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8
연회
황후 책봉식을 하루 앞둔 아침, 지하에서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고 이 상황에 의아했다. 체내에는 여섯 번째 신맥이 응집되어 있었으나 결코 이 때문은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나무 오두막으로 향했다. 금빛 안개를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른 그는 해가 서산으로 질 때쯤 고개를 들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어서 오행 진신과 금색 안개 덩어리를 체내로 흡수한 후 곧장 오두막을 나섰다.
석양 아래 서 있던 현라는 제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폐관수련을 한 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났다. 내일 책봉식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되지만 오늘 밤의 연회에는 나를 대신해서 가 다오. 네가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돌아와도 좋아.”
한제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 연회나 행사 자리는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님의 요구인 만큼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물을 도고 황존에게 전해주면 된다.”
현라는 웃음을 머금은 채 허공에서 소환한 상자를 건넸다.
한제는 상자의 내용물을 살피지도 않고 거두어 넣고는 현라에게 포권을 했다. 그리고는 이내 한 줄기 빛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라 도고 황궁으로 향했다.
‘이 선물만 전달하고 곧장 돌아와 수련을 이어가야겠군.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금속의 본원은 거의 다 응집된 상태야!’
그는 그렇게 결심했으나, 어째서인지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기현상에 한제는 미간을 팩 찌푸린 채 도고 황궁을 바라보았다.
역대 도고 일맥 황제는 황후를 책봉하기 전날 밤, 해가 질 때부터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연회가 끝나는 대로 시작되는 책봉식에도 참가했다.
이 연회에서 도고 황존은 황후로 책봉될 여인과 함께 나타났다. 말하자면 이 연회는 사람들 앞에 황후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황후는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의 축하를 받고는 곧장 자리를 뜨지만 도고 황존은 연회 참가자들과 함께 날이 밝을 때까지 먹고 마신다.
연회가 열리는 장소는 황궁 정전(庭前)의 거대한 광장이었다.
붉은 노을에 물든 광장에는 수많은 궁인이 깔아놓은 상이 어림잡아 수천 개는 놓여 있었다. 모두 황궁 정전을 향해 절을 올리는 것처럼 부채꼴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그런가 하면 황궁 상공에는 수백 개의 작은 대가 둥둥 떠 있었는데 이 각각의 대에도 백여 개의 상이 펼쳐져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을 위한 자리였다.
연회 시작이 다가옴에 따라 황궁에서는 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황궁 중앙에는 길이가 수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북이 있었는데 어느 흉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졌을지 모를 이 북은 서늘하고 오래된 기운과 함께 거친 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36장은 도고 황족의 친위대로 도고 일맥의 자원과 역량을 집중시켜 만들어진 존재였다.
붉은 빛 안에서 서른여섯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붉은 안개로 뒤덮여 생김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들은 빛에서 걸어 나와 정전을 향해 절을 올리더니 72성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나 36장이 자리에 앉은 순간, 북소리가 이어지더니 돌연 격렬한 콰쾅 소리와 함께 하늘에는 열여덟 갈래의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 붉은 발과 검은 발이 한 쌍씩, 총 열여덟 쌍이 나타났다.
뒤이어 울린 하늘을 뒤흔들 듯한 포효에 광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열여덟 개의 균열에서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열여덟 마리의 용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요기를 발산하고 있는 이 용들은 다름 아닌 요룡(妖龍)이었다.
은빛 눈동자에 흐르는 무궁무진한 요기로 인해 더욱 무시무시해 보이는 이 용들은 하늘을 선회하며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도고 18왕(王)!”
“그래, 도고 18왕이 타고 다니는 요룡들이야!”
“도고 황존 아래의 황족 18왕은 모두 어마어마한 강자라더군. 그중 열두 명은 평소에도 열두 개의 군을 지키고 있어야 하기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
요룡의 등장에 다시 곳곳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 황궁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하늘 위에 나타난 한제는 황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열여덟 마리의 요룡이 나타나 일으킨 회오리는 그 어떤 신식과 눈빛도 모두 차단했다.
“도고 18왕⋯⋯ 엽막도 당시 이 18왕 중 하나였을까? 어쩌면 오늘 밤 연회에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한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실 고족 구역에 이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가 그마저도 세 달은 폐관수련에 몰두하느라 엽막의 후손을 찾아볼 시간은 딱히 없었다. 허나 항상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여덟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한제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한데 황궁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은 점점 강렬해졌다.
이 두근거림은 위기감과는 달랐다. 한제는 이것이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과 관련한 어떤 운명적인 일에 대한 느낌이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 이유만은 알 수 없었다.
한제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아가고 있을 때, 상공을 선회하고 있던 열여덟 마리의 요룡이 도고 황궁 정전 광장에 서서히 내려앉았다.
각 요룡의 머리에는 사람이 한명씩 서 있었다. 생김새는 서로 달랐지만 어딘가 닮은 이들은 모두 용포를 입고 있었고 짙은 위엄을 풍겼다. 이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요룡에서 내려오더니 정전에서 가까운 상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들이 자리에 앉자 열여덟 마리의 요룡은 하늘의 균열로 돌아가 사라졌다. 그러자 균열도 곧 사라지면서 석양에 물든 하늘은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때 아홉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이전에 울려 퍼졌던 여덟 차례 북소리의 메아리와 합쳐져 어마어마한 굉음이 됐다. 어지간한 수련자는 심신이 진동해 죽을 정도로 강력한 소리였다.
심지어 고족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 해도 부상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만 같았다. 한데 기이하게도 이곳에 있는 고족 수련자들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한제는 아홉 번째 북소리가 울린 그때 황궁 상공에 이르러 주위를 한 번 훑어보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순간 그의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아홉 갈래의 검은 빛이 하늘에서 내리 떨어졌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지 못하도록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 같은 검은 빛은 짙은 파문을 퍼뜨리며 강림하더니 곧 검은 갑옷을 입은 아홉 명의 남자로 변했다. 하나같이 거구인 이들에게서는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사지에는 수많은 원혼이 맴돌고 있었다.
이들은 정전을 향해 절을 올리지도 않고 18왕 앞에 마련된 아홉 개의 상을 차지했다. 그들의 앞에 남은 상은 단 네 개뿐이었다.
“불멸의 장군이다! 도고 일맥 불멸의 장군들이야!”
한제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선족 수련자와 비교하자면 천존열 시험장 열세 번째 층을 통과한 약천존과 비등한 실력자들이로군! 특히 저중 하나는 심지어 열네 번째 층을 통과하기에 충분할 정도야!’
이내 그들로부터 시선을 거둔 한제는 아홉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 정전에 도착했다. 자연스레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한제는 이처럼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상황에 이미 익숙했기에 덤덤하게 허공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자는⋯⋯ 누구지?”
“아홉 번째 북소리가 울릴 때가 되어서야 나타나다니, 혹시 신분이 특수한가?”
“하지만 낯선 얼굴인데⋯⋯.”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제는 수천 개의 상과 108금, 72성, 36장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수군거림은 커졌다.
“대체 어디에 앉으려는 거지?”
“맨 앞으로 향하고 있어! 저기는 대천존과 국사, 그리고 도고 일맥의 두 선조를 위한 자리라고!”
맨 앞의 상 네 개 중 하나는 앞에 나머지 세 개는 그 뒤에 놓여 있었다.
한제가 18왕의 상공마저 지나쳐 갈 때, 도고 일맥 황족인 18왕이 분분히 고개를 들어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중 일곱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이 모습에 광장에 모여 있던 1만여 명은 충격에 빠졌다.
문득 뒤를 돌아보다
한제는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에게 포권을 한 일곱 명을 슥 훑어보며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저 걸음을 옮겨 검은 기운으로 뒤덮여 있는 아홉 명의 도고 불멸의 장군을 향해 나아갔다.
그중 여덟 명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가장 강력한 장군은 검은 기운에 가려진 두 눈을 번득이더니 차게 코웃음을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자신의 상공을 지나쳐 가려는 한제를 가로막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데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한제의 서늘한 눈빛이 붉은 살기를 번득이며 그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던 불멸의 장군은 그 찰나의 순간 느껴진 위압감에 온몸을 바르르 떨었고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털썩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심신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방금 전 한제의 눈길 한 번에 그는 수천수만 번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그때, 광장에 착지한 한제는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된 상 중 가장 앞의 상 앞에 서서 뒤를 돌아 수천 개의 상과 그 상에 앉은 사람을 슥 훑어보더니 소매를 휙 휘두르며 자리에 앉았다.
“대… 대체 누구이기에 도고 대천존의 자리에 앉는단 말인가!”
“좀 전에 발산한 위압감은 엄청났어.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니야!”
“도고 대천존이 최근 제자를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혹시⋯⋯?”
“그자다! 백발 약천존! 맙소사, 저자가 현라 대천존의 제자일 줄이야!”
“뭐? 백발 약천존? 그자는 선족 아닌가! 저자가 백발 약천존이라고?”
한제의 신분을 알아본 것은 계도 황자 일행이었다. 그중에서도 한제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도고 일맥은 그나마 충격이 덜했지만 시고 일맥과 극고 일맥 황족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이들이 한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라가 한제를 데리고 고족 구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그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이번에 도고 황성에 방문한 것은 황후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이 기회에 도고 일맥의 힘을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한제를 향한 눈빛에는 감격과 열망이 담긴 빛도 있었다. 특히 계도 황자의 눈빛이 그러했다.
그는 한제를 보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양아버지의 이름을 모든 고족이 알게 됐구나! 저분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계도 황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편, 한제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허나 지금 그의 심장은 매우 빠르게 뛰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더는 통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 것만 같았다.
이러한 증상은 황궁에 이른 뒤로 한층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두근거리는 정도였던 심장이 이곳에 이른 순간 격렬하게 뛰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한제의 심신에 영향을 미친 상태였다.
방금 전 불멸의 장군이 일어나려 했을 때 위압감을 발산하여 자신의 수준을 드러낸 것도 이렇게 심신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찰나의 순간이지만 이곳의 모든 이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광기 어린 살의를 느끼기도 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어째서지?’
한제는 두 눈을 감은 채 체내의 수준을 가동해 서서히 심신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기분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도고 황궁에 무슨 금제라도 배치되어 있는 걸까? 허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금제의 흔적은 없는데⋯⋯.’
이내 감았던 눈을 뜬 그는 뒤엉키려는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했다.
‘이 광기는 심장의 두근거림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 두근거림은 며칠 전부터 시작됐지. 마치 오늘, 여기서 운명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수많은 죽음의 위기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느낌이다!’
한제의 미간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황궁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군.’
그때였다. 울려 퍼졌던 아홉 번째 북소리가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북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광장 안팎과 하늘에 떠 있는 수백 개의 대는 죽음 같은 고요에 휩싸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광장 앞 정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존 폐하 납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