? 왜 그리 시들시들해? 곧 관짝에 들어갈 몰골이잖아?”
방금 한제에게 도전했던 노인 앞에서 멈춰 선 청년은 두 눈을 끔뻑이다가 버럭 외쳤다.
“감히 누가 우리 소화의 할아비를 이런 꼴로 만든 거냐? 너냐? 아니면 너야? 젠장할, 내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겠어! 나 영감, 말해 봐! 누가 자네를 이 모양으로 만든 거야?”
화려한 복장의 청년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호통을 쳤다.
“저 녀석인가? 저 녀석이지? 저놈 저거 전부터 맘에 안 든다 했어! 나이 처먹고도 애처럼 꾸미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고! 내 너를 목 졸라 죽일 것이야!”
광인은 선도전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국사를 가리키더니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죽일 듯한 자세로 달려들려 했다. 그러자 광인 뒤에 있던 푸른 옷의 소년이 황급히 광인의 다리에 황급히 매달렸다.
“전하, 전하! 구, 국사입니다! 전하, 제발! 제발 돌아가시지요!”
“놔라! 저자가 소화의 할아비를 괴롭혔는데 내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 놓아라! 놓지 않으면 네놈도 혼을 내줄 것이다!”
광인은 다시금 부채를 흔들며 거친 표정으로 외쳤다.
허공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한제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바로 오랜 벗이 과연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청년의 모습을 한 광인은 끊임없이 부채를 휘두르면서 자신의 다리에 소년을 그대로 매단 채 선도전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이국은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있었지만 살며시 눈을 떠 광인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더니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연도비!”
화려한 복장의 청년이 막 상현도 앞에 이르러 그 목을 조르려는 순간, 선도전 안에서 선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비를 선발하는 자리에 나를 초대하지도 않고⋯⋯ 너, 너무한 거 아닙니까?”
광인은 선도전 안 용상에 앉은 선황을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연도비, 소란 일으키지 마라. 지금은 네 은인의 책봉식을 거행하는 중이다. 얼른 네 은인에게 인사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게냐?”
선황의 목소리에 실린 부드러운 힘에 광인은 상현도로부터 수백 척 정도 밀려났다.
“은인?”
광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은인! 정말 내 은인이로군!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그 은인이 왔다고?”
허나 광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제를 보고도 시선을 휙 돌렸다.
“어디 있지? 형님, 누가 제 은인입니까?”
묵묵히 광인을 지켜보던 한제는 상대의 두 눈에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내려와 그 앞에 섰다.
“광인…”
그리고는 작게 입을 열었다.
“광인? 감히 누구에게 광인이라는 게냐! 네게 이 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보여주지!”
광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우렁차게 외쳤다.
“어어… 설마 네가 내 은인은 아니겠지?”
그러다 그는 눈을 비비며 한제의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푸른 옷을 입고 있던 소년은 어느새 한쪽에 얌전히 서 있었다.
“좋다. 그건 상관없어. 그럼 내 은인인 네가 한 번 말해 보아라. 누가 우리 소화의 할아비를 저 모양 저 꼴로 만들어 놓았지? 뭐, 분명 저놈이겠지만 말야!”
광인은 저 멀리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상현도를 가리키며 한제에게 물었다.
“연도비, 더는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한 번만 더 그렇게 경거망동을 한다면 너를 다시 가둬둘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는 책봉식이 거행되고 있고 나공은 네 은인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했을 뿐 국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러니 이만 물러나라!”
“응?”
광인은 놀란 듯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리다가 곁에 있는 청의의 소년을 덥석 잡아끌었다.
“네가 좀 설명해다오. 난 도무지⋯⋯ 소화의 할아비가 국사에게 맞아서 저렇게 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한 짓이란 말이냐? 저자가 내 은인께 도전을 했다고? 이해가 안 되는구나. 얼른 설명을 좀 해봐!”
청의의 소년은 씁쓸한 표정으로 한제와 광인을 번갈아 살피다가 거의 귓속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희는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그렇지! 저희는 단약을 제련하는 중 아니었습니까?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그 단약은 못 쓰게 되어 버릴 겁니다. 그건 해자 천존에게 주겠다고 제련하시던 단약 아닙니까?”
“단약? 단약… 그래, 맞아! 난 단약을 제련하는 중이었지!”
잠시 멍해 있던 광인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곧장 돌아 서서 떠나려 했다. 그러나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금 푸른 옷의 소년에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아니다! 난 소화의 할아비가 저 모양 저 꼴이 된 걸 기억하고 있어! 너, 너⋯⋯ 음, 소홍! 죽은 척은 그만두고 얼른 소화의 할아비를 때린 자를 알아내라. 그러면 상을 내릴 것이다!”
청년은 부채를 펼친 뒤 멀리 떨어진 곳에 여태 엎어져 있는 허이국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두 눈을 번쩍 뜬 허이국은 곧장 벌떡 일어나 아첨하듯 샐샐 웃으며 포졸처럼 재빨리 달려와 쓰게 웃고 있는 나씨 가문 노인을 바라보았다가 한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제와 눈을 마주친 순간, 허이국은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 기인하는 경련이었다. 멍한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며 그는 상대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만 같은 몽환적인 익숙함을 느꼈다.
“살인마⋯⋯ 주인…”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던 허이국의 기억이 막 깨어나려던 순간, 광인이 그의 어깨를 덥석 쥐고 강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린 허이국은 창백한 얼굴로 한제를 가리키며 뒤로 허둥지둥 물러났다.
“저, 저자입니다. 전하, 저자가 소홍의 할아버지를 때렸습니다!”
“그래, 역시 너였구나!”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른 광인은 부채를 흔드는 것도 멈춘 채 거칠고 매서운 표정을 드러낸 채 두 손으로 한제의 목을 움켜쥐었다.
“너를 죽일 것이다! 너를 목 졸라 죽일 것이야!”
한제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감겨진 두 눈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광인이 동부계에서의 기억을 잃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눈보라에 숨겨진 살기
“연도비, 물러나라!”
선도전 안에서 노기를 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대전 밖으로 걸어 나온 선황이 손을 휘두르자 한제의 목을 조르고 있던 광인은 마치 버들잎처럼 뒤로 휙 밀려났다. 그러자 청의의 소년과 허이국은 황급히 광인을 뒤쫓았다.
“금병들은 연도비를 황궁 밖으로 내쫓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선황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낮게 외쳤다.
“기다려라! 감히 소홍의 할아비를 다치게 하다니, 너를 똑똑히 기억해둘 것이야!”
광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끄무레하게 밝혀진 전송진의 빛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