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18
“선조의 후손으로서 피와 살로 선강 대륙의 법칙을 가동하여 도망족에 드리운 영원한 봉인을 해제한다!”
선황이 낮게 외치자 오른손의 나머지 손가락들은 물론 손바닥까지 무너져 내렸다. 붕괴는 계속해서 이어져 순식간에 팔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상태였다.
무너진 팔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피는 전방에 문양으로 응집됐다. 뒤이어 문양은 저절로 타오르면서 눈 깜짝할 사이 재가 됐다.
선조의 오른쪽 눈 안. 금색 문양이 흩어져 사라진 순간, 한제의 육체를 점거하고 있던 국사는 몸서리를 쳤다. 대대로 도망족을 억압해온 봉인이 사라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국사의 두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평생 모든 것을 바쳐 추구해온, 자신의 종족이 짊어진 운명을 벗어나게 하겠다는 꿈을 마침내 이루었다는 기쁨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허나 그때, 선황의 힘 한 줄기가 선조의 오른쪽 눈을 향해 급속도로 달려들더니 한제의 체내에 쾅 하고 떨어졌다. 매서운 힘은 국사가 남긴 흔적을 손쉽게 제거했다.
선황은 애초에 봉인에서 풀려난 국사를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도망족의 봉인을 해제하면 국사를 죽일 작정이었다.
한제의 육체를 점거하고 있던 국사는 숨을 거두기 직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봉인되어 있던 한 줄기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여태까지 이어져오던 도망족은 이미 거의 절멸했음을 자신이 어느 정도 자랐을 당시에는 살아남은 도망족이 그를 포함해 오직 세 명뿐이었음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부모에 대해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도망족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당시 자신을 제외하고 남은 도망족 중 한 사람은 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두 모녀는 그의 친척인 것 같았다.
이내 그는 그 여인이 전임 국사였음을 동시에 자신은 진정한 국사가 아니며 실제 국사는 그 여인의 딸임을 떠올렸다.
그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종됐고 자신은 그 아이의 어미인 여인으로부터 국사의 신통술을 전수했다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렇게 자라나면서 이 기억은 봉인됐고 그는 자신이 진짜 국사라고 철석같이 믿게 됐다. 전임 국사였던 여인이 숨을 거두었을 무렵, 성인이된 그는 수많은 도망족이 잠들어 있다고 자신의 사명은 그들을 최대한 빨리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은 순간, 봉인되어 있던 기억을 되찾은 지금에서야 도망족 중 실종됐던 아이를 제외하면 남은 것은 자신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선황이 이렇게 쉽게 봉인을 풀어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그는 남은 도망족이 나 하나뿐임을 알고 있었던 거야. 봉인을 풀어준다 해도 나만 죽이면 끝인 거였어.
더구나 난 국사가 아니었다. 그저 도망족 구성원일 뿐⋯⋯. 그렇다면 그때 실종됐던 아이, 진정한 국사인 그녀는 과연 누구이며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랜 세월을 바쳐온 모든 것이 결국 거짓이었음을 목표를 이루었으나 사실상 실패한 것임을 깨달은 그는 절망에 빠진 상태로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허나 죽음을 맞은 이 순간에도 누구인지 알지 못할 국사에 대한 원망 따위는 없었다. 어쩌면 진정한 국사를 보호하기 위해 도망족의 봉인을 푸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지도…
이 가엾은 사람이 흔적도 없이 흩어져 사라지자 선황의 힘은 한제의 체내를 마구 휘저으며 남은 영혼의 파동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빠져나갔다. 그 역시 천역주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한편, 도망족의 봉인을 해제한 선황은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는 확신에 그는 더욱 빨리 선조의 머리에 깃든 힘을 흡수했다.
줄기줄기 금빛 연기가 선조의 머리에 난 칠규로부터 흘러나와 선황의 칠규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선황의 수준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짙은 금빛에 휩싸여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한편, 그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해자 천존은 선황이 도망족의 봉인을 푼 순간 격렬하게 몸서리를 쳤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멍함과 복잡함이 동시에 드러나 있었다.
마치 한 줄기 기억이 머릿속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또한 도망족의 봉인이 해제된 순간 그녀는 체내에서 한 줄기 힘이 각성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도망족에서 기인한 그것은 진정한 국사의 힘이었다.
그녀의 두 눈이 점점 밝게 번득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린 그녀는 눈부신 금빛을 뿜어내고 있는 선조의 머리를 향해 손짓을 했다.
“모든 존재는 존재하기 때문에 허무로 사라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망(亡)이다. 모든 망자는 살아 있는 자의 그리움 때문에 사라진 상황에서도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도(悼)다.
도망족은 살아 있는 자의 그리움을 취하고 망자의 존재를 취하며, 희망의 추구를 취하고 금생내세(今生來世)의 힘을 취해 향불로 응집한다. 도를 망으로 만들어 존재하게 하고 스러진 것을 허무로 되돌린다.”
해자 천존이 중얼거리며 손짓을 한 순간, 온 하늘을 뒤덮은 금빛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다가 찰나의 순간 사라지면서 선조의 머리 안으로 전부 응집됐다. 덕분에 금빛에 휩싸여 있던 선황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더불어 그를 받치고 있는 선조 머리에서 발산되던 금빛 역시 번쩍 빛나더니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이로 인해 선조의 두 눈은 천천히 감기면서 다시금 죽음의 기운을 발산하며 대지로 떨어져 내렸다.
선황의 칠규를 통해 흡수된 금빛마저 의탁할 데를 찾지 못한 듯 선황의 체내에서부터 대지로 떨어져 내려 선조의 머리로 돌아갔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선황은 흠칫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 경악한 눈으로 해자 천존을 바라보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국사는 이미 죽었어. 완전히 죽었단 말이다! 넌 국사도 아니고 도망족도 아닌데 어째서 국사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거의 미칠 지경인 선황은 지금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넌 도망족이 아니야! 선황의 봉인으로 도망족은 절대로 황궁과 조성을 떠날 수 없단 말이다. 게다가 넌 국사가 아니야! 대체 넌 누구냐!”
선황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과 자신의 계획에 대한 확신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전까지 도일과 무봉이 생각보다 일찍 나타났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한데 막 성공을 눈앞에 둔 순간, 선조의 머리는 돌연 모든 힘을 잃었다. 두 번째 선조에 등극할 기회를 코앞에서 놓쳤음을 누군가가 자신의 계획을 예상했음을 깨닫게 된 상태였다.
“내가 바로 국사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역대 국사로 지내왔던 도망족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되찾은 해자 천존이 복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방금 네가 죽인 사람은 선강 대륙에 남은 도망족 중 나를 제외하면 마지막 남은 사람이었지.”
해자 천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네가 국사였다면 어찌 조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냐! 구제! 자네가 말해봐!”
선왕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음에도 그는 대천존으로서의 위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이 계획을 생각해낸 것은 도망족의 한 천재였다. 이곳을 떠나 대혼문을 설립한 그는 이미 죽었지만 계획은 계속해서 이어졌지. 또한 그는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찾아냈으니, 바로 동부계에서 온 수련자 이한제다!
도망족에서 그의 육체를 완전히 탈취하기만 한다면 이 계획은 성공한다. 내가 어떻게 조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느냐고? 그건 내 영혼은 도망족에 속해 있지만 내 육체는 선강 대륙에 속해 있기 때문이지.”
해자 천존의 말에 구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황, 저 아이는 내 딸이라네!”
“내가 여태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 그토록 무궁무진한 수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당시 대천존이 될 수 있었던 것 모두 사실 도망족의 도움 덕이었지. 그들이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 계획은 이한제가 선강 대륙에 나타나면서 실행에 옮겨졌다네.”
구제 대천존은 덤덤한 얼굴로 진상을 밝혔다.
물론 한제 역시 이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해자 천존과 구제 대천존에 집중된 이때, 천역주에서 나온 그는 자신의 육체를 다시 차지했다.
‘그랬단 말이지?’
한제의 두 눈이 싸늘하게 번득였다.
“이 계획은 도망족의 그 천재가 생각해낸 이래 대대로 이어져왔지. 그는 당시 내가 대천존에 등극할 수 있도록 도왔고 대신 내게 도움을 요청했네.
선대 선황이 죽고 자네가 선황에 올랐을 때, 날 찾아온 선임 국사는 선조의 계획에 따라 나와 혼인을 맺었어. 그리고 곧 여자아이를 낳았네. 그러니 이 아이의 영혼은 도망족의 것이지만 육신은 선강 대륙에 속한 것이지.”
구제의 말은 계속됐다.
“더욱이 선조가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봉인은 한층 약해진 상태였어. 게다가 이 계획의 완성을 위해 도망족의 모든 구성원은 자신들의 영혼을 바쳐 융합시킴으로써 봉인의 힘에 대항했네. 도망족의 수가 갈수록 줄어든 건 그 때문이야.”
이어서 구제는 씁쓸한 눈으로 해자 천존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숨을 거둔 도망족 사람들은 특수한 방법을 통해 한 층의 보호막이 되어 해자의 영혼에 드리워졌지. 이 아이가 조성 밖으로 나가도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육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영혼에 드리운 도망족 망자들의 보호막 때문이기도 하다네.
도망족은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을 들인 끝에 해자에게 응집된 채 계획을 완수했어. 그리고 오직 해자만이 이 계획을 마무리할 수 있지!”
구제의 덤덤한 목소리가 끝나자 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딸이라… 그래서 그토록 그녀를 보호하고 도왔던 거로군. 이제 도망족의 큰 존재가 됐으니 당시의 선조나 가질 수 있었던 향불을 손에 넣을 자격까지 거머쥐었을 테고⋯⋯. 도망족, 봉인을 풀기 위해 실로 막대한 대가를 치렀군.”
선황은 복잡한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해자를 제외한 마지막 도망족은 방금 죽었어. 사실 도망족의 선조는 일찍이 연도진 자네가 선조의 상속을 갈망할 것도 우리 네 대천존의 압박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맞설 것임을 예측했네.
이 계획의 관건은 선조의 머리에 있는 도망족 봉인의 힘이었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탈취될 조건을 갖춘 채 선조의 머릿속으로 흡수될 사람이 필요했지. 그러니 이한제가 제일 중요한 요소였다는 거야!”
선황은 씁쓸한 얼굴로 구제 대천존과 그 뒤의 해자 천존을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끝끝내 도망족의 봉인을 풀지 않고 버텼다면 내가 선조를 상속할 기회를 포기했다면 도망족의 계획은 실패했을 거라는 뜻인가?”
“아니!”
그 말에 대답한 것은 구제 대천존이 아니라 해자 천존이었다. 이때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매우 신비로운 기운을 풍기며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선황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번에 선조의 상속을 포기했다면 우리 도망족이 대를 이어 준비해온 계획이 실행됐을 거다. 그 매복을 실행하면 선족 구역 72개 주의 모든 사당이 우리 종족의 명에 따라 각 주에 봉인된 천외 흉수 영혼을 깨우고 그 대가로 선조의 머리를 제압하고 있는 힘을 뒤흔드는 거지.
선조의 머리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네가 그 힘을 상속하지 않는다면 선족 구역 전역은 대혼란에 빠질 테고 상속을 하려면 선조의 머리에 융합된 우리 도망족의 봉인을 풀어야만 했겠지.”
해자가 말했다.
“마갈 사당에서처럼⋯⋯.”
선황의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저술(詛術)
“도일, 무봉. 자네들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선황의 시선이 도일과 무봉에게로 향했다.
“구제 대천존이 찾아와 숨김없이 말해주었네. 허나 이한제와 관련해서는 지금에서야 알았어. 그가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줄이야!”
도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무봉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선황은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내 선황의 시선은 쌍자 대천존에게로 옮겨 갔다.
“쌍자 자네는 어떤가? 자네도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나?”
두 소녀가 융합한 쌍자 대천존의 본체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선황을 마주보았다.
“모르고 있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오직 이한제를 데려가기 위함이야! 자네든 구제든 다른 누구든 이를 막으려 든다면 이 쌍자의 적으로 간주하겠네!”
“이한제⋯⋯ 그는 이미 국사에게 육체를 갈취 당했어. 이미 죽은 게지. 그가 동부계에 있었을 당시부터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겠군!”
선황이 눈을 번득였다.
“도망족의 선조는 대략 언제쯤 누군가가 동부계에서 나올 것이라는 사실만 예측했을 뿐, 그게 누구인지, 어느 동부계 사람인지는 예측해내지 못했어. 그러니 우리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네.”
구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망족의 천재가 천우주에 대혼문을 설립한 건 이한제가 천우주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겠지. 즉, 이 계획의 첫 단계는 이한제와의 접촉이었던 셈이야!”
영민한 선황은 단번에 요점을 간파했다.
“대혼문의 선조는 과연 이한제가 자네들에게 이렇게 이용당하고 금궁에서 이렇게 도망족 봉인 해제의 도구로 쓰이고 죽을 것도 예측했을까? 구제, 자네는 이한제는 물론이고 그가 끌고 들어온 쌍자 대천존까지 이용했어.
또한 자네는 명도 존과 연도비, 나와 선족 구역 72개의 혼까지 이용했지! 해자 천존이 자네의 딸이라 한들 단지 도망족만을 위해 이런 짓까지 벌이지는 않았을 텐데?”
고개를 쳐든 선황이 천둥처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