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25
‘스승님, 제자가 왔습니다.’
한제는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 바다에 인접한 고족 구역의 대지에는 거대한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 돌을 쌓아 만든, 전체적으로 검고 거대한 성은 굉장히 거칠어 보였지만 동시에 강력한 패기도 느껴졌다. 그 패기는 모든 고족 수련자에게 깃들어 있는 듯했다.
도시의 건물들도 하나같이 거칠고 거대했다.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는 고족 사람들 가운데 가죽 갑옷을 입은 몇몇 사내가 끊임없이 호통을 쳐댔고 사람들은 두려운 얼굴로 그들을 피했다.
성문 밖의 인파도 엄청나 도시는 활기가 넘쳤다.
한제는 성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말없이 고족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그는 고요와 고마, 고신까지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체구가 다양했으나 하나같이 미간이나 양쪽 눈동자에 반점이 새겨져 있었다. 한제는 그런 모습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그로서는 이렇게 많은 고족 사람들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성문 옆에는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 일고여덟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미간이나 두 눈동자에서는 대여섯 개의 반점이 번적였다. 이들은 성문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을 성급한 표정으로 훑어보며 낮게 호통을 쳐댔다.
“빨리! 뒤쪽도 빨리 움직여! 성문은 1각 후에 닫힌다!”
“흑석성(黑石城)에 들어온 후로는 각자 흩어져 사흘을 성안에 머무른다! 성주의 명령 없이는 외출할 수 없어!”
사내들의 외침에 방금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성문 근처는 점차 조용해졌다. 성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1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성문 안팎은 텅 비었다.
성으로 들어간 고족 사람들은 곧장 신속하게 흩어졌다. 남은 것은 근 1백 명에 달하는 가죽 갑옷 차림의 사내들뿐이었다. 이들은 성안의 중요해 보이는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서서 수시로 성문이나 성 중앙에 높이 솟은 건물을 바라보곤 했다.
성문 근처가 텅 비다 보니 홀로 서 있는 한제의 모습은 성문 밖 사내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고는 돌아섰다. 이 도시에서는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자신이 원하는 상세한 지도 옥패를 구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데 그가 막 돌아선 순간,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멈춰!”
뒤이어 일고여덟 명의 무리에서 두 사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미간에 각각 다섯 개의 반점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고신인 듯했다.
한제는 미간을 팩 찌푸리면서도 일단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넌 누구냐? 어디에서 왔지?”
둘 중 한 사람이 눈을 형형하게 번득이며 호통치듯 물었다.
“이한제.”
한제는 짧게 답했다.
“아까부터 서성대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더군. 신분 영패를 내놔라!”
또 다른 사내가 한제에게 오른손을 뻗었다.
“족인(族印)도 내보여!”
한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미간에 아홉 개의 반점이 천천히 나타났다.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는 반점에 한제는 고족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홉 개의 반점이 드러난 순간, 두 사내는 흠칫 놀라더니 바짝 졸아든 눈으로 연거푸 몇 걸음을 물러나 포권을 했다.
“신성(神聖)님을 뵙습니다! 신성님께서 오실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희의 불손한 태도에 대해서는 신성님의 뜻대로 처벌해주십시오.”
두 사람은 매우 공손했고 거의 열성적인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들의 남은 무리 역시 재빨리 다가오더니 포권을 했다.
“신성님을 뵙습니다!”
한제는 이 상황이 의아해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고족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9성급 고신임을 알게 되자 신성님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9성급 고요와 고마는 요성(妖聖)과 마성(魔聖)인가?’
한제는 상황을 바탕으로 추론을 해나갔다.
‘내가 얻은 엽막의 유산은 불완전하다. 기억은 거의 없지. 고족이라면 어느 일맥이든 고신과 고요, 고마로 나뉜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렇다면 9성급 고신이자 고요이자 고마라면 어떻게 부르는 걸까?’
한제는 동부계에서 고족 두 번째 손겁을 경험하면서 혼혈을 얻고 고조의 인정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동안 고족으로서의 육체를 수련한 적은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고신과 고요, 고마의 반점을 모두 아홉 개로 채운 상태였다.
‘이들의 태도로 보아 9성급 고신은 매우 드문 모양이군. 어쩌면 고족 구역의 가장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한제는 갖가지 추론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혹시 지도 옥패를 가진 자가 있느냐?”
한제가 물었다. 한데 만약 지금 그의 말을 선족 사람이 들었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족 특유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내 중 하나가 흠칫 놀라더니 곧장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려 옥패를 하나 소환했다.
“완전한 지도는 아닙니다. 그저 대략적인 범위만 표시되어 있지요.”
사내는 소환한 옥패를 공손하게 건넸다. 한제는 그것을 받아 들더니 고족이 힘으로 내용을 살폈다. 선족과 고족 모두 옥패를 사용하지만 그 안에 내용을 기록하고 그 내용을 살피는 데 필요한 기운은 달랐다.
상대의 말대로 옥패의 지도는 매우 간략했다. 인근 지역은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으나 멀어질수록 모호하고 흐릿해졌다.
하지만 한제는 이 지도와 이미 알고 있던 정보를 종합해 이곳이 고족 구역의 서른여섯 개 군 중 상단 열두 개를 아우르는 시고 일맥의 거주지임을 알아냈다. 그 아래로 극고 일맥과 도고 일맥이 나란히 차지해 세 일맥의 구역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 흑석성은 시고 일맥 거주지 중 목상군(木桑郡)의 가장자리였다.
“왜 이 도시를 봉쇄하는 것이냐?”
한제는 옥패를 움켜쥔 채 물었다.
“저희는 성주로부터 1각 안에 흑석성의 사방을 텅 비우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계도 황자와 도고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제의 앞에 있는 두 사내 중 한 사람이 얼른 답했다.
“도고 사절단? 난 오랜 폐관수련을 마치고 방금 나와 아는 바가 없으니 상세히 설명해보도록.”
한제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번득이자 사내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공손하게 답했다.
“도고 사절단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저 고족 구역 전역으로 파견된 도고 황족이 지난 수백 년간 끊임없이 아름다운 여인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도고의 황제가 적합한 비를 찾는 중이라 합니다.”
“저로서는 그 소문의 진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허나 도고 사절단이 계도 황자의 안내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건 시고 황제도 분명 이 일에 동의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성주도 성을 봉쇄하라 명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내가 설명했다.
“비를 찾고 있다?”
한제는 그 말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후에 지켜야 할 도고 일맥의 황제가 비를 고르는 일로 시고와 극고 왕국에 사절단까지 보냈다는 사실이 조금 황당했을 뿐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도고 일맥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군. 그들이라면 도고의 열두 개 군이 포함된 상세한 지도도 가지고 있겠지?’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몇 가지 더 질문을 하려 했다. 이때 그는 돌연 표정이 변하더니 고개를 들어 성 쪽을 바라보았다. 성안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후 푸른 갑옷 차림의 고족 병사 두 부대가 빠른 걸음으로 나타났다.
1천 명에 달하는 그들은 곧장 성문 밖에 도열(堵列)하더니 서늘한 살기를 드러냈다. 이어서 성문에서는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선두에 선 자는 몸이 우락부락한 사내였다. 10척이 넘는 키 때문에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그는 금색 갑옷 차림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며 위엄이 넘쳐흘렀다.
그 왼편 한 걸음 뒤에서 따르고 있는 것은 푸른 도포를 입은, 하얀 얼굴 위로 턱에 세 갈래 수염을 기른 채 검은 부채를 든 매우 수려한 외모의 중년 사내였다. 그에게서는 선인의 느낌이 풍겼다. 허나 그의 두 눈에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특히 한 덩어리 안개가 회오리치고 있는 듯한 왼쪽 눈동자는 더욱 기이해 보였다.
마지막 한 사람은 흑의의 청년이었다. 금갑 사내의 오른쪽 뒤에 선 그의 냉랭한 얼굴 위로 은근한 포악함과 살기가 드러났다. 그의 몸 안팎에서는 더없이 서늘한 화염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금갑의 사내가 이들의 수장인 듯했다.
도열한 두 부대의 병사들 앞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던 금갑의 사내는 이내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홱 틀어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 붙어 있던 두 사내 역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들의 눈은 한제의 미간에 닿은 순간 번쩍 빛났다.
계도 황자
“신성님이신 성주님, 요성님, 마성님을 뵙습니다!”
한제를 검문했던 사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극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금갑의 사내는 그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한제를 향한 그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초면이군, 족우(族友). 나는 흑석성의 성주 양운이라 하네. 혹 무슨 도움이라도 필요한가?”
이내 그 사내는 한제에게 포권을 하며 물었다.
“난 공사일세.”
푸른 도포를 입은 요사스러운 눈빛의 중년 사내 역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오직 흑의의 청년만이 한제를 슥 훑어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이한제라 하네.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차에 계도 황자와 도고 사절단이 이곳에 올 예정이라는 소문을 듣고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네. 허나 자네들이 불편하다면 이만 가보도록 하지.”
한제 역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그는 자신의 수준과 신분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거만하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었다. 상대가 먼저 예의를 차린다면 그 역시 그에 걸맞은 예를 보였다.
“누구든 우리 흑석성에 온 사람이라면 손님이지. 얼마든지 머물러도 된다네. 이것도 다 인연 아니겠는가. 하하하!”
금갑의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고신의 힘에 한제는 친밀함을 느꼈다. 이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성주를 비롯한 세 사람 곁에 이르렀다.
“이 형 역시 신성인 것을 보면 두 번째 손도 통과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융요연마(融妖煉魔)의 단계에 이르렀을 텐데 진척이 어떠한가?”
금갑의 사내는 한제를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융요연마?”
한제는 조용히 되물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흑의의 청년이 불만스런 기색이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훑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通), 융(融), 연(煉)의 관문은 결코 쉽지 않아. 저자에게서 요기도 마기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모색 단계에 불과하겠지. 양운, 자네가 쓸데없는 질문을 한 거라고.”
“맹락!”
금갑의 사내는 미간을 팩 찌푸리며 청년을 노려보더니 다소 곤란한 듯 한제를 향해 포권을 하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형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맹락 이 친구는 마성으로 인해 성격이 원체 좋지 못하네. 그러니 괘념치 말게. 통, 융, 연은 분명 쉽지 않지. 나 역시 그다지 많이 나아가지는 못한 상태라네.”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