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23
선족 내에는 여전히 다섯 대천존이 존재했다. 허나 다섯 번째 대천존은 황궁과 중첩된 공간에 자리한 지하 궁전 아래 금궁에 우뚝 솟은 금빛 산봉우리로 존재하며 흉수 일흔두 마리의 영혼을 제압하는 중이었다. 산봉우리 아래의 광인은 마치 한제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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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이 흐른 어느 날, 선족 구역 동주, 천우주.
울창한 산으로 뒤덮여 있었던 이곳은 몇 해 전 녹마주와의 전투로 인해 지금은 지형 자체가 변해 있었다.
하지만 천우주 내 종파의 세력 순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대혼문과 귀일종이 가장 큰 세력이었고 수많은 작은 종파는 이 두 거대 종파에 의탁한 형국이었다.
당시 조성에 갔던 두 거대 종파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종파로 돌아온 후였고 각자 종파의 미래를 책임지는 기둥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대혼문.
청우 진인은 당시 한제가 떠난 후 종파 내의 번잡한 일에 대해서는 각 장로들에게 일임해둔 채 줄곧 폐관수련을 이어왔다.
그는 한제에게 주었던 산봉우리는 금지로 지정해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심지어 불만을 갖기도 했다. 허나 후에 천존열 시험장에서 그 이름을 크게 떨친 백발 약천존이 그 한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제자들은 그제야 청우 진인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당시만 해도 일개 장로였지만 지금은 제법 높은 지위에 올라 중대한 사안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염란은 더 좋은 산봉우리를 선택할 수 있게 됐음에도 끝내 자신의 산봉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꼭대기에 서면 당시 한제가 머물렀던 산봉우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홀로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 한제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곤 했다.
반산로와 반산몽은 여전히 그녀의 제자였다. 당시 한제와의 사이에 있었던 사적인 원한은 이미 풀어진 데다가 시간도 꽤 지났기에 원한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대혼문의 장로는 한제가 있었을 때보다 한 명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그의 이름은 두청으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원신을 나무로 이루어진 육체에 응집해 자신의 몸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장로가 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대혼문 선조가 직접 그를 장로로 지정했다. 덕분에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
바다
세월은 흘렀고 천우주에는 평화가 이어지는 듯했다. 산은 여전히 산이었고 누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대혼문 밖에 이른 한제는 익숙한 종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처음 이곳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대혼문에 대해 잘 몰랐던 그는 천천히 대혼문을 파악해갔다. 이후 이곳을 떠나 여러 일을 겪다가 끝내 황궁에서 대혼문과 그곳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대혼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음을 깨달았다.
‘도망족⋯⋯ 누구도 능가할 수 없었던 천재⋯⋯. 대혼문의 선조는 이미 죽었을 수도 죽지 않았을 수도 있어. 어쨌든 그의 계획은 수만 년의 세월을 관통했지. 그 당시 오늘날 있을 변화까지 내다보았고 그 계획에 연루된 모든 이의 반응까지 예측했어.
그의 눈에는 그 모든 사람이 다 장기말이었던 셈이야! 그 계획으로 끝내 도망족의 봉인은 해제됐고 선조의 혈맥은 끊어졌어. 남은 단 한 명의 종족원, 해자는 자유를 되찾았지.’
대혼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한제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수준은 진즉 청우 진인을 훌쩍 뛰어넘은 상태였다. 심지어 대혼문의 모든 수련자가 한꺼번에 달려든다 해도 그의 상대는 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누구도 그가 접근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한제는 두청을 불꽃처럼 붉은 옷을 입은 채 산봉우리 위에 서 있는 염란을 그리고 반산몽과 반산로를 보았다. 이어서 그는 대혼문 안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일찍이 방문한 적 있던 장혼각으로 향했다.
장혼각은 당시 청우 진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찾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의 한제에게는 그런 게 문제가 될 턱이 없었다.
일곱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이 누각은 옅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그 앞에는 생동감 넘치는 두 개의 거대한 흉수 조각상이 버티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문이 굳게 닫힌 누각의 현판에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장혼각!
7층까지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누각에는 사실 8층과 9층, 심지어 10층도 있었다. 당시 청우 진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장혼각의 10층에는 대혼문의 선조가 쉬고 있다고 했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장혼각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답을 그리고 도망족의 천재가 자신에게 남겼다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문을 열고 누각 안으로 들어선 한제에게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제는 조용히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내 8층에 도착했다.
누각 안 계단의 금제는 지금의 한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흩어졌다.
9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바라보던 한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9층에서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옥패들을 볼 수 있었다. 대혼문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 중 가장 강한 신통술이 담긴 옥패들이었다. 당시의 한제가 원했던 완전한 다중환술도 이곳에 있었다.
옥패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살피던 한제는 곧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10층으로 통하는, 오래된 계단이었다.
열세 개의 층계를 하나하나 밟고 올라간 한제는 결국 장혼각 꼭대기, 10층에 들어섰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한제의 표정은 점차 복잡하게 변해갔고 한참 후에야 그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게 내게 남긴 물건이구나. 이게 내게 반드시 보여주려 했던 광경이야. 도망족의 천재⋯⋯ 네가 날 이용한 것은 없던 일로 쳐주겠다!”
더 이상 10층 안의 광경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돌아선 한제는 한 걸음을 내딛어 흩어져 사라지듯 자취를 감췄다.
장혼각 10층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폭이 1백 척 정도 되는 이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의 조각상과 한 구의 유해였다. 이 조각상은 한 사내의 모습으로 온 세상을 파괴할 수 있을 듯한 힘과 위엄이 어린 눈은 전방의 유해를 서늘하게 응시하는 중이었다.
유해는 조각상 앞에 꿇어앉은 상태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애원하는 듯한 머리에는 한 줄기 균열이 나 있었고 그 안의 뇌는 사라진 상태였다.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진 듯 구멍이 난 가슴 안에 있어야 할 심장도 볼 수 없었다.
한편 두 손은 들어 올려져 있었는데 왼손에는 말라붙은 뇌가 오른손에는 뛰지 않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용서를 구하듯 조각상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수만 년을 꿇어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통 유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가둔 감옥이었고 그 영혼은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석상으로 조각된 것은 다름 아닌 한제였으며 그 앞의 유해는 대혼문의 선조이자 도망족의 천재였다.
선강 대륙에서 선족이 차지한 지역은 대륙 전역의 5할을 약간 넘긴 정도였다. 4할은 고족의 차지였고 나머지 1할은 고족 구역과 선족 구역을 분리하는 무궁무진한 바다였다.
선강 대륙에서 가장 큰 바다인 이곳은 언제나 거친 파도가 몰아쳤고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어 일반인은 절대 건널 수 없었다. 수련자라 해도 어지간히 수준이 높지 않고서는 건너기가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이 바다는 선족과 고족이 서로의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주는 천연적인 장벽인 셈이었다.
선족 구역 중 이 바다에 접해 있는 것은 북주였다. 얼음으로 뒤덮인 북주의 최북단에는 한맹주(寒勐洲)라는 곳이 있는데 그리 넓지 않은데다가 대부분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수련자들은 수련하는 공법 또한 그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한맹주 수련자들 역시 얼음에 관련된 신통술을 수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극악한 환경 탓에 일반인은 거의 살지 못했고 이런 경향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심해졌다.
한맹주의 북쪽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만약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이 주가 거대한 얼음 조각처럼 드넓은 바다 가장자리에 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파도에도 얼음 조각은 녹지 않았다. 오히려 접한 바닷물이 얼어붙을 조짐을 보일 정도였다.
대륙 가장자리인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1백만 리에서는 생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수련자도 이곳에는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의 한기 때문이다. 수련자라 해도 이곳에서는 피가 얼음처럼 얼어붙어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휘휘 불어오는 찬바람에 눈송이가 높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이곳에 세 개의 인영이 저 먼 눈밭 위에서부터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도롱이를 입은 채 선두에 선 사람은 머리가 온통 하얬다. 눈송이는 그 머리와 도롱이 위로 두텁게 쌓였고 그의 뒤에 남겨진 발자국마저 덮어버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언뜻 노인 같아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중년 사내였다. 머리에 눈이 하얗게 쌓인 그는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온몸을 덜덜 떨며 계속해서 두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러면서 수시로 옆에 선 사람을 힐끔거렸는데 두 눈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사내의 어깨 위에는 작은 뱀이 한 마리 있었다. 나른하게 똬리를 튼 용처럼 생긴 작은 뱀은 사내가 끔찍한 추위에 당장이라도 얼어붙으려 할 때마다 버틸 수 있도록 숨결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가 질투에 찬 시선으로 힐끔거리는 사람은 두꺼운 솜옷을 겹겹이 껴입은 허약한 청년이었다. 그는 잔뜩 부푼 몸으로 뒤뚱거리며 걸었는데 쌓인 눈에 푹푹 빠진 발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맹렬한 추위에도 배어 나온 땀 때문에 청년의 이마에서 하얀 김이 솟는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묻혀 멀리 퍼져 나가지 못했다. 세 사람의 발자국도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에 금세 지워졌다. 바람과 눈에 묻히지 않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뿐이었다.
“이 허이국은 항상 똑똑했지. 동부계에서도 그랬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야. 금표자 네놈은 아직 한참 부족하다!”
두꺼운 솜옷을 껴입은 청년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덥구나, 더워.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워. 금표자 너는 어떠냐?”
유금표는 허이국을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때마침 불어닥친 차가운 바람에 덜덜 떨었다. 심지어 얼굴도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허, 금표야, 이렇게 더운 날 왜 그리 떨고 그러느냐? 설마 추운 게냐? 그따위 연기에는 속지 않는다. 이 허이국은 그간 조성에 살면서 보지 못한 것이 없고 차보지 못한 장신구가 없으며, 먹지 못한 음식이 없다. 그런가 하면 도화와 도홍, 도랑이를 비롯한 여인의 향내도 수없이 맡아보았지.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어. 금표야, 너는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허이국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매우 의기양양했다. 그 얄미운 표정에 유금표는 당장이라도 허이국의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휴, 이렇게나 더운데 옷을 너무 많이 입은 모양이다. 금표야, 너는 퍽 추워 보이는구나. 걱정 마라, 우리는 친형제 같은 사이 아니냐. 내 네게⋯⋯.”
허이국은 유금표를 슥 훑어보더니 말을 끊었다. 그리고 유금표가 옷을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표정을 짓자 허이국은 그제야 낄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귀한 옷들을 좀 소개해주마. 잘 듣고 상상해봐라. 혹시 또 아느냐? 열심히 상상하다 보면 진짜로 춥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 너는 기만책에 능하지 않으냐? 스스로를 속이거라. 따뜻한 옷을 잔뜩 껴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허이국은 자신의 옷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옷은 말이다. 아주 귀한 것이다. 천면(天綿)으로 만든 것이라 스스로 온기를 발산하지. 진씨 가문에서 훔쳐 온 것이야. 이 솜저고리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무척 귀한 것으로 입으면 꼭 불덩이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훈훈해진다니까. 이건 왕을 종용해 조씨 가문에서 빼앗아오게 한 것이고 그리고 이건⋯⋯.”
허이국이 옷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가자 유금표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허이국!”
“허! 어찌 내 이름을 부르느냐! 주인님 앞에서 내 것을 빼앗기라도 할 참이냐? 어디 한번 해봐라. 좀도둑 같은 녀석이 담도 크구나!”
허이국은 눈을 부릅뜨며 소매를 걷어붙이려 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두꺼워 겹겹의 옷소매를 걷어붙이는 데만 해도 한 세월이 걸릴 것 같았다.
“주인님, 저자를 좀 보십시오. 저는⋯⋯ 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허이국을 노려보던 유금표는 이내 앞서 걷고 있는 한제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저 녀석에게는 신경도 쓰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단련하고 수준을 높이려고 저러는 것이니까요. 저희 걱정은 마십시오. 눈이 매우 미끄러우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쪽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이국은 아첨하듯 웃어 보이며 재빨리 다가가 한제의 어깨에 쌓인 눈을 조심스레 털어준 뒤 고개를 홱 돌려 매서운 눈으로 유금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유금표에게 신식으로 외쳤다.
“이 허이국과 주인님의 심복 자리를 두고 다툴 셈이냐? 허! 네게는 그럴 자격도 없다! 내가 주인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네놈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젖을 먹고 있었지!”
“이잇!”
“어쩔 셈이냐? 그래, 우리 힘으로 이 땅을 지나겠다고 주인님께 건의한 건 나다. 그리 하면 의지도 다잡을 수 있을 테고 힘을 끊임없이 가동해야 하니 수준도 높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뭐 어쩔 셈이냐?
이 허이국의 수준은 너처럼 높지도 않고 그 멍청한 용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솜옷을 좀 입었건만 그게 그리도 마음에 안 든단 말이냐? 너 또한 솜옷이 있었다면 당장 입었을 것 아니냐!”
허이국이 차게 코웃음을 쳤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다툼에 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동행하기 시작한 이래 다툼을 멈춘 적이 없었다.
길
“유금표, 더 못 참겠다면 내 너를 저물공간에 거두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