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7
고조의 손짓
한제는 온 정신을 집중한 손끝으로 선황 영혼의 머리를 가리켰다가 한참 뒤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손끝을 따라 선황 영혼 안에서 한 줄기 회색 기운이 실처럼 뽑혀 나왔다.
한제가 왼손을 완전히 들어 올렸을 때, 이 회색 기운은 그의 왼손 손가락 끝을 맴돌다가 회색 악귀와 같은 허상으로 변하더니 시뻘건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한제의 눈동자는 은색으로 변하면서 같은 색의 빛을 번득였다. 그러자 한제의 손가락을 집어삼키려던 악귀는 바르르 몸을 떨면서 두려운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한제는 녀석이 절반 정도로 줄어든 순간 덥석 움켜쥐더니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휘이잉!
바람소리와 함께 회색 기운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두 눈에 번득이던 은빛을 거둔 그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어렸다.
“선고를 잠시나마 융합하여 저술의 위력을 제거했지만 지금 내 수준으로 이러한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어. 저술의 위력을 단번에 제거할 수는 없군.”
한제는 오른손에 쥔 선황의 영혼을 힐긋 살폈다. 그 영혼에 깃든 저술은 방금 전 한 줄기 뽑혀 나왔으나 금세 새롭게 생성된 상태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선황의 영혼을 다시 거둔 뒤 한참을 더 좌선했다.
“수준을 더 높이고 더 빨리 융합시킨 후에야 선황의 영혼에 깃든 저술의 위력을 제거할 수 있겠군. 대천존 태양에 융합시키는 건 그다음에나 가능하겠어. 참으로 기이한 저술이다. 게다가 선황의 신분과 특수성을 감안하면 현라 스승님께 도움을 요청해도 쉽지 않겠어.”
한제는 자신의 비밀에 대해서는 최대한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선황의 영혼을 거둔 한제는 이어서 옥패를 소환했다. 계도 황자가 준 이 옥패에는 고조의 손짓 한 번으로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전에도 연구를 해봤지만 아직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한 층의 막에 덮인 듯 내부를 또렷하게 들여다볼 수도 없는 이 옥패를 한제로서는 그저 일회용 신통술로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한제는 혼혈을 녹여 넣음으로써 고조의 기억 일부를 얻게 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복잡한 기억의 존재는 느낄 수 있어도 꿰뚫어볼 수는 없었다. 아마 혼혈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일 터였다.
한제는 옥패에 정신을 집중한 끝에 흐릿한 인영을 하나 볼 수 있었다. 흐릿한 세상의 그 인영은 이내 마구 진동했고 이에 따라 세상 역시 부서져 흩어지다가 사라졌다.
단순해 보이는 허상이었지만 온통 흐릿하고 모호해 파악할 수 없었다.
한제는 이전에도 같은 장면만을 목격했을 뿐,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으나 낙담하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에야 다시 떴다. 그의 두 눈에서는 은빛이 나타나 번득이고 있었다.
냉랭하고 무정한 눈빛을 번득이던 한제는 다시 한번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의 은빛 눈이 닿은 순간, 옥패에서는 흐릿한 인영이 떠올랐다. 그리고 때를 같이해 혼혈이 완전히 녹아들면서 얻게 된 고조의 기억 조각 중 몇 개가 한데 연결돼 한제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회색 도포를 입은 한 사내의 인영이 보였다. 긴 머리를 휘날리는 그의 얼굴은 도고 황성에 세워진 조각상의 얼굴과 똑같았다. 바로 고조였다.
왼손은 뒷짐을 진 채 높은 허공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에는 경멸과 불쾌함이 어려 있었다. 한없이 고고하고 오만한 눈빛이 향한 하늘에서는 한 무리의 검은 점들이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근처에 이른 그 검은 점들은 기이하게 생긴 흉수들이었다.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사자였고 다리는 두 개뿐이지만 뒷다리와 꼬리는 물고기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녀석들은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선두에는 거대하고 유달리 강력해 보이는 흉수가 있었는데 녀석이 발산하는 힘은 대천존에 약간 모자란 정도였다.
그럼에도 회색 옷의 사내는 여전히 경멸의 눈빛으로 오른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이 손짓 한 번에 온 세상이 진동했고 반경 10만 리의 흉수들은 위아래로 가해지는 압박에 갈가리 찢겨나갔다.
콰쾅!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고조에게 덤벼들었던 흉수들은 어느새 남김없이 가루로 변해 버렸다.
그때,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일며 둘로 갈라진 옥패가 한제의 손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지더니 흩어져 사라졌다.
정신을 차린 한제의 눈에서 번득이던 은빛도 차차 사라져갔다. 하지만 발산되던 밝은 빛은 여전했다.
“고조의 손짓 한 번에 담긴 힘이 이 정도라니, 엄청나군.”
“고조가 손짓으로 발휘한 것은 신통술이 아니라 세상과의 연결이었다. 세상의 힘을 통제했다는 뜻. 그 힘은 흉수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는 하늘과 땅을 공격한 것이지. 한 번의 손짓으로 세상을 찢어발기는 위력을 발휘한 거야! 흉수들은 그 영향에 휘말려 제거된 것일 뿐.”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던 한제가 전방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은 매우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층층의 장벽이 고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제는 잠시 후 손가락을 거두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신통술만 두고 보더라도 고조의 강력함은 아예 다른 차원이다. 허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의 조각들과 속신결을 통해 흉내 정도는 내볼 수 있겠어!’
이내 한제는 바닥에 떨어져 가루가 되어 버린 옥패를 보며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체내에는 선족 조성의 살육을 통해 얻은 잡다한 원신들이 있었다. 이 원신들은 그간의 제련을 통해 거의 응집되어 또 하나의 신맥을 형성할 수 있을 듯했다.
“지금 내게는 다섯 갈래의 신맥이 있고 이를 통해 총 아흔아홉 개의 잔상을 형성할 수 있어. 여섯 번째 신맥이 갖춰지면 어떻게 될까?”
한제는 속신결을 발휘하며 여섯 번째 신맥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7일이 지나갔다. 이제 도고 황존의 황후 책봉식까지는 단 사흘만 남은 상태였다.
도고 황성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골목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캄캄한 밤에도 오색찬란한 빛이 곳곳을 환하게 밝혔다. 심지어 도고 황성의 하늘도 오색찬란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고 황존은 이번 황후 책봉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사실 황존만이 아니라 도고 일맥 모두가 이번 행사에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각 부족의 우두머리와 각 군의 수장을 비롯한 여러 강자가 분분히 도고 황성으로 몰려들었다.
극고 일맥과 시고 일맥의 사자들 역시 수많은 선물을 가지고 속속 도고 황성에 이르렀다.
특히 시고 일맥은 어마어마한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자들을 이끄는 것은 계도 황자였다. 당시 도고 사절단을 이끌고 송세정을 발탁한 게 그였으니 이번 책봉식에 참석하는 것도 당연했다.
시고 일맥 대천존인 송천 대천존 역시 축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사자들을 보내왔다. 황후로 책봉될 송세정이 그의 방계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면서 지금 도고 황성은 매우 번잡하고 시끌벅적했다. 도고 일맥은 돌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를 강화했다.
그 어느 곳보다 경계가 삼엄한 곳은 황궁이었다. 도고 일맥의 거의 모든 강자가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흩어져 살고 있던 황족 구성원들도 각지에서 몰려든 상태라 황성은 크게 들썩였다.
강력한 황권을 자랑하는 고족의 세 황제 중 한 명이 황후를 맞아들이는 만큼 고족 구역에서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도고 황존은 심지어 고도산에서 보내온 선물까지 받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든 탓에 도고 일맥은 강력한 보물을 꺼내 99개의 거대한 대로 만든 뒤 하늘에 떠 있는 도시 주위로 띄워놓았다. 덕분에 도고 황성에서는 황존의 황후 책봉식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됐고 이 대는 강자들이 하나씩 차지했다.
그러나 수련에 푹 빠져 있는 한제는 이런 것들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색찬란한 빛에 뒤덮인 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도고 황성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주위로 흩어져 있는 99개의 거대한 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으로 모여든 수많은 이들 덕분에 곳곳에서는 장이 섰고 경매도 적지 않게 열렸다.
도고 황궁도 기쁨으로 가득했다.
황궁의 가장 높은 누각 안, 뒷짐을 지고 선 도고 황존은 오색찬란한 빛으로 뒤덮인 도시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도시는 앞으로도 매일 이렇게 번쩍일 것이다. 이 도시는 앞으로 고족 구역의 중심이 될 게야!”
도고 황존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입니다. 원하시는 바를 모두 이루실 겁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저희는 그저 폐하를 따를 뿐입니다!”
누각에는 도고 황존 외에도 일곱 사람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입을 모아 외치는 이들의 얼굴은 열광적으로 번득였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나?”
도고 황존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고와 극고의 사절단, 그리고 두 대천존이 보낸 사자들은 이미 도착했습니다. 고도산에서 선물을 가져온 사자는 공손하게 황성에 모셨습니다.”
한 사람이 즉각 답했다.
“도고 일맥에서 온 이들과 다른 두 일맥의 강자들은 99개의 대 위로 안내했습니다. 수가 많기는 하나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
“준비는 저희가 맡고 있으니 빈틈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마음 놓으시지요.”
“경계에는 금일군부터 금칠군까지의 모든 이를 동원했습니다. 물샐 틈 없이 경계할 터이니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국사는 책봉식 당일에 오겠다고 말을 전해왔습니다.”
“황후의 상태는 여전합니다. 종일 대전에 틀어박힌 채 어떤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고 있는 듯합니다. 허나 결국 극심한 통증에 시달릴 뿐, 아무런 기억도 떠올리시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대천존 쪽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과연 참석할지 모르겠습니다.”
일곱 사람은 각자의 말을 맺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도고 황존의 명을 기다렸다.
“전통에 따라 황후 책봉식은 99일간 진행된다. 첫째 날에 있을 제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과정에는 내가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 사고도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황포 사내의 지시에 뒤에 앉아 있던 일곱 사람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사흘 뒤면 책봉식이 시작된다. 역대 도고 일맥 황제들은 책봉식 전날 밤이면 일맥 사람들과 각국 사자들을 불러 황후를 소개하곤 했지. 그 준비는 어떻게 됐느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한 사람이 공손하게 답했다.
“좋아!”
황존은 기대감이 어린 미소를 띤 채 소매를 휘둘러 사라졌다.
“송세정에게 황후라는 지위를 주는 것보다 더 큰 상은 없을 터. 국사의 예측 결과가 아주 기대되는군.”
같은 시각, 황궁의 고요한 대전에는 황후의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절색의 미녀는 아니었지만 뭐라 표현하기 힘든 특유의 기운을 풍기는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혼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꿈속의 모든 것이 깨어나면 흐릿해져⋯⋯. 꿈속에서 보았던 여인의 모습도 사내의 모습도 기억할 수가 없어. 기억나는 건 그 남자가 했던 말 뿐⋯⋯.”
이내 두 눈을 감은 여인의 머릿속에 꿈속 사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저자들을 죽이는 걸 구경이나 해.”
“하늘이 널 데려간다면 나는 널 빼앗아올 거야!”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의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솟아 뺨을 타고 흐르다가 옷깃을 적셨다.
“난 왜 우는 거지⋯⋯” 그는 누구일까⋯⋯? 나는… 나는 누구지? 나는 송세정인가⋯⋯?”
여인은 감았던 눈을 떴지만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당연히 한제는 이 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의 수준은 아득히 높았지만 그럼에도 이 여인의 눈물을 보지도 이 여인의 기운을 느끼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 여인이 앞에 있더라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인의 잔혼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과 송세정이 융합한 후로 이 안개는 더욱 짙어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맨 이모완의 혼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이는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꿈속의 사내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