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26
사내는 사과에 한제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본래 작은 일에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다.
이후로도 금갑의 사내와 요성 공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제의 내력을 짐작해보려 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파악해내지 못했다. 자연스레 대화는 다소 시들해져갔다.
잠시 적막이 이어지고 있을 때, 한제가 불쑥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공사 역시 그를 따라 고개를 들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한데 막 시선을 거두려던 그 순간, 사내의 표정이 급변했다. 동시에 양운과 맹락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공손해진 상태였다.
하늘에서는 구름과 바람의 기색이 변하면서 층층의 파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사이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주먹이 하늘을 강타하는 소리였다.
콰쾅! 쾅!
우렁찬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하늘은 무너져 내릴 듯 더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게 점점 많은 균열로 뒤덮인 하늘 뒤편에서 두 개의 손이 불쑥 빠져나와 갈라진 하늘에 거대한 균열 하나를 찢어냈다. 뒤이어 몸길이가 수십만 척에 달하는, 머리에 뿔이 하나 달린 허상의 인영이 그 사이로 빠져나왔다. 고요의 허상이었다.
푸른 갑옷을 입은 고요의 온몸에서 마기가 발산됐다. 이 마기는 어찌나 짙은지 한 덩어리 안개를 형성한 채 사방을 뒤덮고도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피처럼 붉은 두 눈을 포악하게 번득이던 허상은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동시에 균열을 빠져나오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내려섰다. 그 발이 대지에 닿은 순간, 모래 먼지가 파도처럼 확산됐다.
한제는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는 한편 두 눈을 형형히 빛냈다.
‘일반적인 고요가 아니다!’
동부계에서 본 고요는 고신과 마찬가지로 본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에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본체를 드러내도 이성과 지능은 유지됐다. 저렇게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저 고요가 발산하는 요기는 대천존의 기운에 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거대한 고요가 땅에 내려서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은 순간, 양운과 공사, 맹락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뒤편의 1천 명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성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모든 고요도 분분히 고개를 조아렸다.
성 안팎을 통틀어 꿇어앉지 않은 사람은 한제뿐이었다.
양운은 한제가 아직도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공사도 흑의의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겨우 황자 앞에서 무릎을 꿇을 한제가 아니었다. 대천존이라도 그의 무릎을 꿇릴 수는 없었다. 선황 앞에서도 그는 무릎 꿇지 않았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고요와 그 머리 위에 선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고요의 머리 위에 서 있는 사람은 황포 차림에 검은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청년이었다. 평범한 외모였지만 그에게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귀한 기운이 풍겼다.
그의 뒤로 남색 치마를 입은 여인도 있었다. 무척 어려 보이는 그녀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한제를 힐끔거렸다.
황포 차림의 청년 역시 홀로 꼿꼿이 서 있는 한제를 쳐다보았다.
그때, 하늘에서는 다시금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청년이 시선을 옮겼다.
하늘의 균열 안에서 거대한 허상이 하나 더 걸어 나왔다. 좀 전의 것보다는 약간 작아 길이가 10만 척 정도에 이르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린 검은색 고마였다.
고마는 광기와 포악함이 어린 붉은 두 눈을 번득이더니 포효하며 내려섰다.
녀석의 머리에는 일곱 사람이 있었는데 두 여인과 다섯 사내였다. 이들은 고요의 머리 위에 선 청년을 향해 포권을 하더니 이내 흑석성을 훑어보았다.
홀로 꼿꼿이 선 한제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족인의 불손함이 우습구나.”
고마의 머리 위에 앉은 일곱 사람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인 황포 차림의 청년이 양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양운, 저자는 자네가 새로 포섭한 수하인가?”
“황자님, 저는 이자와 잘 알지 못합니다. 방금 막 이곳에 나타나 말하길⋯⋯ 황자님을 뵙고 싶다고 했을 뿐입니다. 이자에게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한 제 잘못입니다. 지금 당장 이자를 죽여 그 죄를 씻도록 하겠습니다!”
양운의 눈에서 분노와 살기가 이글거렸다.
“그럴 필요 없다!”
냉랭하게 외친 황자는 눈을 번득였다.
“타락, 저자를 죽여라!”
황자의 외침에 그를 태우고 있던 고요가 우렁차게 포효하더니 한제를 향해 거대한 오른발을 뻗었다. 당장 한제를 움켜쥐어 으스러뜨리려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녀석의 발톱이 여러 갈래의 검은 선으로 변해 짙은 요기를 품은 채 한제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이 고족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 일만 보더라도 고족의 황권이 어떤지 알 수 있겠군.’
한제가 이곳에 남으려 한 것은 지도 옥패를 얻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고족의 황권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직접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데 권력으로는 황제에 한참 못 미치는 황자에게조차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자신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방금 전까지 그리 공손했던 양운이 자신에게 살기를 내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황자를 향한 이들의 숭배심은 자발적이었다. 만약 황자가 명한다면 망설임 없이 자결이라도 할 기세였다.
‘시고가 이렇다면 도고 역시 이러할 터. 어쩌면 난 정말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도⋯⋯.’
한제가 세 번째 걸음을 내딛었을 때, 고요가 뻗은 발이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요의 발과 한제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졌다. 한제가 그대로 고요의 발에 붙들릴 것만 같았다.
허나 지켜보는 모든 사람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권에 불손하게 구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라는 건가.”
한제는 조용히 읊조리며 동시에 고요의 발을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콰쾅!
고요의 발이 허공을 스쳐갔을 무렵, 한제는 이미 도고 사절단을 태운 고마를 향해 가고 있었다.
허공을 움켜쥔 고요의 붉은 눈에는 더욱 짙은 광기가 어렸다.
“캬오오오!”
녀석은 우렁차게 포효하며 오른발을 들어 한제의 등을 향해 다시 뻗었다. 한데 그 순간, 녀석의 머리에 선 황자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제를 보는 그의 눈빛은 더없이 진중했다.
한편, 이를 지켜보든 이들 모두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한제가 그대로 고요의 발을 지나쳐 나오는 모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양운 또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9성급 고신인 그는 자신이라면 절대 한제와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요성의 몸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요성인 공사 역시 심신이 뒤흔들렸다. 한제에게서 어떠한 요력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뜻이었다.
“저, 저자는 대체⋯⋯?”
그 누구보다 크게 놀란 것은 맹락이었다. 이전까지 한제를 얕잡아보고 있었던 이 마성은 찬 숨을 헉 들이마셨고 두 눈에서는 짙은 전의가 번득였다.
한편, 고마 머리 위의 일곱 사람, 황명을 받들어 비를 고르기 위해 찾아온 도고 사절단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허나 한제가 고요의 발을 스쳐간 순간, 그들의 표정은 차게 굳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시고 일맥끼리 해결해야 할 일이니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뜻밖에도 상대가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제의 뒤에서 고요가 다시금 발을 뻗어왔다. 그러자 한제는 미간을 팩 찌푸리더니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고요의 오른발이 코앞에 이른 순간 몸을 홱 돌리며 고요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고 싶은 것이냐?”
짧은 한마디는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리지도 하늘과 땅의 기색을 변하게 하지도 않았다. 허나 그 눈에 어린 광기에 고요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동시에 녀석의 눈에 어려 있던 포악한 빛은 거대한 두려움으로 변했다. 한제의 눈빛만으로도 죽음의 위기를 느낀 듯했다.
녀석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그 거대한 몸으로 한제를 향해 연거푸 절을 올렸다.
이 광경에 모든 이들은 찬 숨을 들이마시며 충격에 빠졌다.
맹락 또한 좀 전까지의 전의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고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었다. 양운은 더욱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 한제를 죽이겠다고 말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한편, 황자와 그의 곁에 선 여인은 몸을 훌쩍 날려 허공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특히 자신이 부리는 고요가 선족 천존과도 맞붙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황자가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너, 너⋯⋯.”
계도 황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한제는 고요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서서히 고마에게로 옮겼다. 그러자 붉은 두 눈으로 포악한 광기를 번득이고 있던 고마 또한 겁먹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벌벌 떨더니 납죽 엎드렸다.
녀석의 머리에 있던 일곱 사람은 자신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한제의 모습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노인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은 즉각 물러나며 각자 고족의 힘을 폭발시켰다. 넷은 9성급에 두 사람은 이미 통, 융, 연의 단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허나 이들 중 가장 강력한 노인은 다가오는 한제를 보고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진중한 표정으로 낮게 포효하더니 미간과 두 눈에 각각 아홉 개의 반점을 드러냈다.
송세정
총 스물일곱 개의 반점이 어스름한 빛을 발하는 사이 노인의 뒤로 세 개의 거대한 허상이 나타났다. 고신, 고요, 고마의 허상이었다.
하늘을 떠받칠 듯 우뚝 솟은 세 허상은 한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네와 시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건 우리 도고 일맥과는 무관한 일일세!”
노인은 내심 씁쓸함을 삼키고 있었다. 상대가 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양운을 비롯한 세 사람은 선족으로 따지면 공현기 수준. 수준이 같다고는 해도 혈맥에 따라 지위는 달라지겠지. 저 노인은 신, 요, 마를 합쳐 총 스물일곱 개의 반점을 가진 것으로 보아 공겁기 수준에 상당할 터.
허나 같은 스물일곱 개의 반점을 가졌다 해도 난 고족의 육체로 저자보다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그것도 어쩌면 혈맥과 관련된 것인지도 몰라.’
한제는 걸음을 멈추지도 노인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엽막의 수준은 칠채보다도 높았지. 그러니 칠채가 이광의 도움을 받았던 게지. 조성에서 알게 된 바에 빠르면 이광의 수준은 천존이었을 터. 약천존이었다면 죽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스물일곱 개의 반점을 완전히 융합하고 모든 손겁을 통과한 엽막의 실력이 천존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어. 그런 수준에 이른 고족은 선족 천존의 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 1천 명을 넘기지 못하겠지.’
한제는 엎드려 덜덜 떨고 있는 고마의 오른손을 딛고 몸을 훌쩍 날려 녀석의 머리 위에 섰다. 그의 시선이 향한 순간, 노인은 표정이 급변한 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한제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을 견딜 수 없는지 급기야 몇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도고 황성에서 왔나?”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일대종사의 기운이 형태 없이 퍼져 나가 입을 바싹 마르게 하고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노인이 이전에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은 도고의 황제를 마주했을 때뿐이었다.
허나 엄밀히 말해 도고의 황제를 마주한 상황에서 그를 압박하는 것은 황제가 선임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황권이었다. 반면 눈앞에 선 저 백발 청년의 위압감은 그 자체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도고 황제로부터 엽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저는 수백 년 동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를 고르는 임무를 맡았지요. 이번이 여섯 번째 파견입니다.”
“수백 년 동안 비를 골랐다?”
의아함을 느낀 한제가 되물었다.
노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군. 그래서, 찾았나?”
“이번 파견에는 계도 황자와 함께 여섯 개의 군을 돌아다니며 세 여인을 골랐습니다. 흑석성에서 마지막 한 명의 여인을 골라 도고의 황성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요.”
노인은 얼른 답했다. 감히 거짓말을 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노인이 오른손을 들어 올려 휘두르자 고마는 몸을 바르르 떨었고 그런 녀석의 머리 위에서 파문이 일었다. 그 안에서는 무척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이 걸어 나왔다. 두려움이 어린 눈으로 나타난 두 여인은 한제를 향해 허리를 살짝 굽혔다.
“이들이 이번에 선발된 여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