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12
쓰러진 수만 명의 금병은 경악한 듯 넋이 나가 있다가 검은 구름이 된 한제가 훑고 지나가자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컥!”
수만 명이 내지르는 비명을 뒤로 한 채 황궁 광장에 이른 검은 구름은 다시 응집해 흑발 한제가 되었다. 그의 뒤로는 수만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 시체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재로 흩날려 사라졌다.
황궁 곳곳에서 몰려든 수련자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찬 숨을 들이켰다. 창백한 얼굴은 온통 두려움으로 물든 채 그들은 모두 한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족의 황궁에 검은 눈이 내린 것은 처음이겠지.”
담담하게 중얼거린 한제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더니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황궁의 상공이 어두워졌고 하늘에서는 검은 눈이 내렸다. 세월의 노래처럼 내리는 눈송이에 거대한 황궁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부식하기 시작했다.
한데 바로 그때, 저 멀리 황궁 안쪽의 거대한 선조 조각상으로부터 금빛이 뿜어져 나와 파문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위를 뒤덮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의 파괴도 허락하지 않는 황궁 내 최강의 진이었다.
금빛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선조 조각상의 머리 위에는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그의 시선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제에게 닿아 있었다.
“이한제!”
입꼬리에 미소를 내건 그는 국사 상현도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걸음을 내딛었다. 순간 황궁은 또 다른 공간과 중첩되는 듯했고 국사는 단번에 한제로부터 1만 척 떨어진 대전 지붕 위에 이르렀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드디어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구나!”
한제는 상현도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는 선황과 쌍자 대천존이 맞붙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대천존끼리는 승부를 가르기 어려웠지만 쌍자 대천존이라면 한제가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선황을 충분히 막아설 수 있을 터였다.
허나 황궁에는 선황 외에도 수준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국사 상현도였다.
한제는 말없이 오른발로 대지를 쿵 하고 굴렀다. 우렁찬 소리에 사방으로 모여들었던 수련자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고족 수련자들과는 달랐다.
고족 수련자는 종파 없이 고조 사당과 세 개의 황국만 둔 채 황권에 광적인 충성심을 보였지만 선족에게 황권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실제로 선족의 실질적인 세력은 몇몇 대천존과 강력한 종파가 거머쥐고 있었다.
한제가 발을 구른 곳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주위로 나타난 균열은 순식간에 뻗어 나가며 땅을 뒤덮으면서 상현도가 있는 대전을 향해 몰려들었다.
수많은 균열이 각각 한 마리 용처럼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자 상현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크게 휘둘렀다.
“세상 모든 것은 무가 될 수 있지.”
그 순간, 대전 아래로 뻗어오던 균열은 상처가 아물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길거리에서 내 손에 죽은 자는 네가 아니었다!”
고개를 든 한제는 상현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죽인 사람은 나이기도 내가 아니기도 하지!”
상현도는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펼쳤다. 손바닥 안에서 나타난 것은 하얀 빛을 발하는 작은 사람이었다. 이 작은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상현도를 향해 꿇어앉았다.
“넌 일찍이 대혼문에서 이 술법을 배웠겠지. 혼연도와 도연혼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상현도가 손을 휘두르자 손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찧던 작은 사람은 곧장 몸을 훌쩍 날리더니 허공에서 불어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보통 사람의 크기가 된 그는 그대로 한제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세상에 녹아든 이 작은 사람은 어느새 한제 근처에 이르렀지만 한제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더니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달려들던 하얀 인영이 번득이는 파문과 함께 붙잡혔다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어째서지?”
한제는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넌 동부계에서 처음으로 빠져나온 존재다. 동부계라는 것은 선족에도 고족에도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하지. 처음에는 그런 공간을 여는 데 쓰이는 신통술 같은 건 없었어. 선조도 고조도 그런 신통술을 알지는 못했지. 동부계라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신통술은 사실 우리 종족만 가지고 있었던 술법이거든!”
상현도는 딱히 비밀이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조를 따르기로 한 우리 종족은 그 술법을 선조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선강 대륙에서 자격을 가진 종파들은 각자 동부계를 하나씩 열 수 있었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수없이 많은 동부계가 만들어졌고 그런 동부계들은 우리 종족을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향불을 제공했다. 향불은 다른 사람에게도 쓸모가 있겠지만 우리 종족에는 더욱 더 큰 쓸모가 있지.”
말을 이어가는 상현도의 두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향불은 본래 우리 종족의 것이다. 한데 향불을 흡수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우리 종족의 외래 구성원이 될 수 있지. 다만 그들은 향불을 더 이상 제공받지 못하면 반드시 죽게 돼.”
한제는 말없이 국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향불은 독이자 보약이다! 뭐, 이건 그리 큰 비밀도 아니지.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것 같군. 허나 오직 너만이 허무를 관통하면서, 환생이 아닌 방법을 통해 동부계의 육신을 가지고 그곳을 빠져나온 거야. 있을 수도 있었던 적도 없는 일이지!”
상현도의 두 눈에 담긴 흥분의 빛은 점점 더 깊어져갔다.
“넌 우리 종족과 마찬가지로 선강 대륙에 속하지 않는 존재지. 우리 종족의 신통술을 통해 선강 대륙에서 창조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어.”
상현도는 말을 마치면서 결인을 그린 오른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황궁은 돌연 왜곡되기 시작했다.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뒤바뀌면서 궁전 역시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한제는 위치가 변한 것이 아니라 공간만 바뀐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황궁 안에 아주 오래전부터 모종의 신통술로 황궁과 매우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이곳은 황궁인 동시에 황궁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인 셈이었다.
매우 넓은 대전이었다. 대전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들은 각각 아홉 덩어리의 어스름한 화염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빛은 대전 안쪽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기둥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화염 덩어리 안으로 눈을 감고 있는 얼굴들이 흐릿하게 비쳤다.
상현도는 멀리 떨어진 곳의 산 모양 제단 위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대전 지붕 위에 서 있던 그의 위치에도 역시 변함은 없었다.
그가 서 있는 제단 앞에는 피처럼 붉은 물이 가득한 거대한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명도 존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두 눈을 꼭 감은 그는 극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 듯 온몸에 핏줄과 힘줄이 잔뜩 돋아 있었다. 그런 그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아주 오래된 기운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한편, 제단은 아홉 개의 기둥으로 에워싸여 있었고 그 기둥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갈색 사슬은 제단 상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각 기둥과 연결된 사슬은 중앙에서 맞닿은 채 한 사람을 칭칭 감고 있었다. 사슬에 몸 곳곳을 관통당한 채 얽혀 있는 화려한 복장의 그는 정신을 잃은 듯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다름 아닌 광인이었다.
“선조는 이 황궁을 지을 때 지하 궁전을 만들어달라고 우리 종족에 부탁했지. 이곳의 모든 구조는 황궁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상현도는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혼수상태에 빠진 광인을 바라보던 한제가 입을 열었다.
“너와 선황이 그렇게까지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려 한 이유가 대체 뭐지?”
한제의 질문에 상현도는 불쑥 되물었다.
“선조의 힘을 손에 넣고 싶지 않은가?”
상현도는 한제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선조는 무궁무진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 네가 하나만 약속한다면 네가 선조의 힘을 이어받게 해주마. 그럼 너는 선강 대륙의 최강자가 될 수 있어!”
한제는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상현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선황은 아주 오랫동안 반조법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을 성공적으로 파악하기만 한다면 선조와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있지 제2대 선조가 되는 거다! 내게 하나만 약속해라. 그럼 선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네가 그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해주겠다!”
상현도는 입술을 핥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네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우리 종족을 위해 향불을 제공해주던 동부계에서 빠져나왔…”
“하! 이제 보니 넌 조성에서 나갈 수 없는 게로군!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황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거야!”
한제는 상현도의 말을 끊고는 비릿하게 웃으며 외쳤다. 상현도는 표정이 급변하더니 한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한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를 한 번만 믿어다오
한참 뒤, 상현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눈치가 빠르군. 네 말이 맞다.”
국사 상현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선조는 강했지. 아주 강력했어. 우리 종족은 그 힘 앞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향불을 우리 것으로 제련해 그에게 그대로 바쳐야 했지. 뿐만이 아니라 그는 우리 종족들에게 대대로 전승되는 봉인을 남기기까지 했어.
그래서 우리 종족은 영원히 조성을 떠나지 못하는 처지가 됐고 말도 극히 조심해야 했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선황의 손에 우리 종족의 생사가 달려 있으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자조하듯 비릿하게 웃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황궁을 빠져 나가려고 하면 예외 없이 죽음을 맞게 됐다! 우리 종족이 자랑하는 천재였던 대혼문의 선조 역시 이곳을 떠난 뒤 죽음을 면치 못했지. 그러니 우리 종족은 대대로 선황에 충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네가 동부계를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지.”
한제는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부터 나는 선황이 너를 죽이려 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난 연도진을 잘 알아. 그는 의심이 많고 냉혹하지. 그래서 나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네가 큰 장애물이 될 것이기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선동했어! 역시 연도진은 내 말을 의심부터 하더군. 그래서 오히려 네가 선강 대륙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
한제는 오래 전부터 자신이 감시 대상이었음을 알았으나 서늘한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너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그는 네 힘을 빌려 명도 존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지. 반조법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택한 사람은 명도 존이었고 내가 택한 사람은 너다!
구제 대천존은 선황에게 아주 큰 위협이야. 때문에 선황은 이 조성 안에서 직접 너를 공격함으로써 구제의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아 했어. 책봉식을 미끼로 널 황궁으로 불러들이고 길거리에 함정을 설치한 것도 그 때문이지.”
이제 구제 대천존까지 언급됐으나 한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데 네가 살육까지 강림시킨 것을 본 순간 충격을 받은 그는 연도비의 기억을 빌미로 너를 이곳으로 유인한 거다! 나 역시 너를 이곳 지하 궁전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지.
그러려면 네가 쌍자 대천존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고 선황이 다른 대천존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여야만 내가 그에게 들키지 않고 네게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을 맺는 상현도의 눈이 반짝였다.
‘나와 명도 존의 싸움이자 선황과 상현도의 싸움인 셈이군.’
덤덤한 표정의 한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상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소위 전승이라는 것은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
“내게 원하는 게 뭐지? 그리고 선조는 실종돼 생사를 알 수 없다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전승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한제의 질문에 상현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매우 복잡한 일이지. 허나 지금은 선황이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마쳐놓고 선족 최고의 천재로 꼽혔던 명도 존을 찾은 상태야. 명도 존은 선조의 혈맥을 가지지 못했을 당시에도 자신의 힘으로 약천존 최강자가 되었으니 선조의 혈맥까지 갖게 된다면 그 수준은 몇 배로 증폭하게 될 거다.”
상현도는 연못 안의 명도 존을 힐끗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한 그의 원한은 이제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집착으로 바뀌었다. 그 집착이 명도 존의 생기를 강화했고 반조법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참아낼 가능성을 높였어. 이제 그는 곧 자신의 혈맥을 선조의 혈맥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게 될 거야!
그럼 명도 존은 2대 선조가 될 테고 선황은 그런 명도 존을 활용해 오랫동안 제멋대로 굴겠지. 그가 대체 어떻게 명도 존을 완벽하게 통제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국사 상현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점술을 통해 예측도 해보기는 했지만 흐릿하기만 하더군. 아마도 녀석의 몸을 빼앗거나 그를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겠지. 어쨌든 이 작업에서 중요한 건 바로 저 혈지(血池)다!”
상현도는 명도 존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연못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