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24
결국 한제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유금표를 돌아보며 말했다.
‘허이국 저놈에게 주인님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줄 수는 없어! 그럼 녀석은 분명 주인님께 나에 대한 험담을 할 거야!’
그러나 유금표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인님, 저⋯⋯ 저는 더⋯⋯ 버틸 수 있습니다!”
유금표가 덜덜 떨며 말했다. 목소리도 떨려왔다.
“허이국, 네 옷 몇 벌을 유금표에게 줘라.”
두 사람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한제는 짧게 명령한 뒤 곧장 돌아서서는 전혀 급할 것 없다는 듯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허이국이 내키지 않는 듯 어쩔 수 없이 솜옷 몇 벌을 벗어 던져주자 유금표는 얼른 주워 입었다. 이후 두 사람은 몇 번 더 거친 눈빛과 욕설을 주고받은 뒤에야 한제를 쫓아갔다.
바람은 점점 싸늘해져서 허이국도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하는 지경에 이르자 한제는 손을 휘둘러 그들과 함께 사라졌고 다음 순간 한맹주의 가장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서는 거친 파도가 몰아쳤고 바다 위로는 수많은 얼음 조각들이 떠다니면서 수시로 충돌해 요란한 소리를 퍼뜨렸다.
“이 바다를 넘으면 고족 구역이다.”
손을 휘둘러 유금표와 허이국을 저물공간에 거둔 후, 한제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가 훌쩍 몸을 날려 거대한 얼음 조각 위에 내려섰다.
한제는 잠시 선족 구역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과거는 불어오는 차디찬 바닷바람처럼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한제를 태운 얼음 조각은 바닷물을 따라 출렁거리며 배처럼 떠갔다. 선족 구역이 점점 멀어지면서 차차 흐릿해졌다.
한제는 그곳에서 만난 익숙한 얼굴들을 떠올렸다. 선족 구역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들 역시 옅게 흩어지는 듯했다.
“광인⋯⋯ 내가 다시 돌아오는 날⋯⋯.”
한제는 끝내 말을 맺지 못하고 삼켰지만 두 눈은 굳건한 의지로 번득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선족 구역 대륙은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거칠게 철썩이는 바다와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태양뿐이었다. 타오르는 불처럼 붉은 노을로 하늘을 물들이던 태양이 완전히 지고 어둠으로 뒤덮인 후에야 한제는 돌아섰다.
“현라 스승님. 제자가 갑니다.”
그는 눈을 번득이며 중얼거리더니 얼음 조각 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낮과 밤이 몇 번이고 교차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만이 드넓은 바다를 가득 채웠다.
기온은 점차 높아졌고 대기는 축축해졌으며, 파도는 하늘마저 깨부수겠다는 듯 천천히 거칠어졌다. 마치 바다 아래에서 흉폭한 마수가 난동을 피우는 것만 같았다.
길이가 10만 척에 달하는 해룡이 해수면 위를 스치듯 날았다. 매우 빠르게 이동하는 해룡의 머리 위에는 가부좌를 튼 백의의 사내가 있었다.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하는 대신 해룡을 타고 이동하면서 체내의 수준을 조절하고 있었다.
‘고족 구역에서는 선족 구역에서만큼 큰 위기는 없을 거야. 그곳에는 현라 스승님이 계시니까.’
그는 한참 뒤에야 눈을 떴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밝은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고족 구역에서는 조용히 지내야겠어. 수련에만 집중하면서 환생하는 동안의 스승님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완수해야 해. 난 어쨌든 고족에 속해 있는 수련자니까.’
한제는 다소 슬픈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선족 구역에서는 청수 사형과 사도환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 그리고⋯⋯ 이천매도. 그게 아쉬울 따름이야. 허나 괜찮다. 다시 돌아가는 날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제는 가볍게 한탄했다.
‘시고 일맥과 극고 일맥의 구역에는 가지 않는다. 곧장 도고 황성으로 가서 선족 구역의 조성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봐야겠어.’
한제는 말없이 저 먼 곳을 보았다.
‘폐관수련을 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대천존이 되어야 해. 이후 스승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모완의 혼을 찾을 것이다.’
이모완을 떠올리자 한제의 눈에 짙은 슬픔이 어렸다.
‘모완⋯⋯ 네 영혼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영혼이 완전해야만 되살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허공에는 한 줄기 균열이 일어났다. 저물공간의 입구였다.
전에는 저물공간을 열었다가는 그 안에 담긴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이제 저물공간을 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동부계와 선강 대륙 사이의 힘을 완전히 상쇄시킬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저물공간에서는 핏빛이 번득이더니 동부계에서 한제의 이름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던 혈살검이 튀어나왔다. 서늘한 살기가 번득였다.
‘이건 도고일족의 것이지.’
한제는 검을 쥐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검에서 풍기는 살기는 기쁜 듯 한제의 손가락 주위를 맴돌았다.
‘또한 엽막의 것이기도 했다. 난 엽막의 머리를 전승할 때 그의 후손들을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지. 도고 일맥에서 분명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을 게야.’
혈살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매우 짙은 붉은 빛줄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고 한참 뒤 먹먹한 쿵 소리가 났다.
‘지금의 내 수준이라면 손쉽게 이 검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지.’
혈살검에서는 펑, 펑 하는 거대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검 표면에 수많은 균열이 일더니 뱀 껍질처럼 한 겹 벗겨졌다. 피처럼 붉은빛은 한층 더 선명해졌다. 이것을 손에 넣었을 당시만 해도 몰랐지만 지금 보니 검에는 한 층의 옅은 봉인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제는 그 검의 봉인을 깨뜨렸고 그러자 혈살검이 풍기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반경 1천 리의 해수면은 살기의 폭풍에 휩쓸린 듯 마구 철썩거렸고 이내 이 살기의 폭풍에서는 거대한 허상이 나타났다. 고족의 허상이었다.
허상은 갑옷을 걸친 채 오른손에는 가늘고 긴 혈살검을 쥐고 있었다. 검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는 하늘을 가를 듯 강력했다.
‘엽막의 고향, 스승님이 계시는 곳, 도고 일맥⋯⋯ 내가 지켜야 할 곳. 대체 어떤 곳일까?’
혈살검을 바라보다 거두어 넣자 하늘에 나타났던 허상은 흩어져 사라졌고 하늘은 다시 본래의 맑은 모습을 되찾았다.
‘선극검 조각을 흡수하면서 금속의 본원이 완성되고 오행이 하나로 합쳐졌지. 덕분에 내 수준도 약간 높아졌어.’
한제가 걷고 있는 수련의 길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본원으로 새로운 본원을 응집해야만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금속 본원을 완성하면서 한제의 수준은 공겁기 중기에서 후기에 이른 상태였다. 여기에 선조의 수준까지 일부 전승하기도 했다. 금궁에서 대천존 태양을 윤곽이나마 응집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과 오행의 본원은 포화상태야. 오행의 본원으로 이루어진 진신도 이미 완전해진 상태지. 그러니 이제는 허상의 본원 차례다. 만약 또 다른 허상의 본원을 두 가지 더 깨닫는다면 내 수준은 공겁기 절정에 이르게 될 터! 허나 허상의 본원을 깨닫기란 매우 어렵지. 평생에 걸쳐 고작 세 개만 깨달았을 뿐이니까.’
생각에 잠긴 한제는 어렵게 얻은 이 평온한 시간을 활용해 앞으로 자신이 걸어야 할 수련의 길에 대해 생각했다.
‘허상의 본원에 대한 깨달음에 의지해야만 수준을 높일 수 있다면 앞으로 나의 수련은 굉장히 어려워질 거야.’
한제는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그를 태운 해룡은 해수면을 가르며 나아갔다. 물보라가 일며 해수면이 거칠게 일렁였다.
‘이대로는 안 돼. 그런 방식으로는 수준을 높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어. 수준을 높일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해.’
며칠 뒤, 감겨 있던 한제의 두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 눈에는 약간의 피로감이 엿보였다.
‘허상의 본원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되 이 허상의 본원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길을 걷는 동안은 오행 진신과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에 집중해야 해.
오행 진신 중 물과 불, 흙은 이미 진신으로 응집됐고 금속과 나무만 남았다. 지금까지의 분석에 따르면 금속과 나무의 본원까지 진신으로 응집할 경우 오행 진신은 완전해진다.’
한제는 이 부분에서 날카롭게 눈을 번득였다.
‘그리 된다면 허상의 본원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공겁기 절정에 이를 가능성이 5할. 다음은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 차례다. 그 안에 담긴 천둥번개 본원은 이미 진신으로 응집됐으나 나머지 네 개의 본원인 살육, 태초, 묵멸, 금제의 본원은 그저 완성만 됐을 뿐이야. 만약 그 모두를 진신으로 응집해낸다면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은 완벽해지고 난 공겁기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허나 그전에 금속과 나무의 진신부터 응집시켜야 해. 그래야 내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한제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대천존 태양의 윤곽은⋯⋯ 그게 나타났던 건 내가 전승한 선조의 수준 일부와 깊은 관련이 있어. 선조의 유산은 내 수준을 높인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발휘하게 해 그 태양의 윤곽을 응집시켰지.
그 태양만 있다면 천우 혼개가 파괴된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나의 수준과 전력이라면 대천존과도 충분히 맞붙을 수 있어. 그들이 태양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한제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내 분석대로라면 오행 진신을 완벽하게 응집해내 수준이 높아지면 태양의 힘을 발휘하는 대천존과도 대적할 수 있어! 또한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까지 완벽하게 완성한다면 대천존 중에도 나를 이길 자는 적을 터.
그 후 동림종에서 얻은, 네 번째 허상의 본원인 윤회의 본원을 완성하고 수많은 꿈의 장막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것이다. 그리 되면 다섯 번째 허상의 본원도 손에 넣을 수 있어! 그리고 그때가 되면⋯⋯.’
한제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대천존도 더 이상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내게는 선강 대륙 허무 속의 분신도 아직 남아 있어. 아직 성장 중인 그 분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 내게 필요한 건 결국 시간이야!’
한제는 눈을 감은 채 저물공간 속 선조의 머리에 집중했다. 지난 며칠 내내 연구한 결과 한제는 선조의 머리를 자신의 대천존 태양 안에 완전히 융합한다면 흐릿한 윤곽뿐이던 태양이 더욱 또렷하고 굳건해지리라고 확신했다. 그럼 한제는 그 태양을 통해 선강 대륙의 진정한 열 번째 태양으로 등극할 수 있을 터였다.
한편, 한제는 저물공간의 물건들 중 하얀 머리카락과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인 주먹만 한 두개골도 있었다.
이 두 가지 물건에 한제는 매우 깊은 익숙함을 느꼈지만 끝끝내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철썩이는 파도는 갈수록 격해졌다.
선족 구역과 고족 구역 사이의 이 바다에는 선강 대륙 법칙의 힘이 깃들어 있었지만 한제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선강 대륙 허무 속에서 이미 그 법칙의 힘을 충분히 경험했던 그답게 이 법칙의 힘을 무시한 채 자신의 기운으로 해룡을 뒤덮어 더욱 빠르게 이동했다.
한편 하늘에는 검은 점 하나가 떠 있었다. 흡혈마수였다. 간만에 저물공간을 벗어난 녀석은 하늘을 가르며 기쁜 듯 포효했고 한제를 따라 고족 구역 쪽으로 향했다.
몇 달 뒤, 다시 두 눈을 번쩍 뜬 한제는 저 멀리 바다 끄트머리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대지를 보았다. 선기로 차 있었던 선족 구역과 달리 고족 구역의 검은 땅에서는 황량하고 거친 기운이 느껴졌다.
도고 사절단
황량하고 온통 검은빛인 고족 구역의 땅은 아름답고 섬세한 선족 구역과 달리 거칠고 광활했다. 특히 그 검은색 대지에는 자연스러운 압박감이 있었다. 이 압박감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대지를 향해 방출되기도 해, 마치 고족의 기운을 호흡하는 것 같았다.
선족은 한 명의 황제가 있는 것과 달리 고족 구역은 철저하고도 완전한 군주제에 따라 도고 극고 시고 이렇게 세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각 왕국 고황의 권리는 선황을 압도했다. 이곳의 황권은 매우 높아 모든 고족 수련자들의 심신에 드리워져 있었다.
선족의 경우 황국에 위기가 닥친다면 모두가 망설임 없이 도망칠 것이다. 허나 고족의 어느 황궁에 침입자가 있다면 결말은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침입자가 죽거나, 고족의 모든 부족원이 죽거나!
이게 바로 고족이었다. 이런 모습이 선족 수련자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정작 역대 선황들은 고황들만큼 강력한 황권을 원했다.
고족의 황제는 곧 하늘이었고 고조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 무엇보다 혈맥을 중시하는 존재들로 그 고귀한 혈맥은 어떤 힘으로도 제거할 수 없었다.
심지어 대천존이라 해도 고황의 죄를 규탄하거나 그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구제 대천존이 다른 대천존들과 함께 선황을 농락한 것과 같은 일이 고족에서는 있을 수 없었다.
수준으로 보자면 대천존보다 높은 존재는 없었지만 권리만큼은 해당 일맥 모든 부족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황이 위였다. 그렇기에 대천존과 고황의 명령이 상충한다면 고황을 따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정도였다.
이는 선강 대륙 최강의 대천존이 세운 법칙 때문이었다. 고족 구역의 중심이자 세 일맥의 접경 지역인 성지에 머물고 있는 그는 고족을 보호하는 것이 고황의 존재 목적이라고 보았다.
한제는 고족과 관련한 이런 이야기들을 동부계에서 현라를 통해, 그리고 쌍자 대천존이 몸담은 자양종의 고서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족 구역에 막 도착해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고족 구역은 너무나 넓었고 한제에게는 도고 일맥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가 없었다.
‘고족 세 부족 중 시고 일맥이 가장 강력하고 극고 일맥이 가장 단결력이 크다고 했지. 도고 일맥은 부족원이 가장 많지만 가장 약한 세력이라고…’
검은 땅을 밟으며 나아가던 한제는 이곳의 기운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내 쪼그려 앉은 그는 흙을 한 움큼 쥐어 코앞에 대어보았다. 체내에 존재하는 고족 혈맥을 진동하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