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48
“모두 가짜란 말이…”
그 시선을 느낀 순간, 도고 황존은 외침을 멈추더니 비틀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찌나 격하게 떨었던지 이가 부딪치며 딱딱 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가 너의 후손이다! 난 고족을 배반한 일이 없어! 그러니 너라도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
한제가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도고 황존을 가리키자 고조의 허상도 그를 따라 거대한 손으로 도고 황존을 가리켰다.
“엽도. 내 고조의 손을 빌려 너를 죽여주지!”
고조의 허상이 나타난 이래 한제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 말이 울린 순간, 고조의 거대한 오른손에서는 은빛이 번득이며 뿜어져 나오더니 한 줄기 선이 되어 도고 황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안 돼!”
사색이 된 도고 황존은 절규했다.
“고도 대천존, 저를 살려주십시오! 아바마마, 저를 살려주십시오! 조상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국사, 나를 살려다오!”
두려움에 잠긴 도고 황존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아비인 황포 차림의 노인은 잠시 움찔했으나,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궁 지하 깊은 곳, 수많은 문양으로 봉인된 밀실 안의 보라색 관 속에서 비쩍 말라 해골에 가까운 한 노파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황포를 입은 이 노파는 두려움과 망설임의 빛을 잠시 드러냈으나 결국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한편, 도고 황존이 은색 빛과 충돌하려던 그 순간, 또다시 나타난 보라색 빛이 은색 빛을 막아섰다. 하지만 보라색 빛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은색 빛은 그대로 도고 황존의 미간을 관통했다.
퍽!
도고 황존의 머리는 터져나갔고 뒤이어 육신도 쪼개졌다. 이 파편들조차 계속해서 무너져 내려 결국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심지어 그 영혼 역시 은색 빛에 의해 연기처럼 흩어진 상태였다. 도고 황존은 황궁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고조의 손을 통해 은색 빛을 발사한 한제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도고 황존을 죽인 고조의 허상이 점차 흩어져 사라져갔다. 그제야 고개를 번쩍 쳐든 한제의 두 눈은 하늘 끄트머리, 도고 황성 밖에 자리한 황량한 산을 향해 있었다.
엄밀히 말해 모완의 잔혼이 이런 우여곡절을 겪도록 한 것은 도고 황존이 아니었다. 대혼문 선조가 남긴 옥패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원흉은 매우 낯익은 일곱 색채의 빛으로 온몸을 뒤덮은, 비밀스러운 도고 일맥의 국사가 원흉이었다. 그자는 동부계에서 모완의 명혼을 취해 도고 황존에게 넘기면서 그 혼에 알맞은 여인을 찾게 만들었다. 도고 황존은 그저 그의 술수에 빠져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에 불과했다.
옥패를 통해 모완의 잔혼에 있었던 일을 보게 됐을 때부터 한제는 그 국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도고 황존이 죽었으니 그자를 찾을 차례였다.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그’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신식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제는 체내의 혼혈을 불태우고 구곡을 울려 고조의 허상을 소환한 순간, 도고 황존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죽음의 기운이 곧장 대지로 스며들어 저 멀리 떨어진 황량한 산에 흡수되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그는 고조의 허상을 통해 그 황량한 산의 내부가 텅 비어 있는 것도 그 안에 거대한 진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그 진의 중앙에 누군가의 인영이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그 인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원흉, 도고 일맥의 국사가 분명했다.
고조의 허상이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려는 찰나, 눈으로 은색 빛을 번득인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멀리 떨어진 그 황량한 산을 가리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계도 황자로부터 받은 옥패에 깃든 매우 강력한 신통술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던 고조의 허상도 오른손을 들어 그쪽을 가리켰다. 허상은 곧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지만 그 손짓의 위력은 온전히 발휘됐다.
고족
하늘의 도시 밖, 황량한 산 사방에서는 콰쾅 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고 마치 어마어마한 힘이 그 산을 공간으로부터 분리해 쥐어짜고 있는 것 같았다.
진동하던 민둥산에서 돌연 열 가지 색채의 빛이 번득였다. 빛은 빠르게 번득이며 한제가 고조의 손가락을 빌려 발휘한 신통술에 저항했다.
콰쾅! 쾅!
이어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심지어 황성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어서 황량한 산에는 거대한 균열이 일며 산을 반으로 갈랐다. 그러자 텅 빈 산 안에 배치되어 있던 거대한 진이 드러났다.
그 순간, 고조의 손짓으로 발휘된 위력 역시 번득이는 열 가지 색채의 빛과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이를 본 한제는 두 눈이 바짝 졸아든 채 소매를 휘두르며 송세정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선조의 머리와 선황의 영혼은 일찍이 거둔 상태였다.
한데 그가 막 떠나려는 순간, 황궁 지하에서 먹먹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황제를 시해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선황의 혼과 선조의 머리를 내놓아라!”
짙은 한이 담긴 거친 목소리는 광장 지하로부터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온 순간, 광장의 지면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폭이 수십 척에 달하는 거대한 균열들이 뻗어나가 광장을 산산조각 냈다.
순식간에 균열이 늘어나면서 광장의 정중앙은 폭삭 주저앉았고 지면은 바르르 흔들렸다. 광장의 수많은 고족 사람들은 표정이 급변해 빠른 속도로 물러났고 더러는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그때, 무너진 광장 중앙 지하에서 한 줄기 보라색 빛이 튀어나와 하늘로 뻗어 나갔다. 멀리서 보면 하늘을 떠받친 거대한 보라색 기둥처럼 보이는 빛이었다.
황궁은 순식간에 그 빛에 뒤덮였고 수많은 진으로 이루어진 그 빛으로 볼 때, 황궁 안의 오래된 진이 활성화된 모양이었다.
뒤이어 보라색 관 하나가 그 빛을 따라 떠올랐다. 그러자 빛은 짙은 죽음의 기운을 풍겼고 어마어마한 고족의 기운을 발산했다.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은 관은 허공으로 떠올라 수직으로 세워졌고 뚜껑이 마디마디 쪼개지면서 그 안의 해골과도 같은 사람이 드러났다.
황천에서 막 기어 나온 듯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은 데다가 세월의 풍파로 퇴색된 황포를 걸친, 새카만 온몸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는 노파였다.
한데 노파의 미간과 가슴과 단전에는 비수가 한 자루씩 꽂혀 있었다.
“성황조(聖皇祖)를 뵙습니다!”
그녀가 나타난 순간, 주위의 모든 도고 일맥 사람들이 일제히 꿇어앉았다. 하나로 합쳐진 그들의 목소리가 파문처럼 울려 퍼졌다.
이들의 공손함은 고조의 허상을 마주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를 통해 노파의 신분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대 도고 황존 중 성황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현라는 이 노파를 보자마자 추억을 더듬는 듯한 눈빛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표정은 다소 복잡하게 변해갔다.
“엽미⋯⋯.”
한제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파의 등장은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 고조의 허상을 소환했을 때 황궁의 지하에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의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게 아니었다 해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을 터였다. 연회가 열렸을 때 정전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준비된 자리는 총 네 개였기 때문이다. 대천존과 국사, 선대 황존의 자리를 제외해도 하나가 남는데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분은 엄청난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한제는 관에서 나온 노파를 보고 현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엽미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도고 일맥 역대 황존들에 관련한 역사를 떠올렸다.
수만 년에 달하는 도고 일맥 역사를 통틀어 여자의 몸으로 황존에 등극했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로 인해 그녀의 황위 계승은 당시 수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혔다. 수많은 도고 일맥 사람들은 그녀가 황존의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반대했지만 그러한 여론은 고도 대천존이 그녀를 황존으로 선언하면서 잠잠해졌다.
다른 황존들과 마찬가지로 황족 출신인 그녀가 황존으로서 이끌었던 당시 도고 일맥은 전성기를 누리며 세 고족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다. 허나 그렇게 빛나던 시절은 그녀가 퇴위함에 따라 점차 과거가 되어갔고 지금은 세 고족 중 가장 약한 세력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도고 일맥의 전성기를 이끌었기에 후대 황존들은 그녀를 성황이라 불렀으며 백성들은 그녀를 성황조라 불렀다. 그리고 이토록 열렬히 숭배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엽미였군.’
한제는 이전에 보았던 도고 일맥 황존의 역사를 기록한 옥패를 통해 현라가 대천존에 등극한 것도 그녀가 도고 일맥의 황존이었던 때의 일임을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이내 보라색 관에서 걸어 나온 해골 같은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는 서늘한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모완의 잔혼이 담긴 송세정은 노파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듯 몸을 살짝 떨었고 한제는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선조의 머리와 선황의 혼을 내놓는다면 황존을 시해한 죄는 용서해주겠다! 허나 그러지 않고 버틴다면 네가 고조의 힘을 빌릴 수 있다 해도 그 허상을 소환할 수 있다 해도 절대 이 도고 황궁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노파는 한제를 응시하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죽음의 기운이 한층 짙어졌다.
“수준으로만 따지자면 난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만 이곳은 도고 황궁이고 이곳에는 10만 개의 진이 있다. 고조가 배치한 진들로 역대 황존들조차 기껏해야 3할 정도 가동할 수 있을 뿐이지. 허나 난 이미 이곳의 진과 하나로 융합되어 황궁 안에서만큼은 불사의 몸이나 다름없다. 하여 전체의 7할 이상을 활성화할 수 있지!”
노파는 한제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음산하게 외쳤다.
한제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지만 눈빛은 한층 서늘해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시지!”
한제는 조소하며 대천존의 태양을 소환했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태양이 나타나면서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대천존 태양 아래로 그와 똑같이 생긴 도고의 허상이 나타났다. 고조의 허상은 체내의 혼혈을 불살라야만 소환할 수 있는 데다가 좀 전에 소환했던 터라 다시 소환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고조의 허상은 대천존 태양을 짊어진 채 냉랭한 눈으로 노파를 응시했다.
노파는 어스름한 두 눈을 번득이더니 해골처럼 비쩍 마른 손을 들어 허공을 꼬집으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현라가 긴 한숨을 내쉬었고 그 순간 노파의 오른손이 살짝 떨렸다.
“엽미⋯⋯ 그는 내 제자라네.”
현라는 복잡한 눈으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부드러운 빛이 어려 있었다. 마치 관에서 나온 노파가 그에게는 끔찍한 해골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어스름한 눈빛이 살짝 흔들렸던 노파는 잠시 침묵하다가 현라를 바라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였겠지.”
“엽미, 자네가 엽도 그 아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건 알아. 녀석이 어렸을 적 실수로 자네의 폐관수련 장소에 들어갔을 때, 자네는 그게 인연이라 여겼겠지.
허나 난 처음부터 그 아이가 못마땅했네. 워낙 거만하고 안하무인이었으니까. 그 아이를 황존으로 삼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 허나 녀석에게는 자네의 기운이 어려 있었기에 황존으로 임명했던 거야.”
현라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조금 더 묵직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자는 이 현라의 유일한 제자와 내 사이를 끊어놓았어. 그 대가로 결국 목숨을 잃었지. 자네는 그 아이의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나? 황존으로서 그렇게 행동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도고 황궁의 진이 정말로 내 제자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끝에 이르러서 현라의 말은 거의 호통에 가까웠다. 또한 한제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 눈빛에는 고통과 슬픔이 어렸다. 오열에 가까웠던 한제의 미소가 마지막으로 올렸던 절이, 그리고 사제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던 한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로써 둘 사이의 끈끈했던 사제관계는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참을 말없이 현라만 바라보고 있던 노파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엽도 그 녀석은 죽어 마땅해. 허나 그렇다 해도 선황은 선황! 아무런 대가 없이 죽을 수는 없는 일이지. 만약 저자가 선조의 머리와 선황의 혼을 내놓지 않는다면 빼앗아오는 수밖에. 게다가 난 도고 황궁의 진이 저자를 억압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우습군.”
한제는 불쑥 웃음을 터뜨리더니 가볍게 손을 들어 선조의 팔극도를 발휘했다. 선조의 팔극도 중 그가 천존열에서 배운 것은 여섯 개로 이를 하나하나 쏘아 보냈다.
극화도의 초록색 연기와 극수도의 파란색 파문, 그리고 극금도의 금색 빛이 나타났다.
물과 불, 금속뿐만 아니라 나무와 흙까지 오행의 극도가 발휘된 다음에 나타난 여섯 번째 극도는 사극생도(死極生道)였다.
일곱 번째인 극발도(極發道)와 마지막 여덟 번째 극궁도(極穹道)는 아직 전수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 또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파악할 자신이 있었다.
한제는 선조의 신통술을 발휘함과 동시에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 손가락 끝에서는 은빛이 피어오르며 고조의 손가락으로 응집됐다.
이를 본 노파의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진을 발휘하면 대천존이라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3할에 불과할 터였다. 허나 노파는 망설였다. 한제 주위를 맴도는 여섯 개의 극도에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똑똑히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엽도를 죽인 고조의 손가락에서도 강력한 위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엽미는 그것이 고조의 옥패를 이용한 단발성 공격인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한제가 스스로 발휘해낸 신통술이었다.
그때, 한제의 머리카락 절반이 검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반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을 때, 그의 체내에서는 하늘을 뒤흔들 듯 어마어마한 살육과 묵멸의 기운이 발산됐다.
이에 노파의 표정은 또 한 번 급변했다.
“엽미! 내 당시 자네에게 약속했지. 자네를 평생 보호해 주겠다고⋯⋯ 도고 일맥을 평생 수호하겠다고⋯⋯. 허나 난 지쳤네. 한제를 그냥 보내주게. 자네는 한제의 적수가 되지 못해. 이곳의 진으로도 옭아맬 수는 없어.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현라의 얼굴은 점차 늙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노파를 향한 그의 두 눈은 수만 년 전과 다름없이 부드러운 빛으로 반짝였다.
한참을 침묵하던 노파는 결국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황궁을 보라색으로 뒤덮었던 빛은 순간 흩어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