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19
“그리고 도일, 무봉! 자네 둘 또한 분명 구제가 무언가를 약속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지! 내게 모든 진상을 알려준 건 내가 불리한 형세에 처해 있음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일 거야.
다시 말해, 자네들에게는 내 협조가 필요한 무슨 일인가가 있다는 게지. 어떤가 쌍자. 자네만이 아무것도 약속받지 못한 채 구제와 도망족에게 이용당한 게 아닌가?”
열세에 몰린 선황은 이간질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키고 쌍자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쌍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융합 후 온전한 상태를 갖춘 그녀가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선황, 자네를 죽일 생각은 없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혈맥의 힘으로 선조의 머리를 깨는 것뿐이야. 자네는 그 후로도 여전히 선황이자 대천존으로 군림할 수 있지. 제안을 거절한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네. 억지로라도 자네 혈맥의 힘을 뽑아내 그 일을 완수할 생각이니까.”
구제 대천존의 덤덤한 말에 살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목소리와 말투는 매우 냉랭했다.
“쌍자 선조의 두 눈은 본디 하나야. 만약 자네가 저것을 제련하여 체내에 녹여 넣는다면 환생 당시의 사고로 인한 영향을 제거하고 오히려 수준은 더욱 높아질 걸세. 또한 보랏빛 태양의 힘을 소모할 때만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지금과 달리 원할 때마다 분리와 융합을 마음대로 할 수도 있지!”
구제는 다시 무봉과 도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봉! 선조의 두 귀는 도의 소리와 선강 대륙의 법칙이 운행하는 궤적을 들을 수 있다 했네. 약속한 대로 자네에게 그 두 귀를 주지. 그것을 자네의 도와 융합한다면 최고 수준의 무도를 깨달을 수 있을 걸세.
도일! 선조의 두개골은 허무에서 탄생해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힘의 정수를 응집해왔어. 약속대로 자네에는 그 두개골을 주겠네. 그것을 이용하면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만들 수 있지!”
구제는 다시 선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선조의 뇌뿐이야. 내게는 꼭 필요하지. 선조의 머리를 우리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니 누구도 불만은 없을 게야.”
구제의 번득이는 눈을 보며 선황이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구제, 자네도 선조가 죽기 전 남긴 저술(詛術)에 대해 알고 있었군!”
“오랫동안 찾아낸 단서를 근거로 얼마 전에 그 오래된 전설이 사실임을 알아냈지. 선조가 죽었다면 그의 몸을 파괴하려는 사람은 죽게 된다는 저주에 관한 전설, 저주의 위력은 그 후손이 혈맥의 힘으로 선조를 시해할 때만 사라진다는 전설. 그렇게 된다면 그 후로는 누구도 선조의 혈맥을 이어받을 수 없다는 뜻.”
구제는 선황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선황,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는가? 자네는 저주의 위력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선조의 머리를 깨더라도 죽지 않아. 팔극이라는 칭호는 자네를 끝으로 더는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겠지만 선조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위엄은 선족 널리 퍼져 있어. 이제 그 상황을 바꿀 때도 된 거야!”
이어서 구제는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끝맺었다.
“게다가 우리와 맞서다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네! 만약 자네의 죽음으로 고족과의 정세가 불안정해질 것을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이유도 없었겠지. 좋은 선택을 하리라 믿네.”
선황은 대답이 없었다.
한편, 빛을 잃은 선조의 오른쪽 눈 안에서 한제는 온몸의 기운을 거둔 채 바깥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곳의 정세가 여러 차례 뒤바뀌는 사이 상황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지만 아직 좀 더 기다릴 때였다.
‘대혼문의 청우 진인이 그랬지. 3백 년 후 대혼문에 방문해 탑의 꼭대기 층에 가보라고 그곳에는 대혼문을 설립한 선조가 나를 위해 남겨둔 것들이 있다고⋯⋯. 한데 도망족의 천재라는 대혼문의 선조는 나를 이용해 도망족에 드리운 봉인을 푼 뒤 내게 뭘 넘겨주려 했던 걸까?’
한제의 표정은 사뭇 복잡했다.
‘그가 천우주에 자리를 잡고 대혼문을 설립한 건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어. 어쩌면 그의 계획 속에서 나는 이미 죽었어야 했는지도 몰라. 허나 그가 정말로 내가 이곳 황궁에서 죽는 미래를 보았다면 왜 3백 년 후를 기약하면서 대혼문 탑 꼭대기에 뭔가를 남겨둔 걸까?
그는 나를 이용하고 나의 모든 미래를 엿보았다. 그렇다면 이용당하는 상황을 절대로 그냥 넘기지 못하는 나의 성격도 예측했을 터!’
한데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돌연 밖에서 격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선조의 머리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기 시작한 듯했다.
선조의 머리를 띄운 것은 선황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결국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제는 여전히 선조의 머리에 숨어 있었다. 때문에 아직까지는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 머리가 쪼개지면 그대로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때 선황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면서 폭이 1백 척에 달하는 선조의 머리를 전방에 띄워놓은 상태에서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날을 세운 그의 온몸에서 금빛이 번득였고 얼굴에서는 푸른 핏줄까지 돋아났다. 체내의 피가 들끓으며 모든 힘이 왼쪽 손날에 응집됐다. 선황은 그 손을 선조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선조의 머리에 한 줄기 균열이 나타났고 그 사이로 무궁무진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선황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고 그의 육체는 급속도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도일과 무봉, 구제는 그런 선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해자 천존은 멀찍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쪼개진 선조의 머리를 응시했다.
그때였다. 돌연 구제가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면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고 뒤이어 도일과 무봉 역시 표정이 급변한 채 일제히 몰려들었다.
오른손을 선조의 머리에 얹은 선황은 혈맥의 힘으로 그 머리를 부술 것처럼 왼손을 휘둘렀으나, 마지막 순간 손바닥을 펼쳤다. 그는 애초에 대천존들과 타협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체내 혈맥의 힘은 왼쪽 손바닥을 통해 선조의 혈맥 안으로 주입됐다.
“나를 아주 우습게보았구나!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개처럼 목숨을 부지할 바에는 끝까지 싸우겠다! 크하하하!”
선황은 구제를 비롯한 세 대천존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호탕하게 웃었다. 그 사이 혈맥의 힘을 흡수한 선조의 머리는 다시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입을 쩍 벌리더니 칠규에서 매우 짙은 금빛 안개를 뿜어냈다. 선황은 두 손을 선조의 머리에 얹고 입을 벌린 채 그 금빛 안개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금빛 안개를 전부 흡수한다면 선황은 선조의 수준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선조가 남긴 저주는 머리에 생긴 균열로 인해 파괴된 상태였다. 또한 이 균열은 해자가 국사로서 발휘한 봉인까지 파괴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해자 천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입가에서는 피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일은 악에 받친 눈빛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선황을 향해 손바닥 문양을 날렸다. 동시에 무봉의 주먹과 구제가 소환한 하얀 늑대 허상이 선황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고개를 번쩍 쳐든 선황의 두 눈에서는 금빛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피는 코와 귀, 입에서도 흘렀고 그러는 와중 빠른 속도로 붉게 변했다. 이는 그 체내의 혈맥이 흩어져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표정이 급변한 구제는 서둘러 공격을 거두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실 선황은 선조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금빛 안개를 흡수하지 않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가 보였던 모든 것은 사실 허상으로 그의 칠규로 흡수되는 것 같았던 금빛 안개는 모조리 뒤로 퍼져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선황의 육체가 급속도로 부풀어 오르다가 찰나의 순간 터져나갔다. 자폭.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였다. 구제 역시 선황이 생사의 위기에 몰린 것도 아닌 상황에 자폭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대천존의 자폭이라면 육신만 폭발시켜도 세상을 소멸시킬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폭발이 금궁을 뒤흔들고 눈 깜짝할 사이 대지를 가루처럼 부쉈으며 하늘을 무너뜨렸다. 금궁을 파괴한 위력은 계속해 확산되면서 지하 궁전까지 미쳤고 이에 지하 궁전의 제단과 주위의 기둥들 역시 전부 와해됐다.
황궁과 다른 공간에 있지만 중첩된 지하 궁전을 흩어 없앤 폭발의 위력은 그 통로를 따라 급기야 황궁 대전의 광장부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황궁 바닥에 깔려 있던 청석은 가루가 되었고 강력한 폭발의 위력은 사방으로 끊임없이 확산됐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붕괴는 계속됐고 눈 깜짝할 사이 황궁 전역을 휩쓸었다. 수만 년 동안 조성에 우뚝 세워져 있던 불멸의 황궁은 거대한 손바닥에 짓눌린 듯 그 형태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곳곳의 궁전과 아름다운 명소를 비롯해 황궁의 모든 수련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성 전역이 진동했고 이 도시의 모든 수련자는 깊은 두려움에 떨었다.
한편, 폭발의 위력이 황궁을 파괴하고 황궁 깊은 곳 우뚝 솟은 선조의 조각상에 미친 순간, 그 조각상은 돌연 눈부신 금빛을 뿜어냈다. 이 저항으로 인해 더욱 격렬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이 위력의 원천인 선황의 육신과 대천존으로서의 힘이 폭발한 순간, 그의 피와 살점은 가까이 있던 도일과 무봉, 구제에게로 뿌려졌다.
선황의 자폭도 같은 대천존인 이 세 사람을 죽이지는 못했다. 더욱이 세 사람은 힘을 합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고 두 눈에는 짙은 두려움이 묻어났다.
나 이한제가 가져가겠다!
선황의 자폭으로 가장 큰 피해를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선조의 머리였다. 선조의 머리는 원래 폭발의 여파에 쉽게 영향을 받을 정도로 약한 존재가 아니다. 허나 자폭 직전에 선황이 손바닥으로 강타하면서 균열이 생겨났고 칠규를 통해 대량의 금빛 안개를 분출하면서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선황의 자폭에 세 대천존이 그에게 퍼부었다가 미처 거두지 못한 신통술들의 위력까지 더해지면서, 선조의 머리 정수리에 일어난 균열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확산됐다.
균열이 확산됐다는 것은 네 사람이 동시에 선조가 죽기 직전 남긴 저주를 건드렸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셋 중 가장 약한 도일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온몸에서는 대량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잘생겼던 얼굴은 급속도로 썩어 문드러졌다.
무봉 역시 신음을 흘리며 검은 연기에 휘감긴 채 비쩍 말라가며 썩어 들어갔다.
구제는 이들보다 수준이 훨씬 높았기에 억지로나마 저주의 위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피부에도 기이한 문양이 드러났다.
한편, 육신만 자폭했을 뿐 영혼은 남아 있던 선황은 육신이 폭발하여 두개골이 갈라졌을 때 그 사이를 뚫고 나와 선조 머리의 균열로 향했다. 그의 목적지는 거대한 머리의 왼쪽 눈, 연도비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선황이다. 그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을 것 같은가? 연도비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둔 것이다! 녀석의 몸을 빼앗고 그 몸으로 저술의 위력을 분담한 뒤 그가 현재까지 이어받은 선조의 수준을 활용한다면 이 상황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어!”
타오르는 듯한 선황의 영혼은 광기 어린 포효를 내지르며 선조의 머리에 난 균열로 달려들어 곧장 왼쪽 눈으로 향했다.
한데 그의 영혼이 막 선조의 왼쪽 눈구멍에 이르러 혼수상태에 빠진 연도비의 몸으로 파고들려는 그 순간이었다.
선조의 오른쪽 눈에서 번득이는 금빛과 함께 한제가 걸어 나왔다. 절호의 기회가 찾아올 순간까지 조용히 기다려온 그는 마치 사냥감의 숨통을 끊으려는 사냥꾼 같았다.
선조의 저술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은 한제는 곧장 선조의 왼쪽 눈으로 돌진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본 것은 멀리 떨어져 있던 쌍자 대천존과 해자 천존뿐이었는데 이들은 놀라면서도 기쁜 눈빛이었다.
한제가 선조의 왼쪽 눈으로 들어갔을 때, 선조의 저술에 휩싸인 선황은 그 타오르는 듯한 영혼으로 연도비의 체내로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눈을 번득인 한제는 곧장 손을 들어 올려 선황의 영혼을 향해 소매를 휘둘렀다. 대천존이지만 육신이 폭발한 데다가 영혼 역시 선조의 저술에 영향을 받고 있는 탓에 더없이 허약해진 선황은 한제를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너, 너⋯⋯.”
선황의 비명에는 엄청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웅처럼 용맹하게 목표를 달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예측했던 그로서는 한제가 살아 있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구제와 도일, 무봉 중에도 한제가 살아 있으리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끄아아!”
한제가 소매를 휘두른 순간 선황의 영혼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럼에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연도비의 체내로 파고들려 했다. 그러나 결국 기회를 잡지 못한 그는 한제의 저물공간에 처박혔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데다가 저술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선황으로서는 한제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한제가 선황의 영혼을 거두어 넣은 이때, 선조의 머리는 균열이 너무나 커진 탓에 격렬하게 진동하면서 더욱 심하게 갈라졌다.
한제는 혼수상태의 연도비를 부축해 왼쪽 눈구멍 밖으로 나와 선조의 머리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의 백의백발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어느새 눈동자까지 까맣게 변한 상태였다.
“이 머리와 연도비는 나 이한제가 가져가겠다!”
난데없이 등장한 한제의 선언에 사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구제 대천존은 체내로부터 전해지는 불타는 듯한 고통을 강력한 수준으로 애써 억누르며 살기 어린 눈빛으로 한제를 노려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예측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선황이 대천존의 육체를 포기하고 자폭을 선택할 것은 예상치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선황의 선택이라기에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욱이 그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한제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죽기는커녕 전보다 수준이 전보다 더 증폭한 듯했고 순식간에 상황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이로 인해 선조가 남긴 저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그들은 굉장히 수동적인 입장에 놓이게 됐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무봉 대천존이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면서 빛을 잃어가는 두 눈으로 한제를 보았다.
검은 연기에 뒤덮인 도일 대천존은 극심한 고통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상태였다. 저술의 위력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파고든 듯했다. 그렇게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한제를 보며 분노를 드러냈다.
“무엄하다! 죽기를 자처하는구나!”
도일은 거칠게 외쳤다. 대천존 중 가장 수준이 낮은 데다가 저술의 위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가 알기로 상대는 약천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극심한 고통을 참고 분노하며 한제에게 돌진했고 엄청난 속도로 눈앞까지 다가가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검은 연기로 휩싸인 그의 손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 손짓에 온 세상은 정지하는 듯했고 하나로 합쳐진 만물은 한제를 향해 떨어졌다.
흑발의 한제는 혼수상태에 빠진 광인을 내려놓더니 무정한 눈빛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검은 살육의 천둥번개가 나타나 전방에 거대한 그물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그물이 나타난 순간, 한제의 체내에서는 살육과 묵멸의 기운이 발산됐다. 이는 멸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거대한 그물에서 발산된 검은 번개는 살육을 품은 채 사방으로 흐르면서 도일의 손바닥과 충돌했다.
콰쾅!
굉음이 고막을 때렸고 천둥번개의 그물은 무너져 내렸다. 한제는 바르르 몸을 떨면서 수 없이 많은 검은 기운으로 흩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응집됐다. 살육은 소멸되지 않는 법이었다.
도일은 선조의 저술에 시달리고 있는 터라 대천존으로서의 위력을 절반도 발휘하기 힘든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제가 발휘한 살육의 천둥번개를 맞닥뜨린 그는 곧장 뒤로 밀려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빛은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