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08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한제에게서는 짙은 살기가 풍겼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반드시 상대의 숨을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긴 거리에 몰아치는 눈보라 속, 허공에서 나타난 손가락과 한제가 뻗은 손가락이 맞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 체내 고조의 혼혈로 이루어진 도고의 힘이 가장 먼저 뿜어져 나왔다.
콰쾅!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고 다섯 개의 신맥으로 소환된 아흔여덟 개의 잔상과 혼개의 힘까지 더해진 두 번째 위력이 발휘됐다.
고요했던 공간은 천둥처럼 요란한 소리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한제를 돕기 위해 달려오던 해자 천존은 그 충격에 심신이 진동했고 더는 앞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한제를 공격하려 했던 손가락 역시 멈칫했는데 그 위로는 핏줄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한제의 반격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한제의 오행 진신과 천둥번개의 진신, 그리고 뒤에 세 개의 회오리로 나타난 허상의 본원이 일제히 한데 모여들어 융합해 세 번째 충격으로 뿜어져 나간 것이다. 그 안에는 한제가 평생에 걸쳐 깨달은 도가 깃든 셈이었다.
콰르릉!
거대한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사이 한제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그는 손을 거두기는커녕 낮은 기합을 내지르며 손을 더욱 앞으로 뻗었다.
그렇게 결국 한제의 허상의 분신으로부터 기인한 네 번째 위력까지 뿜어져 나왔다.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그 위력과 음도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진에서 반짝이는 금빛까지 한제의 손가락을 뒤덮었다. 이제 한제의 손가락은 완전한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발휘한 최강의 공격은 허공에서 나타난 상대의 손가락을 순식간에 터뜨려 버렸다.
퍼펑!
하지만 그 찰나, 누군가의 침착하고 덤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실이 있어야 새롭게 응집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유(有)다!”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무너져 내렸던 손가락은 빠른 속도로 다시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제의 손가락과 다시 충돌했다.
“존재가 있어야 사라질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공(空)이다!”
손가락끼리의 두 번째 충돌이 발생한 순간, 한제의 손가락에 담긴 도고의 힘은 기이하게도 사라져 버렸고 그의 신맥에 응집된 신통술과 천우 혼개의 위력 역시 사라졌다. 심지어 오행 진신과 천둥번개 진신도 이 기이한 힘 아래 연기처럼 흩어졌다. 바람에 날려 존재에서 허무로 바뀌게 된 것처럼 또는 무(無)가 된 것처럼.
하지만 세 개의 허상의 본원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본원들은 한제가 가진 최초의 본원이자 그가 평생에 걸쳐 얻은 깨달음이었다. 도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거짓과 진실에 대한 이 깨달음은 어떤 힘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었다.
때문에 허무의 분신에게서 기인하는 금빛 역시 흩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한제는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다가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진을 형성하고 있던 음도의 조각들이 금빛을 번득이며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가 세 번째로 다시 응집되려 하는 손가락으로 달려들었다.
꽝!
음도의 조각과 충돌한 손가락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가 다시 네 번째로 응집되려는 조짐을 보였다.
그 사이 한제는 엄청난 속도로 몸을 날려 길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그곳은 이곳에 설치된 봉인의 가장자리이기도 했다. 이곳을 뚫고 나가기만 하면 한제는 이 거리에서, 그리고 이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이른 순간 길 양옆에 늘어선 집들 위로 돌연 파문이 일더니 1백 개에 달하는 흐릿한 허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손에 든 활을 당겨 한제를 겨누고 있었다. 거리에 몰아치던 눈보라는 1백 갈래로 나뉘더니 화살로 응집됐다.
눈보라의 화살이 완전히 응집되자 이들은 화살에 피를 뿜어냈다. 그러자 이들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비쩍 말라 갔다. 마치 내뱉은 피에 그들의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담겨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제의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었다. 여태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겼지만 이 정도의 위기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위기들에서 그를 죽이려던 자들은 직접 나선 반면 지금 그의 적은 다른 이들을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이내 눈 깜짝할 사이 백여 명의 수련자들은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 심지어 뼈조차도 남김없이 재로 변한 그들은 죽기 직전에 활시위를 놓았고 이에 그들이 사라진 순간 1백 발의 화살이 발사됐다.
쉭!
붉게 물든 화살들이 긴 빛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로서는 피할 틈이 없었다.
“크아아!”
한제는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지르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바깥쪽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백발은 산발이 되고 옷자락은 훅 부풀어 올랐으며 두 눈에서 금빛이 강하게 번득였다. 그리고 그의 뒤쪽으로 금빛 태양이 하나 떠올랐다.
이 태양이 등장한 순간, 거리는 사라지고 주위는 어두운 바다로 변해버렸다. 뒤이어 철썩이는 바닷물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침 해가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잔야!”
잔야의 위력에 한제를 향해 몰려들던 1백 대의 화살은 어둠 속에 녹아든 듯 잔야력에 휩쓸렸고 그로 인해 콰쾅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한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 모든 어둠이 빛 아래 소멸될 것을 믿는다!
난 모든 존재가 아침 해 아래 허무가 될 것을 믿는다!
난 모든 공과 무가 윤회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 사이 한제의 뒤로 나타난 금빛 태양은 전보다 훨씬 강한 빛을 뿜어냈고 1백 대의 화살은 하나하나 무너져 내렸으며, 네 번째로 응집됐던 손가락은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렸다.
잔야력을 발휘해 태양이 된 한제는 곧장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기세에 어둠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허공에서 나타났던 손가락 또한 태양과 충돌한 순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콰쾅! 쾅!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잠시 후, 사방의 빛은 흩어져 사라지고 곧 모든 것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곳은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길거리였다. 하지만 한제의 옷에는 길게 찢긴 자국이 일곱 개나 나 있었다. 잔야력 아래에서도 소멸되지 않은 일곱 대의 화살에 꿰뚫린 것이다.
피를 토하며 몇 걸음 물러난 한제는 주먹으로 거리의 봉인을 후려쳤다.
쾅!
그의 주먹질 한 번에 허공에는 곧장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균열이 계속해서 확산되자 엎어놓은 사발처럼 거리를 감싸고 있던 봉인이 드러났다. 그리고 균열 너머 검은색 도포를 입은 수련자 수만 명이 가부좌를 튼 채 겹겹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모종의 힘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거리를 봉인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넌 도망치지 못한다!”
덤덤한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너져 내렸던 손가락이 다시 나타났다.
“너를 죽이기 위해 난 우리 종파의 가장 강력한 힘을 동원했다.”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거리 위 허공에 나타났던 균열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한제가 보았던 봉인 너머의 광경은 흐릿해지는 듯하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한제의 시야에서 완전히 가려지기 직전, 이 수만 명의 수련자 중 수백 명은 고개를 번쩍 쳐들며 단약을 삼켰다. 그러자 육신이 무너져 내린 그들의 원신만 연기처럼 봉인된 거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리 위에는 수백 개의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천존 수준의 위력을 발휘하며 죽음도 불사한 채 달려들었다.
한제의 눈빛은 덤덤했지만 그 안에는 음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백 개의 인영을 향해 몸을 홱 돌린 그는 그들 너머에 다시 응집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가락은 허공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나 역시 이곳을 떠날 마음도 없다. 함정을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희 모두를 죽이는 거니까.”
순간 한제의 백발이 기이하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뿌리 부분에서는 검은빛이 도는가 싶더니 점차 검게 변해가기까지 했다. 또한 그의 두 눈에는 무정함과 냉정함이 어려 있었다. 세상 어떤 것에도 아무런 감정조차 품지 않은 듯한 눈의 한제는 영원히 녹지 않을 눈처럼 서늘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너희가 자초한 일이다!”
두 눈을 감았다가 번쩍 뜬 한제는 마치 전선 같았다. 지금 그는 체내 살육의 천둥번개 본원에게 처음으로 주도권을 내어준 상태였다.
살육의 천둥번개 본원에 담긴 금제의 본원과 태초의 본원까지 풀어놓은 것 역시 처음이었다. 덕분에 그는 살육과 묵멸을 폭발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살육의 고함과 묵멸의 포효가 한데 융합되어 세상 만물을 파괴할 듯한 살육의 천둥번개를 형성했다.
이 천둥번개는 세상 모든 어둠의 원천이자 모든 죽음과 파멸의 상징이었다.
한제의 두 눈에서는 더 이상 금빛은 발산되지 않았다. 그저 시커먼 어둠만이 가득했다. 이 어둠은 그의 눈동자만을 채운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까지 빠른 속도로 검게 물들였다.
“지금 상태로는 천존열의 첫 번째 궁전이나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 미소를 본 이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미소에 담긴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잔혹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해자 천존은 한제의 미소를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알고 지낸 한제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마치 천적을 마주한 것처럼 원초적인 두려움까지 느껴져 그녀는 덜덜 떨며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났다.
허공에 나타난 손가락 역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손가락의 주인이 겁을 집어먹기라도 한 것처럼.
“살육을 시작하지.”
흑발을 휘날리며 훌쩍 튀어 오른 한제는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수백 개의 인영에 맞서 달려 나갔다.
콰쾅!
그의 체내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무수히 많은 검은 번개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수백 개의 인영은 본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 죽음을 대가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정 역시 거의 사라진 존재들이기도 했다.
허나 흑발의 한제가 검은 번개에 휩싸인 채 다가오는 모습을 본 순간, 그들의 심신은 크게 진동했다. 하지만 퇴로가 없는 그들로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흑발의 한제
흑발의 한제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띤 채 광기 어린 눈빛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꽈르릉!
검은 번개가 순식간에 퍼져 나가면서 거대한 그물을 형성했다. 이 그물은 순식간에 선두의 수십 명을 뒤덮었다. 그 순간 그들은 자폭을 했고 막강한 기운이 번개의 그물을 휩쓸었다.
한데 어찌된 일일까? 기이하게도 온 세상을 다 파괴할 수 있을 듯 강력한 폭발의 기운은 순식간에 사그라졌고 반대로 번개의 그물은 더욱 불어났다.
이어서 그물과 닿은 이들은 바르르 경련하다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최후였다.
한제는 수백 명의 적을 마주하고도 바람처럼 가볍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나아가며 끊임없이 온몸으로 천둥번개를 발산했다. 이 천둥번개에 닿은 사람들 역시 요란한 콰쾅 소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한제는 한 흐릿한 인영 뒤로 나타나 상대를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순간 검은 번개가 번득였고 그의 손이 닿은 수련자는 움찔하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한제는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피곤함 따위 모른다는 듯, 고통 따위 알지 못한다는 듯. 수련자들의 자폭으로 형성된 위력이 닥쳐와도 멈추지 않았다.
“진을 형성하라!”
눈 깜짝할 사이 절반 이상이 죽어나가자 남은 수련자 중 한 사람이 낮게 외쳤다. 그의 외침에 남아 있는 수련자들이 모여들어 기이한 진을 하나 형성했다. 그리고 진이 완성된 순간, 대지가 바르르 진동하면서 어마어마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기운은 백여 명의 수련자로 이루어진 진 안으로 몰려들면서 거대한 손바닥의 허상을 이루었는데 이 검은색 손바닥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흑발의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를 움켜쥐려는 듯했다.
한제는 싸늘하게 웃더니 두 손을 들어 올려 수백 개의 검은 번개를 소환했다. 그 안에 담긴 파괴와 살육의 힘은 줄기줄기 검은 연기가 되어 한제를 뒤덮었다.
이에 그는 무수히 많은 번개로 이루어진 유성처럼 변하더니 곧장 그 손바닥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콰쾅!
엄청난 위력에 손바닥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그것을 이루고 있던 1백여 명의 수련자 역시 죽음을 맞았다.
잠시 후, 무너진 손바닥 안에서 걸어 나온 한제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두 눈에는 전보다 짙은 광기가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