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5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발은 두 걸음을 더 나아가 210번째 계단에 이르렀다.
그 순간, 체내의 본원과 수준, 고족의 힘 등은 점점 격렬해지는 고도산의 압박 아래 마침내 얇은 한 가닥의 힘을 배출해냈다.
선력과 고족의 힘이 합쳐져 형성된 이 한 가닥의 힘은 선력이기도 했고 고력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한제 자신의 힘이었다.
그 순간, 현라는 물론 고도 대천존조차 두 눈을 번쩍 떴다.
파란 하늘이 어느새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하늘에서 뿜어내고 있는 무궁무진한 금빛이 사방을 뒤덮으며 바깥쪽으로 빠르게 확산돼 눈 깜짝할 사이 반경 10만 리 하늘을 물들였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이 금빛 하늘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금빛은 신통술이나 법술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이 놀라운 광경에 고개를 번쩍 쳐든 현라의 두 눈동자에 금빛 하늘이 비쳤다.
금빛 하늘 아래, 검었던 고족의 대지는 더 짙어졌다. 온 대지와 산봉우리가 모조리 무궁무진한 검은 빛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심신이 진동할 정도로 짙은 검은색이었다.
“이것은⋯⋯ 구곡삼상(九曲三相)의 첫 번째 상(相), 금천흑지(金天黑地)!”
경악한 듯 외친 현라는 찬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구곡삼상은 선조와 고조가 탄생했을 당시 나타난 징후였다. 그중 구곡은 고족을 위한 것이고 삼상은 선족을 위한 것으로 이전부터 고조와 선조가 탄생했을 때를 제외하고 이런 현상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사방은 죽음과 같은 적막으로 뒤덮였다.
허나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장본인인 한제는 이러한 변화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 그는 3백 번째 계단을 밟는 것, 이를 통해 체내의 선력과 고족의 힘을 융합하는 목표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빛 하늘과 검은 대지가 나타난 순간, 한제의 오른발은 211번째 계단에 올랐다. 그리고 열한 번째, 열두 번째, 열세 번째⋯⋯.
그렇게 219번째 계단에 놀랐을 때, 한제의 몸은 쾅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곧장 빠르게 융합해 금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몸을 억지로 융합하는 데 살육의 힘을 쓰는 것조차도 아끼지 않았다. 원신이 소멸되지 않는 이상, 영혼이 죽음을 맞지 않는 이상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다시 융합될 수 있었다.
다만 고도산의 어마어마한 위압감 아래에서는 이러한 융합이 천 번 만 번 반복해 진행되더라도 무적이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원신과 영혼도 그 위압감 아래 결국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220번째 계단에 발을 올린 순간, 펑 하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제의 육체는 수십 차례 무너져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가 끝내 다시 응집됐다.
한제의 몸이 다시 안정을 되찾은 순간, 고요했던 금빛 하늘과 검은 대지에서는 돌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렇게 또렷하지 않았던 이 소리는 금빛 하늘과 검은 대지 사이를 맴돌면서 점점 또렷해졌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면 바람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 땅에는 바람이 아예 불지 않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데 들리는 바람 소리는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그리고 하늘에 바람의 노래가 울려 퍼진 순간, 현라의 표정이 급변했다.
산 정상 탑 주변의 네 기둥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회색 옷차림의 사람들 역시 동시에 두 눈을 번쩍 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태까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던 그들의 표정에도 변화가 일었다.
탑 꼭대기 층,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춘 인영이 중얼거렸다.
“창궁풍곡(蒼穹風曲)⋯⋯ 구곡의 첫 번째 곡⋯⋯.”
이때 한제의 체내에는 선력과 고족의 힘이 융합하면서 이루어진 힘이 한 갈래 더 늘어났다. 이 힘은 그의 체내를 흐르는 대신 묵직하게 가라앉은 채 선력과 고족의 힘이 끊임없이 융합되면서 서서히 커져갔다.
한제는 그 힘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선력이나 고족의 힘을 능가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숱한 실패만을 겪었던 융합의 결과물이자 그가 그토록 갈망해 온 힘이었다.
한제의 귀에도 바람의 노래가 닿았다. 하늘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노래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한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천역주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후로는 두 걸음을 뗄 때마다 몸이 견디지 못하고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가도 다시 응집됐지만 그의 원신과 영혼도 버티지 못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곧 한계가 찾아올 터였다.
230번째 계단. 한제는 왈칵 피를 토해냈다. 계단 위에 뿌려진 피는 소름 끼치는 무늬를 그렸다.
한데 그의 피가 계단에 뿌려진 그때, 하늘에서는 바람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둥소리였다. 낮은 고함과 같은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운율을 품으며 울려 퍼졌다.
이내 바람의 노래와 융합한 천둥소리는 마치 금빛 하늘과 검은 대지 사이에 천군만마가 달려드는 듯한 소리 같았다.
‘고조가 탄생했을 당시 구곡이 함께했다. 그 구곡이 전부 나타나 하나로 합쳐지면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가 되지. 소문에 따르면 선강 대륙에 구곡과 삼상이 동시에 나타날 때 고조와 선조의 계승자가 나타날 것이라 했는데⋯⋯.’
현라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제자를 간파할 수 없어졌다.
‘동부계에서 난 저 녀석으로부터 은빛 눈을 보기도 했지. 그것은 선강 대륙에 도는 소문일 뿐이지만 설마 저 녀석이⋯⋯?’
현라의 표정이 멍하게 변해갔다. 오늘 일어난 이 상황을 도저히 믿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구곡삼상(九曲三相) (2)
구곡삼상의 첫 번째 곡, 창궁풍곡!
두 번째 곡, 천도뇌음(天道雷音)!
세 번째 곡, 범진운적(凡塵雲笛)!
한제가 240번째 계단에 이른 순간, 듣는 것만으로도 금세 잠이 들 것처럼 마음이 안정될 듯한 피리 소리가 금빛 하늘의 하얀 구름 사이에서 흘러나와 심신으로 전해졌다.
범진운적!
아름답고도 묘한, 도저히 생명체가 만들어낸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 소리는 구름의 수많은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이어서 바람의 노랫소리와 융합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됐다. 이따금 울리는 천둥소리가 북소리처럼 그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현라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그 음악에 푹 빠진 채 묵묵히 두 눈을 감았다.
탑 주위의 네 기둥에 앉아 있던 네 사람 역시 묵묵히 기억에 잠긴 듯한 슬픈 표정이었다. 한편 탑 꼭대기 층, 안개에 모습을 감춘 인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는 240번째 계단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바람과 천둥, 구름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듣는 중이었다.
음악은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원신과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고는 천천히 자양시켜주는 듯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입었던 크고 작은 부상도 모두 순식간에 회복됐다. 심지어 선력과 고족의 힘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힘도 더 늘어났다.
한참 뒤, 두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내딛는 그의 표정은 침착했다. 두 눈에 잔뜩 돋아났던 실핏줄도 사라진 채, 냉정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었다.
금빛 하늘은 빛이, 검은 땅은 길이, 천둥소리는 북소리가 바람의 노래와 구름의 피리 소리는 음악이 되어 한제를 에워싸 더 쉽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250번째 계단에 이르게 됐다.
그 순간, 금빛 하늘과 검은 대지 사이에서는 바람과 천둥과 구름이 어우러져 울려 퍼지던 음악에 한 줄기 소리가 더해졌다. 땅바닥을 두들기는 빗소리였다.
쏴아아!
이 빗소리는 음악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었고 심지어 만물을 소생시킬 듯 생기까지 마구 분출했다.
현라는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떠 한제를 바라보며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로서는 좀처럼 드러내는 법이 없는 놀란 표정이었고 심신에는 파문이 일었다.
‘고도 대천존⋯⋯ 이한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하셨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혼혈을 가지고 있는 나의 제자 이한제는 과연 당신의 존재를 받아들일까요?’
현라는 자신의 제자와 고도산 정상의 탑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탑 꼭대기 층, 한숨을 내쉰 안개 속 인영의 꼭 감긴 두 눈과 얼굴 위로 슬픔과 추억이 어렸다.
그 무렵, 한제는 260번째 계단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의 소리가 들려왔다. 더없이 현묘한 소리였다. 하늘에서 들려온 아주 작은 속삭임 같은 소리는 곧 창궁풍곡, 천도뇌음, 범진운적, 그리고 만물윤우(萬物潤雨)로 이루어진 음악에 녹아들었다.
그때였다. 한제의 체내에서 선력과 고족의 힘이 융합되면서 형성된, 얼마 안 되는 선고(仙古)의 힘이 서서히 가동될 조짐을 보였다. 다만 그 속도는 너무 느려 체내를 한 바퀴 도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제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아홉 개의 곡 중 소환된 다섯 곡이 몸 안팎에 무궁무진한 힘과 같은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내 고조의 혼혈 역시 천천히 녹아내릴 기색을 보였다. 현라가 고도 대천존에게 각성을 도와달라고 간청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던 바로 그 혼혈이었다.
묵묵히 계단을 하나하나 걸어 올라가던 한제가 270번째 계단에 이르렀다. 그 순간, 한제 체내의 모든 본원이 녹아내렸다.
이제 그의 체내에는 본원이 남지 않게 됐지만 한제의 두 눈에서는 은색 빛이 번득였고 덕분에 눈동자가 은빛으로 변해 버렸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한없이 냉랭한 눈동자였다. 심지어 동공조차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은빛 눈이 나타남과 동시에 한제의 몸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한 줄기 발산됐는데 당시 동부계에서 현라가 느꼈던, 세상 모든 것을 다 소멸시킬 듯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발산된 순간, 현라의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은빛 눈은 구곡과 삼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고조는 구곡을 통해 은빛 눈을 얻을 수 있고 삼상 중 두 번째 상이 은빛 눈이지.’
기둥 위의 네 사람은 하늘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한제에게 집중했다. 은빛으로 변한 한제의 눈을 본 그들은 심신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눈빛이 혼란에 빠진 것처럼 텅 비어버렸다. 은빛으로 번득이는 두 눈동자에 기이한 끌림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탑 꼭대기 층, 안개 속 인영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구곡삼상 중 다섯 개의 곡과 두 개의 상을 소환했구나. 올라와라. 네가 3백 번째 계단을 뛰어넘는다면 혼혈의 각성을 돕고 너와 만나보겠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한제는 대꾸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고 순식간에 280번째 계단에 이르렀다. 그러자 체내에 남아 있던 고족의 힘도 그대로 녹아내렸다.
동시에 또 하나의 소리가 더해졌다. 황량한 장송곡이었다. 죽은 이들을 기리듯 한없이 슬프고 애처로운 이 소리가 어떤 식으로 울려 퍼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지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 대지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와 뒤얽히며 삶과 죽음을 대표했고 곧 바람, 구름, 천둥, 빗소리와 융합해 한 편의 절창(絶唱)을 이루어냈다.
‘구곡삼상⋯⋯. 들어본 적 있다. 벌써 그중 여섯 개의 곡과 두 개의 상이 나타난 모양이군.’
한제는 체내의 본원과 수준, 고족의 힘이 녹아내리며 사라진 것을 느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없어진 게 아니라 사라지기만 했을 뿐으로 그의 체내 깊은 곳에 층층이 쌓이며 융합되고 있었다.
그는 선력과 고족의 힘이 융합해 새로운 힘이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 힘은 가동됐으나 속도는 여전히 너무나 느려서 수년 혹은 수십 년이 걸려야만 체내를 완전히 순환할 것 같았다.
한제는 또다시 묵묵히 걸었고 금세 290번째 계단에 올라섰다. 그러자 체내 선고의 힘이 전보다 약간 더 빨라졌다. 동시에 그는 체내에서 사라졌던 본원과 고족의 힘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 두 힘은 원신과 오장육부 안에 담겨 있었다. 원신에는 본원의 힘이, 오장육부에는 고족의 힘이 담겨 있었는데 융합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고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동시에 또 다른 곡이 들려왔다. 한제의 몸에서 울리고 있는 이 음악은 오로지 그만 들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몸의 소리, 고개를 들어 올리고 팔을 휘두르고 숨을 들이마시거나 전신 땀구멍이 수축과 팽창을 하는 데서 기인하는 소리였다.
이 소리는 매우 작았으나, 역시 하늘과 땅의 소리에 융합하고 주위에 응집해 그를 감쌌다.
‘이게 일곱 번째 곡이구나.’
한제는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며 두 눈을 밝게 번득였다. 그 눈빛은 산 정상에 자리한 높은 탑에 닿았다.
‘내가 3백 번째 계단에 오르지 못할 거라고?’
천천히 발을 들어 올린 한제는 단숨에 3백 번째 계단 위에 이르렀다.
그 순간이었다. 기둥 위의 네 사람 중 두 명은 멍했던 눈빛이 본래대로 돌아오더니 훌쩍 몸을 날렸다.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중첩되어 한 사람으로 변한 이들은 한제를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에는 한 덩어리의 회색 안개가 담겨 있었다. 이 안개는 거대한 머리의 허상을 형성해 한 줄기 광기를 품은 채 소리 없이 포효하며 한제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펑! 펑!
한제의 체내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심장 박동 같은 그것은 한제의 오장육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여덟 번째 곡이었다.
오장곡(五臟曲)!
수축하는 폐, 박동하는 심장, 떨리는 비장, 경련하는 간, 그리고 긴장한 신장에서 기인해 융합하여 이루어진 오장의 소리!
이 소리는 그의 몸 밖에서 울리고 있는 바람, 구름, 천둥, 비의 소리들, 하늘과 땅의 생사곡과 어우러지면서 여덟 번째 곡을 연주했다. 그러자 오장육부에 깃든 고족의 힘이 콰쾅 하고 울려 퍼지면서 육신에 녹아들었고 원신에 깃들어 있던 본원의 힘은 경맥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 두 가지 힘은 한제의 육신을 중심으로 완전히 융합되면서 어마어마한 선고의 힘이 됐다. 이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수십 년은 걸려야 했을 순환을 단숨에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