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0
“한제야, 일단은 푹 쉬도록 해라. 사흘 뒤에는 내 너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닐 것이다. 아마 네게 여러 방면에 도움이 될 게야. 내가 제자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니라!”
한제를 바라보던 현라는 이내 몸을 훌쩍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집은 네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절을 올린 한제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고 사방을 살폈다. 눈에 어린 복잡한 빛은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다.
“그래, 도고 일맥에 남도록 하자.”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의자에 앉은 그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그는 별일이 없는 한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었다. 여전히 이곳은 낯설게 느껴졌지만 현라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 ★ ★
사흘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그동안 이 도원경과 같은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면서 지낸 한제는 사흘 뒤 현라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한 걸음을 내딛어 파문과 함께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도고전 앞에 이르러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현라는 안개에 휩싸인 산봉우리의 도고전 앞에 서 있었고 그 뒤로 아홉 사람이 늘어서 있었다. 일곱 명의 사내와 두 명의 여인으로 하나같이 수준이 범상치 않았다. 모두 스물일곱 개의 반점을 가득 채운 뒤 도고의 칭호를 얻은 자들이었다.
한제는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을 느끼며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중 가장 수준이 높은 것은 한 노인이었는데 한제는 그로부터 선족 약천존에 상당하는 기운을 느꼈다.
나머지 여덟 명은 천존 수준이었다.
한제와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유로운 표정의 한제와 달리 그 아홉 사람들은 모두 심신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한제는 거대한 회오리처럼 그들의 눈빛을 삼키고 있었다. 심지어 체내에 존재하는 고족의 힘마저 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소존(小尊)을 뵙습니다!”
잠시 후, 아홉 사람은 곧 한제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한제야, 이들은 여러 해 동안 나를 따랐다. 앞으로는 네 명에도 복종할 것이다.”
현라는 웃음을 머금은 채 아홉 사람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한제가 조용히 답했다.
한데 미소를 지으며 막 말을 이으려던 현라가 돌연 미간을 팩 찌푸리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제 역시 무언가를 느끼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홉 사람도 그제야 변화를 감지한 듯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하늘에는 대량의 파문이 일어나 층층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문에서 번득이던 빛이 짙은 보라색 기운이 되어 하늘을 뒤덮었고 낮은 포효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거대한 팔이 드러났고 뒤이어 키가 수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사내가 파문 안에서 성큼 나왔다.
사내의 뒤로 몸길이만 수천 척에 이르는 고요가 따라붙었고 눈 깜짝할 사이 보라색 기운 안에서 백 명에 달하는 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구 하나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천존에 상당하는 수준을 가진 자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금존에 비할 만했다. 개중에는 고신도 고요도 고마도 있었다.
이들은 허공에 나란히 서더니 보라색 기운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황을 뵙습니다!”
포효에 가까운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격렬하게 꿈틀거리던 보라색 기운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황포를 입고 관을 쓴, 짙은 위엄이 절로 느껴지는 그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그의 뒤에는 허리를 굽힌 두 노인이 따르고 있었다.
두 노인을 훑던 한제의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번득였다. 두 사람은 선존 약천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황을 뵙습니다!”
현라 휘하의 아홉 사람 또한 공손한 표정으로 황포 차림의 사내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직 현라와 한제만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현존, 반갑군.”
황포의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위엄은 즉각 녹아내렸다. 누구라도 그런 그의 모습에 친밀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한제는 말없이 황포 사내, 고황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로서는 상대와 선황 연도진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상대는 수준도 기질도 선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지만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엄청난 숭상을 받고 있었다. 현라 휘하의 아홉 사람만을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수준은 천존에 상당할 뿐이야.’
허나 도고 황제의 황권은 도고 일맥 내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몰라도 한제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현라가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흘 전, 도고전의 향로에서 짙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네. 우리 도고 일맥에 또 한 명의 강자가 탄생했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보러 왔을 뿐이야. 현존, 이자가 바로 그 강자인가?”
도고 황존은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내 제자일세. 자네도 들어보았을 텐데 선족의 백발 약천존, 이한제! 내가 환생할 때 이 아이가 나를 대신해 우리 도고 일맥을 수호할 걸세.”
현라는 덤덤하게 대답하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도고 황존을 바라보았다.
“한제야, 우리 도고 일맥의 황존이다. 앞으로 네가 지켜야 할 사람이기도 하지. 만약 저자가 퇴위를 하게 되면 넌 여러 황자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그를 새로운 황존으로 세워야 해. 그것은 대천존의 권리다!”
한제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심신은 크게 진동했다. 황존의 선택권이 대천존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족의 황권과 대천존이 오랜 세월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라! 계도 황자가 내게 도움을 구한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
그때, 돌연 황존의 곁에 있던 한 노인이 고민에 빠져 있는 한제에게 외쳤다.
“대천존의 제자라도 우리 도고 일맥 사람이라면 규칙에 따라야지! 도고 일맥 사람이라면 대천존을 제외한 모두가 도고 황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얼른 무릎을 꿇지 않고 무얼 하느냐!”
노인이 두 눈을 서늘하게 번득이며 냉랭하게 말했다.
사방은 일순 고요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한제에게로 쏠렸다.
도고 일맥에는 분명 노인이 말했던 것과 같은 규칙이 있었다. 도고 황존 아래, 대천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반드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강력한 황권을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이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황권에 대한 반항으로 인식됐다. 그리고 고족 내에서 황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지는 죄는 거의 없었다.
현라라고 해도 이 말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대천존이라 해도 도고에 속해 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천존이 되기 전까지는 그 자신도 당시의 도고 황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도고 황존은 미소를 띤 채 한제를 바라보았지만 속으로는 냉소하고 있었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향로에서 그 엄청난 연기를 일으킨 사람을 확인하고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만약 추측이 틀렸다면 상대를 부하로 삼을 생각이었다. 허나 만약 추측이 맞다면 그는 상대가 대체 얼마나 비범한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현라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거냐. 심지어는 나조차도 거절했던 현라인데! 대체 무엇 때문에 나도 여섯 방울 밖에 얻지 못한 고조의 피를 너는⋯⋯ 너는 무려 열 방울이나 얻은 것이냐! 게다가 마지막 방울은 다름 아닌 혼혈이었지!’
도고 황존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두 눈 깊은 곳에서는 질투와 시기심을 찾아볼 수 있었다.
‘현라가 숨긴 덕분에 그 일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심지어 현라는 신분을 막론하고 이 일을 발설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했지. 허나 대천존에게 내 생사를 결정할 권리는 없어.
그가 그런 선언을 한 것은 자신의 제자라면 고도 대천존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일 터! 하지만 저자는 고조의 직계 후손이 아니다. 고도 대천존이 저런 자를 인정할 리 없어!’
당시 한제가 혼혈을 얻은 순간부터 시작된 질투는 눈앞의 상대가 정말로 선족 구역에서 이름을 떨친 백발 약천존, 대천존 아래 최강자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불타올랐다. 하지만 도고 황존은 이를 애써 억눌렀다.
아버지 같은 스승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도고 황존을 힐끗 훑어본 뒤 방금 전 자신에게 일갈한 노인에게로 시선을 옮기면서 눈을 번득였다.
“뭐라고 했느냐? 다시 한번 말해봐라.”
한제가 말했다.
노인은 선족 약천존에 비할 만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득이는 한제의 눈빛에 표정이 급변하고 말았다. 그의 체내 고족의 힘이 한제의 눈빛에 깃든 한 줄기 위압감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콰쾅 하고 울렸다. 더욱이 한제의 눈빛을 받은 순간 체내의 혈맥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만두게. 내 제자의 무릎을 꿇리기 위해서 온 것인가? 이 아이는 도고 일맥을 수호할 사람으로 내가 직접 임명한 자야.”
현라가 살짝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도고 황존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뒤쪽에 있는 노인을 살짝 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서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물러나라. 현존의 제자라면 나와 지위가 같다고 할 수 있지. 어딜 감히 끼어 드느냐!”
노인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온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그것이 황존의 호통 때문인지 한제의 눈빛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한제라고 했지? 네 이름은 익히 들었다. 선족 구역에서 백발 약천존으로서 이름을 날렸을 당시만 해도 어째서 우리 도고 일맥에서는 그런 천재가 나지 않는 것인지 아쉬워했지.
한데 이리 보게 되니 정말 기쁘구나! 이렇게 강력한 대천존 아래 최강자가 우리 도고 일맥의 사람이라니, 이것이 큰 경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하하하!”
도고 황존은 호탕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시(常侍)!”
뒤이어 도고 황존이 웃음을 머금은 채 외치자 뒤에 있던 또 다른 노인이 얼른 허리를 굽혔다.
“예!”
“도고 일맥에 널리 알려라. 후에 우리 도고 일맥을 수호할 이 이한제는 나와 지위가 같으니 모든 고족이 참여하는 대전(大典)이 아닌 자리에서는 내게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다고! 이에 불만을 품는 자가 있다면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명 받들겠습니다!”
노인이 공손히 답했다.
“이한제, 이것은 내가 내리는 상이다.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 마음대로 황궁에 들어와 나를 알현할 수 있다. 그곳에서 너는 차기 황존의 후보라 할 수 있는 내 아들들 역시 직접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도고 황존은 미소를 띤 채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보라색 빛이 번득이더니 옥패가 되었다. 황존은 이 보라색 옥패를 한제에게 건넸다.
한제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도고 황존은 짜증도 내지 않고 그저 웃으며 한제가 옥패를 받아가기를 기다렸다.
현라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제가 이곳에 남아 있으려면 반드시 도고 일맥에 녹아들어야 하며, 동시에 황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한제의 성장 역시 현라의 예상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여태까지 내내 한제를 관찰해 오면서 그의 성장에 흐뭇해하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정도 수준에 이른 이상 한제는 고족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천천히 황권을 받아들이며 도고 일맥에 융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