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40
황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송세정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한제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볼 때면 마음이 찌르는 듯 아파왔다. 허나 그 연유에 대해 생각해보려 할 때마다 혼란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송세정은 결국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허상 하나가 나타나 술잔을 공손히 건네더니 뒤를 따랐다. 여인은 이내 한제의 상 앞에 이르렀다.
한제는 벌써 일고여덟 병을 비운 상태였다.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본 한제의 시야가 또다시 흐려졌다.
“너⋯⋯.”
여인이 막 입을 열려 한 그때였다.
“칠현금을 탈 줄 아십니까?”
한제가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쓰게 웃더니 일어나 여인의 잔에 자신의 술병을 가볍게 부딪치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곧장 뒤돌아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방울져 흩어진 술 한 방울이 여인의 뺨에 닿았다. 차가웠다.
“모완아, 네 혼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한제는 이미 궁전으로부터 한참 먼 곳에 이르러 있었지만 여인은 그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슬픔에 찬 목소리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광장과 대 위의 고족 일부, 그리고 황존도 그 목소리를 들은 상태였다. 황존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그도 한제도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 중 누구도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송세정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갈등과 혼란의 빛이 드러났다. 허나 이 빛은 곧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송세정은 정전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뒤쪽으로 펼쳐진 연회는 다시금 활기를 띠었다.
“모완아⋯⋯ 네 그림자라도 볼 수만 있다면 난 온 우주를 다 뒤집어엎을 것이다! 네 눈을 다시 뜨게 할 수만 있다면 화염으로 온 하늘을 다 물들일 것이다! 네가 숨을 다시 쉬게 할 수만 있다면 난 그 어디까지라도 갈 것이다!
네 눈을 다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난 마도에 입문하여 도를 죽이고 하늘에 저항하며 선인을 죽일 것이다! 한데 모완아, 네 혼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한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도고 황성 안에서 묵묵히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고독하고 쓸쓸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 ★ ★
도고전의 나무 오두막으로 돌아온 한제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수련을 하고 싶은 마음도 지하 동굴에 있는 대천존 태양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창밖 너머, 오색찬란한 세상을 그저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수준이 무슨 소용이며 하늘을 거역할 의지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도고 일맥 수호자가 다 무어냐! 모완의 영혼을 찾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지금까지는 이 문제를 애써 피해 왔다. 수준이 충분히 높아지면 모완의 영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여 온 것이다. 허나 황궁에서 모완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여인을 마주한 순간,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한제는 스스로를 나무 오두막에 가둔 채 슬픔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옛날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를 위로하는 것은 오직 그 기억뿐이었다. 마치 이미 사라진 종파 안에서 기억만을 벗 삼아 살아가던 동림종 선조 같은 모습이었다.
“이 세상에 그토록 비슷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허나 그녀는 모완이 아니라 송세정이다.”
한제는 한참 뒤에야 억지로 슬픔을 억누를 수 있었다.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 이는 모완의 영혼을 찾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기 때문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의 눈빛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다만 그 침착한 눈 깊은 곳에는 여전히 슬픔이 맴돌았다.
“송세정⋯⋯.”
한제는 중얼거리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오행진신이 하나둘 분리되어 나타났다.
네 개의 진신 가운데에는 금색 빛 덩어리가 있었는데 그 안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흐릿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진신으로 응집되려 하고 있는 금속의 본원이었다.
한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더는 기억을 더듬지 않고 수련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눈을 감은 그 순간, 한제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서는 하늘을 뒤덮을 듯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냐! 흑석성에서 봤던 송세정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 절대로 방금 전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어!”
한제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왜 황궁에서 다시 만난 그녀에게서 익숙함이 느껴진 거지? 뭔가 이상하다! 도고 황존은 수백 년 동안의 선별 끝에 마침내 비를 선택했다. 한데 어떻게 특별할 것 없었던 송세정이 선택을 받았을까? 어째서 그녀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풍기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황궁에 들어간 순간부터 초조함과 짜증을 느꼈던 거지? 황존을 봤을 때는 살의까지 느꼈으나 이 모든 것은 송세정을 본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어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제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눈에서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나무 오두막을 완전히 뒤덮었고 그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은 폭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휘날렸다.
그에게 숨겨져 있던 힘이 폭발하려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심신이 경련했고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그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한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황궁에 쳐들어가 도고 황존을 사로잡고 수혼술로 모든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그는 현라의 제자이고 현라는 도고 일맥의 수호자다. 현라는 한제에게 스승으로서 큰 은혜와 정을 베풀어준 사람이다. 그런 스승에게 누가 될 짓은 할 수 없었다.
두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 검은색 옥패가 쥐어졌다. 옥패에서 흐르는 기이하고 어스름한 빛은 심신을 흡수해버릴 것만 같았다.
이 옥패는 종족의 미래를 예측한 대혼문의 선조가 한제를 이용한 데 대한 사죄의 의미로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이내 한제는 옥패를 꽉 움켜쥐어 부수면서 주문을 외운 뒤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부서진 옥패는 수많은 검은색 기운으로 변했고 한제의 손바닥에는 검은색의 소인(小人)이 소환됐다.
소인은 한제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더니 머리를 아홉 번 찧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동부계 천도로부터 모완의 잔혼을 취하는 고운 손이 나타났다.
극도의 분노 (2)
뒤이어 어느 밀실 안, 온몸이 일곱 색채로 뒤덮인 흐릿한 허상이 두 손가락으로 구슬을 집어 드는 모습도 보였다. 구슬 안에는 눈을 감은 채 떨고 있는 모완의 잔혼이 담겨 있었다.
흐릿한 허상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앞에 서 있던 황포 차림의 사내에게 속삭이듯 뭔가를 말했다. 그러자 황포 차림의 사내는 놀라면서도 기뻐하더니 끊임없이 골라온 여인들과 그 구슬 속 잔혼을 융합하려 했다.
그리고 수백 년간 실패를 반복해오던 어느 날, 그는 송세정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녀는 구슬 속 잔혼과 하나로 융합됐다.
궁전 안, 황포 차림의 사내가 오른손으로 여인의 뺨을 세게 꼬집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여인은 엄청난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뒤이어 황포를 입은 사내, 도고 황존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한제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엽도! 내 너를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다!”
한제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머리카락은 휘날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목에서는 하늘을 갈기갈기 찢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짙은 광기와 결의, 그리고 분노가 어린 포효였다.
★ ★ ★
대낮처럼 밝은 황성 안, 한제의 포효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며 도고 황성의 절반을 뒤덮었다. 그 범위에 있던 사람들은 심신이 바르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들은 한제가 포효와 함께 내뱉은 ‘엽도 내 너를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연주되던 음악도 순간 뚝 끊긴 상태였다.
축제 분위기는 죽음과 같은 적막으로 뒤바뀌었다. 오색찬란한 빛은 여전히 도시를 밝히고 있었지만 그 빛에서는 서늘하고 냉랭함마저 느껴졌다.
“이건 누구의 목소리지?”
“엽도라면⋯⋯ 도고 황존의 이름 아닌가!”
“감히 누가 이런 망발을!”
짧은 적막이 흐른 후,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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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전. 가부좌를 틀고 있던 현라 휘하의 아홉 강자는 가까이에서 울려 퍼진 포효를 듣자마자 동시에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일제히 도고전 뒷산, 한제의 처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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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전이 있는 산 중앙. 완전히 밀폐된 동굴 안에서 현라는 눈을 감은 채 좌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환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그는 환생에 돌입하기 전 한제에게 줄 강력한 신보(信寶)를 제련하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는 오색찬란한 단검 하나가 떠 있었다. 상당히 기이한 검이었다. 자루는 하나뿐이었지만 날은 네 개나 달려 있어서 검이라기보다는 사지창(四枝槍)에 가까워 보였다. 심지어 그 가장자리에서는 다섯 번째 날이 어렴풋이 번득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응집되어 굳어질 것 같았다.
현라는 일정한 시간마다 이 단검에 푸른색 기운을 한 움큼씩 토해내고 있었다.
“오랜 제련 끝에 네 개의 날을 응집해냈다. 허나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시기다. 다섯 번째 날까지 응집해낸다면 한제에게 줄 극강의 보물이 될 터.”
현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자부심이 어린 미소였다.
그는 황존에게 줄 선물을 대신 전달해줄 것을 한제에게 부탁한 뒤 곧장 이 신보의 제련에 나섰다. 여태까지 제자에게 제대로 된 선물 하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한데 감고 있던 두 눈을 뜬 지금, 그는 광기 어린 포효를 듣게 됐다. 하늘과 땅을 뒤흔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짙은 살기를 품은 포효와 그 뒤에 따라붙은 무시무시한 말에 현라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벌떡 일어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겹겹이 자리한 산을 관통한 그의 시선은 곧장 나무 오두막에 닿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현라는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직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곧장 오색찬란한 단검으로부터 신식을 거두기 시작했다. 허나 이 단검의 제련은 가장 중요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신식을 거두는 것만 해도 1각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초조해진 마음에 현라는 도고전의 아홉 강자에게 신식으로 전했다.
“한제를 찾아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필요하다면 그를 진정시키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절대 일을 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