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46
“너⋯⋯.”
황포 차림의 노인은 아들을 꾸짖으려다가 문득 입을 다물더니 돌아서서 번득이는 눈으로 한제를 쳐다보았다.
“도가 지나치군!”
그때, 현라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심신을 뒤흔들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도고 황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하더니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현라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현라, 감히 나를 다치게 하다니! 고도 대천존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은가!”
“엽도! 당장 금제를 풀고 선조의 머리와 선황의 혼을 챙기게. 그럼 이 일은 없던 일로 쳐주지. 허나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난 고도 대천존의 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를 죽일 것이야!”
현라는 애원하는 한제의 모습과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제가 이런 굴욕을 참고 있는 이유가 오직 자신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난감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모든 굴욕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제자의 모습에 현라는 자부심을 느꼈다. 제자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준다면 그 역시 제자를 위해 직접 황존을 죽이고 최초로 황제를 시해한 대천존이 되는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한 행동의 후폭풍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자의 굴욕을 그저 두고볼 수는 없었다.
“감히 나를 죽이겠다고? 현라, 자네는 도고 일맥의 대천존이야. 그런 자네가 나를 죽인다면 고도 대천존에 죽임을 당할 것은 물론이고 자네는 도고 일맥의, 더 나아가 고족의 원수가 되겠지! 죽어서도 자네의 무덤에 모두가 침을 뱉게 될 거라고!”
도고 황존이 매서운 표정으로 외쳤다.
현라는 몸을 바르르 떨며 두 눈을 감았다.
“난 여태까지 도고 일맥을 수호해 왔고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허나 내가 직접 동부계에서 데려온 이 제자는 선족 구역에서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만큼 높은 지위에 이른 뒤에도 나를 찾아왔어. 내 유일한 제자란 말이다!”
이내 현라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서는 결단을 내린 듯 단호한 빛이 번득였다.
“스승님⋯⋯.”
현라가 결단을 내린 순간, 한제는 조용히 스승을 불렀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모완의 잔혼이 송세정과 융합됐음을 깨달은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미소였다.
그러나 그 미소를 본 현라는 오히려 더욱 마음이 아파왔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오열에 가까웠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평생 도고 일맥을 수호해오셨습니다. 제게 스승님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가치는 없습니다.”
한제는 현라를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절을 올렸고 바닥에 머리를 세게 찧었다.
하늘을 숭배하지도 땅을 존중하지도 않는 그가 무릎을 꿇은 상대는 오직 부모님과 사도환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명이 더해졌다.
“한제야⋯⋯.”
현라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어렸다.
“스승님, 만약 이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승님을 따라 선강 대륙으로 왔을 겁니다.”
한제가 조용히 말했다.
현라의 눈빛에 담긴 슬픔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는 한제를 이해했다.
“스승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저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벅차오른 감정과 이전까지 유지해왔던 인내심을 쓸어버리듯 먼지가 묻은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스승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무릎을 꿇고 보물을 내놓고 도고 황존에 대한 살의를 참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저 모완의 잔혼을 되찾고 싶었고 그 와중에 스승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 자기 목적을 위해 스승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허나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지금껏 참아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씁쓸한 눈물에는 수천 년 동안의 고통과 불굴의 의지, 은혜에 대한 집착이 어려 있었다.
광기 어린 웃음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그 웃음소리에 현라는 거대한 손이 심장을 콱 움켜쥐고 뽑아내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 순간 체내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한층 더 늙어 있었고 눈빛은 전보다 더 노쇠해져 있었다.
“이 이한제는 어린 시절부터 수련을 시작한 이래 평생 살육을 자행해오면서 사람의 냉정함과 세상의 무정함을 직접 경험했다. 내가 만나온 대부분은 교활하고 음험했지. 어쩌면 나는 외로운 삶을 살 운명이었을지도…
아내의 잔혼은 사라지고 아들은 죽었으며, 사도환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지. 또한 청수 사형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게 정을 베푼 이들은 결국 고통스런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인가!”
한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은혜를 중히 여기는 것은 내게 은혜를 베푼 이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게 정을 베푼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자를 죽여!”
도고 황존에게 한제의 웃음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거슬렸고 심신을 바르르 진동하게 했다. 이에 그는 한제를 가리키며 명했다.
허나 정전에 모여 있던 1천여 명의 사람들만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이며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을 뿐, 방금 전 한제의 손에 죽었다가 부활한 이들을 포함한 수만 명은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다. 황권을 무엇보다도 중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봐온 그들이었다.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현라의 슬픔을 한제의 집착과 애원을 목격한 이들로서는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황권과 양심 사이에서 선택을 앞둔 이들은 망설였다. 그럼에도 그중 일부는 어렸을 때부터 세뇌되다시피 한 황권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고 낮게 고함을 내지르며 이내 한제에게로 달려들었다.
“스승님!”
허나 한제는 그들에게는 아랑곳 않고 몸을 돌려 현라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스승님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직 제가 죽어야만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지요. 부디 제가 더 이상 스승님을 스승님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이후로 이 이한제와 도고 일맥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게 될 것이고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스승님과 하등의 상관도 없는 일이 될 것이며, 모든 일은 제가 책임지게 될 겁니다!”
말을 마친 한제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때 사방에서는 그와 소매를 휘두르려 하는 현라를 향해 수천 명의 도고 일맥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극도의 분노 (8)
한제는 현라를 바라보며 들어 올린 오른손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이 일격에는 현라에 대한 그의 감정과 더 이상은 내리누를 수 없는 강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한제의 오른손이 정수리에 닿자 두개골은 쪼개졌고 그의 체내로 쳐들어간 파괴적인 힘은 그의 머리를 깨부숨과 동시에 그의 온몸을 훼손했다.
이 파멸 속, 한제는 동부계에서 현라를 처음 만난 당시를 떠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간 듯 그 당시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펼쳐졌다. 그리고 장면은 한제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도고전이 있는 산에서 튀어나오던 순간에서 우뚝 멈추었다.
모든 이들의 혼란스러운 눈빛 아래, 한제의 육신은 콰쾅 하고 폭발했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현라가 다가오기 직전 황궁 정전에서 스스로를 파멸시킨 것이다.
터져버린 한제의 피와 살점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죽었나?”
흠칫 놀란 표정을 드러낸 도고 황존은 두 눈으로 음침한 빛을 번득였다. 사방에서 한제를 향해 달려들던 이들은 우뚝 멈춰 섰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제의 원신과 육신이 폭발하면서 형성된 피 안개가 한데 응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굉장한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 응집된 피 안개는 곧 완전한 인간의 형태를 이루며 다시 한제가 됐다.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한제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해져 있었다. 삼명술을 사용한 것으로 말하자면 그는 방금 정말로 한 번 죽었던 것이다.
다시 태어난 지금의 그는 더 이상 현라의 제자도 아니었고 자연히 도고 일맥과는 조금의 관련도 없었다. 더는 현라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난감해질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엽도!”
한제가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그간 억눌러왔던 어마어마한 분노와 함께 터져 나온 목소리였다.
순간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살기가 한제의 체내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이 살기 아래 바람과 구름의 기색이 변하면서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제는 마치 황천에서 걸어 나온 흉악한 악귀처럼 광기와 살육의 기운을 이끌며 한 걸음 내딛었다.
“저자를 죽여!”
화들짝 놀란 도고 황존은 얼른 뒤로 물러나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정전에 모여 있던 1천 명과 사방에서 달려들던 수천 명의 도고 일맥 사람들은 다시 몸을 날렸다. 몸과 영혼을 다 바쳐서라도 황권을 보호할 생각인 듯했다. 허나 그들이 자신들의 그러한 행위를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아니면 슬프게 여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라도 나를 막는다면 이번에는 진짜 죽게 될 것이다!”
한제는 두 눈을 붉게 번득이며 주먹을 휘둘렀다.
콰쾅!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듯 우렁찬 소리와 함께 그에게 달려들었던 수십 명이 펑, 펑 하고 터져나가며 흩어졌다. 끔찍한 비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뒤이어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도고 일맥 사람들이 또다시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죽은 이들의 피가 고인 바닥을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수백 척을 나아가는 그가 지나는 곳마다 피가 강을 이루었다.
“끄아악!”
“컥!”
날카로운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36살은 서른여섯 갈래의 붉은 빛이 되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마치 서른여섯 마리의 용처럼 빠르고 위력적이었지만 한제는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른 초록색 연기가 손가락 주위를 맴돌다가 바깥쪽으로 확산됐다.
극화도!
고리를 이룬 연기와 서른여섯 마리의 용이 맞닿은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용들은 화염에 휩싸여 그대로 불살라졌다.
한제는 계속해서 나아가며 이번에는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파문이 번득이며 나타났다.
이때 한제를 기습하려는 듯 앞으로 나오던 18왕 중 한 명은 표정이 급변해 곧장 뒤로 물러나려 했다. 허나 그는 한제에게로 끌려가더니 그대로 상대의 손에 얼굴을 붙잡혔다.
팍!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현라는 이 모습을 내려다보면서도 한제를 막아서지는 않았다. 이미 도고 황권에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가 스스로의 몸을 파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새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라는 한제가 그렇게 스스로를 한 번 죽인 것이 이 가차 없는 살육에 스승인 자신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사제 관계를 끊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죽음을 통해 한제는 도고 일맥과 고족, 심지어는 고도 대천존에게 오늘 이 황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자신의 책임임을 공표한 셈이었다. 현라가 이 일에 얽혀 도고 일맥의 죄인이 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제는 현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제자의 모습에 현라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베푼 것은 그리 많지 않거늘⋯⋯.’
현라는 끊임없는 살육을 저지르는 한제의 뒷모습을 죽어가는 도고 일맥을 보았지만 어째서인지 같은 부족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한제는 낮게 기합을 넣으며 한 줄기 붉은 빛이 되어 피로 이루어진 길을 만들어내며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황궁은 순간 어두컴컴한 바다가 됐고 그 바다의 끄트머리에서 아침 해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잔야!
떠오른 아침 해가 밝은 빛을 발산하자 황궁 곳곳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제에게 달려들던 도고 일맥 사람들은 피 안개로 터지며 죽어갔다.
허상으로 나타난 밤바다가 흩어져 사라지고 다시 황궁의 전경이 나타났다. 정전에 몰려 있던 수천 명의 수련자 중 절반 이상은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는 저 멀리 밀려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