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10
한데 구제 대천존은 한제를 우습게 여기기는커녕 매우 진중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고 하늘을 가득 뒤덮은 듯했던 눈보라가 순식간에 응집되어 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이 되었다. 구제 대천존은 한제를 향해 그 검을 휘둘렀다.
“난 파괴를 대표하고 살육을 장악했다.”
한제는 중얼거리며 자신에게 날아든 거대한 검에 주먹을 날렸다.
콰쾅!
주먹과 검이 충돌한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으로 이루어진 검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한제의 육신 역시 와해됐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검은 기운으로 갈라진 그는 뒤로 나가떨어지는 듯하다가 곧장 방향을 틀어 다시 구제 대천존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본 구제 대천존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대량의 검은 기운이 몰려든 순간 두 손으로 원형 결인을 하나 그렸다. 그러자 그 결인에서는 극강의 섬광이 번득이며 뿜어져 나와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고 검은 기운과 충돌했다. 어둠에 맞선 빛은 눈 깜짝할 사이 흩어져 사라졌지만 구제 대천존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두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앞으로 몰려든 검은 기운은 결인에서 발산된 섬광을 뒤덮고 다시 하나로 응집돼 흑발의 한제가 됐다.
“넌 나를 이기지 못한다!”
구제 대천존은 그런 한제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외쳤다. 늙은 얼굴은 어느새 중년의 모습으로 변할 조짐을 보였다.
“넌 살육과 파괴 앞에 숨을 수 없다.”
흑발의 한제가 입을 열었다.
“백발 약천존, 흑발 약천존⋯⋯. 이한제, 내가 너를 얕잡아봤구나. 해자 천존은 이번 일에 무고하게 끌려왔을 뿐이다.”
구제 대천존이 허공을 움켜쥐자 손바닥만 한 금색 조각이 나타났다.
“난 너를 관찰하다가 이 검의 흔적을 본 적이 있다. 이 조각이 더해진다면 금속의 본원을 완성할 수 있을 터! 이것을 줄 테니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지.”
구제 대천존은 손에 쥐고 있던 조각을 한제에게 던졌다. 휙 날아간 조각은 한제의 앞에 둥둥 떠 있었다.
선극검 조각을 넘긴 구제 대천존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제를 슥 살핀 뒤 돌아섰다. 그리고는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해자 천존과 함께 떠나갔다.
긴 거리를 에워싸고 있던 봉인은 이미 사라졌지만 사방의 폐허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곧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에서 태양이 떠오르며 점차 어둠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흑발의 한제는 한참이나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지않아 햇살이 동쪽으로부터 멀리까지 퍼져 나가면서 어둠을 완전히 몰아냈다.
빛의 파문이 거리를 가득 채웠을 때까지도 여전히 꼼짝 않고 있던 한제는 그 빛의 파문이 점차 다가오다가 결국 자신을 뒤덮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빛에 휩쓸리면서 한제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에서 하얀색으로 점차 변해 갔고 냉혹함과 서늘함이 사라지더니 피곤함과 쓸쓸함으로 대체됐다.
한제는 지금껏 어떠한 방법으로도 본체를 장악한 살육을 억지로 제압하지 않았다. 살육이 강림했을 때는 그 어떤 것으로도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난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백발의 이한제,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는 흑발의 육묵이다. 이는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바꾸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어. 허무에 남겨둔 분신의 힘이 있어서 다행이군. 약간이나마 살육을 억제해 의식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흑과 백은 한제의 몸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터였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해자 천존에 대한 생각을 접고 눈앞에 떠 있던 선극검 조각을 챙겼다. 뒤이어 던져 놓았던 천우 혼개도 거두더니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떠나야겠군. 이제 더는 선족 구역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아.”
한제의 모습은 곧 세상을 가득 채우며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사라졌다.
★ ★ ★
눈은 이틀 뒤까지 이어진 뒤에야 겨우 멈추었다. 오랫동안 내린 눈이 두꺼운 이불처럼 대지를 뒤덮었다.
이른 아침, 한제는 유금표와 해룡을 이끌고 동성의 성문 밖에 서서 가만히 조성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유금표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두 개의 인영을 보고 잔뜩 흥분했다. 두 사람 중에는 붉은 옷을 입은 허이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이국은 멍한 표정이었다. 며칠 동안 내내 느껴진, 무언가가 부르는 듯한 느낌을 따라 오늘 아침 동문으로 걸음을 옮긴 터였다.
그의 곁에는 광인이 거들먹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가 허이국과 함께한 것은 그 또한 허이국처럼 무언가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가시고 짜증나는 이 느낌이 대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확인할 참이었다.
“허! 너로구나! 젠장할, 감히 이 몸의 눈앞에 또 나타나다니!”
광인은 멀리서 한제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곧장 달려들었다.
허이국 역시 한제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허이국. 난 떠날 것이다. 이곳에 남겠느냐, 아니면 나를 따르겠느냐!”
자신에게 달려드는 광인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한제는 곧 허이국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허이국의 심신으로 파고들어 머릿속에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그러자 기억을 가두고 있던 봉인이 풀렸고 허이국은 전생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게 됐다.
허이국은 덜덜 떨며 멍하니 한제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하나의 장면에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마혼으로 제련한 한제와 그런 한제를 수천 년 동안 따랐던 사실, 그 밖의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주, 주인님!”
허이국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놀라움과 기쁨이 담긴 표정으로 부랴부랴 다가왔다. 심지어 광인을 앞지르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제 옆에 서 있던 유금표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허이국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유금표는 어이가 없는 듯 멍하니 허이국을 쳐다보았고 허이국은 습관적으로 아첨하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인님! 드디어 주인님을 찾았군요. 이게 얼마만입니까? 저는 매일 밤 꿈속에서 주인님을 만나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면서도 언제쯤 주인님을 다시 뵐 수 있을지 몰라 슬퍼하곤 했답니다.
주인님, 주인님에 대한 제 충성심은 흐르는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바뀐 생에도 스러지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영원히 제 주인님이시니까요!”
허이국은 마치 준비된 대사를 읊듯 막힘없이 아부를 이어갔다.
“주인님, 부디 저를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평생 주인님을 따를 것입니다. 칼로 이루어진 산을 오르더라도 불바다에 빠지더라도 이 허이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님, 비록 이번에는 주인님을 조금 늦게 만나기는 했으나 저는 주인님을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모신 사람 아닙니까?
그저 운이 좋아 주인님께 먼저 발견된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주인님에 대한 제 충정을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인님, 마침내 제가 주인님을 찾았습니다!”
허이국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면서도 눈을 깜빡여 억지로 눈물 몇 방울을 짜냈고 그 광경을 유금표는 입을 쩍 벌린 채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 허이국은 그 와중에도 음흉한 눈빛으로 유금표를 힐끔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인님의 첫 번째 노예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후후, 누구도 나보다 이한제 이 녀석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 시덥잖은 속임수나 부리고 다니기 바빴던 유금표 네 녀석이 감히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젠장할, 아까 저 녀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보다 먼저 이한제에게 발견된 걸 아주 자랑스레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해! 흥! 때를 봐서 녀석에게 가르침을 줘야 할 것 같군. 이 허이국은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단단히 각인시켜놔야겠어!’
허이국의 눈빛에 유금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생에 상대로부터 받았던 온갖 수모와 괴롭힘은 아직도 그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돌연 누군가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포효를 내지른 것은 손가락만 한 굵기로 줄어들어 있던 해룡이었다. 유금표의 어깨 위에 엎드려 있던 녀석은 허이국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악의가 가득한 눈으로 허이국을 노려보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엇! 저 뱀 같은 놈이 왜 저러는 것이냐?”
해룡의 포효에 허이국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하! 다행히 난 미리 준비를 해두었지. 해룡이 있는 한 허이국 네가 내게 뭘 어쩔 수 있을 것 같으냐!’
자신감을 되찾은 유금표는 오른손으로 해룡의 등을 쓰다듬으며 도발하는 듯한 눈빛으로 허이국을 쳐다보았다.
한제는 허이국과 유금표 사이에서의 불꽃 튀는 신경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방금 전 허이국의 말에 놀란 듯 멍하니 서 있는 광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무렵, 광인은 한제에 대한 짜증은 어느새 잊은 듯,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의 허이국을 바라보았다.
“소홍! 소홍 너… 너 방금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 주인이라고? 왜 갑자기 주인을 바꾼 것이냐? 네 주인은 나냐, 아니면 저 녀석이냐?”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다가서며 광인이 허이국을 살짝 잡아당겼다.
허이국은 그제야 자신이 혼자 온 것이 아님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돌려 광인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되찾은 그는 광인을 바라보는 눈빛 역시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 눈빛은 오히려 동부계에서 유금표와 합심하여 광인의 피를 빼돌리려 했을 때와 비슷했다.
“이 손 놔라! 이 허 영감에게 주인은 오직 한 명뿐! 이 살인⋯⋯마처럼 보이지만 용감무쌍하신 주인님이시지!”
말을 마친 그는 얼른 한제를 힐끗거리며 속으로 식은땀을 훔쳤다. 하마터면 한제 앞에서 그를 살인마라고 칭할 뻔하다니, 위험천만이었다.
“그러니 썩 꺼져라! 다시는 이 허 영감을 귀찮게 굴지 마라!”
얼른 광인의 손을 떼어내고는 몇 걸음 물러난 허이국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쳐들며 자신의 충성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똑똑히 드러냈다.
그러자 광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다가 두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 소화의 할아비를 때리고 내 소홍까지 빼앗아가다니! 내 소홍! 소홍아!”
광인은 곧장 달려들어 한제의 목을 조르려 들었다.
한제는 그런 광인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도비, 내가 조성에 온 것은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허나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아마도 동부계에서의 일을 그저 한바탕 꿈으로만 여기고 있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난 이만 떠나겠다.”
산에 사는 호랑이
한제는 두 눈을 감은 채 광인이 자신의 목을 조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부드러운 힘 한 줄기가 뿜어져 나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광인을 뒤로 수십 척 정도 밀어냈다. 이어서 두 눈을 번쩍 뜨며 돌아선 한제는 성 밖의 평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허이국과 유금표는 광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얼른 한제를 따라붙었다. 한제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의기양양한 표정의 유금표와 달리 허이국의 표정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유금표의 어깨 위에서 해룡이 악에 받친 눈빛으로 그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할, 내게는 눈이 한 쌍 밖에 없지만 저 빌어먹을 유금표와 뱀은 두 쌍이나 되지 않는가! 마땅한 방법을 생각해내야 해. 그러지 않으면 후에 이 자리를 보전하기는 어려울 터.’
허이국은 속으로 읊조렸다.
한편, 광인은 세 사람이 먼 곳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홍, 소홍아, 어찌 이렇게 떠난단 말이냐! 빌어먹을 녀석, 이 몸의 소홍을 빼앗아가다니. 형님께 일러야지. 아니야, 스승님께 알려야겠어! 후후, 우리 스승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데? 저자는, 저자는…”
한데 광인이 문득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어 저 멀리 나아가고 있는 백의의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한제…”
뒤이어 광인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머릿속에 찍혀 있는 봉인이 느슨해지려는 조짐을 보이면서 무언가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동부계, 이한제, 허무, 각성…”
광인이 계속해서 몸서리를 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그 화면 속, 그는 눈앞의 상대를 구하고 그와 함께 한바탕 꿈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팔에 찍힌 손바닥 문양의 흔적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올린 광인은 자신의 팔을 살폈다. 그러자 깨끗하기만 했던 팔에 돌연 하나의 손바닥 문양이 드러났다. 마치 누군가가 한참이나 그의 팔을 움켜쥐면서 생긴 흔적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