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51
경계를 뚫다
콰쾅!
주먹이 진에 떨어지려던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 진의 섬광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거대한 주먹은 그 모든 빛을 뚫으며 노인을 향해 돌진했다.
눈 깜짝할 사이 주먹은 노인의 몸에 닿았지만 마치 물을 가르듯 그대로 관통하며 진의 눈이 있는 대지에 꽂혔다. 이에 진동하는 지면에서 층층이 일어난 흙먼지가 사방으로 확산됐고 대지에는 우렁찬 굉음과 함께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허나 한제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노인과 번득이는 진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노인과 전송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환각이고 한제가 있는 곳과 전혀 다른 공간에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찌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느냐?”
노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가동되고 있는데도 전송되는 것은 없군. 그 진은 전송진이 아니야!”
잠시 침묵하던 한제가 불쑥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그러자 노인의 눈에서 순간 밝은 빛이 번득였다.
한제는 두 눈을 감은 채 10만 척에 달했던 몸을 축소시켜 눈 깜짝할 사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속도가 워낙 빨라 거대했던 몸이 마치 허상처럼 스르륵 사라진 것만 같았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한제는 한 걸음 내딛어 진 앞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천운자인 것 같기도 하고 칠채선존인 것 같기도 한 노인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휘둘러 불러들인 오행진신과 융합했다. 동시에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 역시 대량의 검은 기운이 되어 그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그래, 이 진은 일반적인 전송진이 아니다. 이 진의 진짜 효능은 오래된 문을 여는 것이지. 허나 안타깝게도 네가 죽인 사람이 아직 부족하구나.”
노인이 말했다.
“넌 이 진을 파괴할 수도 이 진의 가동을 막을 수도 없다. 그러니 여기 앉아서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느냐? 어쩌면 네 궁금증들을 풀어줄지도 모르지.”
이내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때 그의 뒤로는 어느새 거대한 흑백의 태양이 나타나 흑백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진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한제는 덤덤히 입을 떼며 걸음을 옮겼다. 심지어 진 가장자리를 지나 진에 파문을 일으키며 그 안쪽까지 발을 내딛었다.
한제의 발은 진을 관통해 있었지만 사실 그는 이 진이 실제로 있는 곳과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상태였다.
노인은 고작 수백 척 정도 떨어져 있는 한제를 아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노인의 눈동자가 돌연 바짝 졸아들었다. 한제 체내의 수준이 끊임없이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한제의 뒤로 나타난 대천존 태양은 전보다 확연히 더 밝아졌고 더 강력한 빛을 번득이면서 눈 깜짝할 사이 이전의 열 배 크기로 불어났다. 그러고도 더욱 격렬하게 번득이면서 점점 커져갔다.
“뭐하는 짓이냐!”
표정이 급변한 노인은 한제 뒤편의 대천존 태양을 죽일 듯 응시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그는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노인의 곁을 맴돌고 있던 거대한 파리 흉수가 왱왱 소리를 내며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흉수는 한제로부터 수십 척 떨어진 곳에 이른 뒤로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마치 그곳에 세워진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이에 분노한 파리 흉수는 쾅, 쾅 소리가 나도록 장벽에 몸을 부딪쳤다. 그러는 동안 한제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한 줄기 혼을 소환했다. 바로 선황의 혼이었다.
이 혼을 움켜쥔 채 두 눈을 감은 한제의 수준은 계속해서 높아져 심지어 공겁기 절정에 이른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한제는 이렇게 높아지고 있는 수준의 힘을 손에 쥔 혼에 주입했고 이에 선황의 혼은 두 눈을 번쩍 뜨며 눈부신 금빛을 뿜어냈다. 다만 지능과 이성을 잃은 상태인 그의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한제는 그런 선황의 혼을 뒤편의 대천존 태양 쪽으로 휙 내던졌다.
이때 한제의 대천존 태양 안으로 흐릿한 머리 하나가 내비쳤다. 바로 선조의 머리였다.
선황의 혼이 대천존 태양에 스며들어 선조의 머리와 융합된 순간, 대천존 태양은 콰쾅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또다시 빠른 속도로 불어나 어느덧 처음의 1백 배에 달할 정도가 됐다.
그 순간, 두 눈을 감은 채 바르르 떨던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타올라라, 대천존 태양!”
그러자 대천존 태양은 돌연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흑백의 불덩이 혹은 하늘을 불사르는 불바다처럼 보였다.
“이모완을 완전히 되살리기 싫은 것이냐!”
한제의 행태에 표정이 급변한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다급하게 외쳤다.
한제는 선황의 혼을 선조의 머리에 녹여 넣고 그것을 또 대천존 태양에 융합해 극강의 힘을 형성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타오르던 대천존 태양은 빠른 속도로 수축해 눈 깜짝할 사이 허무가 됐다. 이어서 대천존 태양의 모든 힘은 한제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그 순간, 한제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콰쾅!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약 이 진이 선강 대륙과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볼 수만 있을 뿐 건드릴 수 없을 테니 이 모든 공격은 아무 소용도 없을 터였다. 허나 이 진은 황궁에서 기인하는 죽음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기에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 해도 이곳과 중첩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제는 이런 놀라운 신통술을 선족 황궁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천존 태양을 불살라 허공을 파괴할 힘을 얻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강력한 힘으로 이 진이 실제로 존재하는 다른 공간으로 뚫고 나갈 셈이었다. 다시 말해, 이는 동부계에서 곧장 선강 대륙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과도 같은 신통술이었다.
입구를 따로 만들어둔 선족 황궁처럼 다른 수단이 있지 않은 이상, 공간과 공간 사이의 경계를 뚫는 데 쓰이는 이러한 신통술은 대천존이라 해도 발휘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입구가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반대편 공간으로 넘어가기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
그렇기에 도고 국사의 표정이 급변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한제의 행동이 미친 듯했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한제의 오른발이 대지에 떨어진 순간,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전송진에서는 밝은 빛이 빠르게 번득였다. 동시에 한제 앞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 하나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한제의 발에 밟힌 그물은 움푹 들어갔다. 만약 한제가 그 그물을 뚫는다면 곧장 건너편의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물은 보일 듯 말 듯했지만 한제는 그 그물이 한계에 다다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그의 몸 역시 경련하고 있었고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흘렀다. 대천존의 태양을 불살라 얻어낸 어마어마한 힘으로도 공간의 경계인 그물을 뚫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설명은 장황했지만 실제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고 국사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열 가지 색채의 빛을 한제의 발아래에 나타난 흐릿한 그물에 쏘아 보냈다. 그러자 그물은 다시금 단단해지면서 한제의 발을 튕겨내려 했다.
한편, 한제 전방의 거대한 파리 흉수는 거의 발광을 하듯 끊임없이 투명한 장벽을 뚫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장벽 너머 한제를 향해 달려들려는 기색이었다.
그물을 강화한 도고 국사는 혀끝을 깨물어 한 움큼의 피를 내뱉었다. 이 피는 발아래의 진을 그대로 지나쳐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진은 전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가동됐다. 수많은 사람이 뭔가를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지만 그게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의 피로 창궁의 혼을 가동한다!”
노인이 낮게 외치자 진에서는 수많은 혼이 나타났다.
그 혼들을 본 순간,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것들은 다름 아닌 자신이 동부계에서 죽였던 이들의 혼이었던 것이다.
이 혼들은 한 줄기 검은 기운이 되어 전송진으로부터 튀어나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른 뒤 상공에 모여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이어서 회오리 안쪽으로 허상이 나타났다.
화면처럼 나타난 허상에는 선족 구역이 비춰졌다.
선족 대륙, 산해주와 산해 사이의 몇몇 수련자가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이때 포효하고 있는 바다는 전보다 한참 아래로 꺼진 상태였고 해수면 위로 굵기가 수십만 척에 길이는 짐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검은색 기둥이 솟아 있었다. 해저로부터 솟아오른 듯한 기둥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사라졌다.
한편, 이 회오리 속 허상을 본 한제의 심신은 마구 진동했다. 그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선강 대륙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이를 악물고는 오른발을 마저 세차게 굴렀다. 보일 듯 말 듯한 그물을 그대로 찢고 진이 실제로 자리한 공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강화된 그물은 무궁무진한 힘을 폭발적으로 뿜어냈고 한제의 오른발과 그물 사이에서는 콰쾅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때, 진의 중앙에 가부좌를 튼 도고 국사가 연속으로 세 번이나 피를 토해내면서 더 많은 혼을 소환했다. 이 혼들 역시 모두 한제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들의 것으로 하나같이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검은 기운이 되어 하늘을 향해 돌진했다.
그렇게 형성된 세 개의 회오리들은 첫 번째 회오리와 함께 호 형태로 늘어섰고 새로 형성된 세 개의 회오리 안으로도 각기 다른 장면들이 떠올랐다.
운도주, 거대한 바다. 평소에는 한없이 잔잔하고 파도조차 거의 치지 않는 이 바다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고 그 섬마다 적지 않은 수련자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한데 이때, 평온하던 바닷물이 돌연 포효하며 수많은 섬을 그대로 덮쳐들었고 이에 놀란 수련자들은 곧장 날아올랐다. 허나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아래로 움푹 꺼진 해수면 위에 나타난, 첫 번째 회오리를 통해 보았던 것과 똑같은 크기의 검은 기둥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사라졌다.
나머지 두 회오리를 통해서도 선족 구역 내 해저에서 튀어나온 검은 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회오리를 통해 보이는 곳은 바다라고 볼 수도 없는, 무봉 대천존이 폐관수련을 하는 얼음의 땅이었다. 이 얼음층 안의 차가운 심해에서도 거대한 기둥이 튀어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봉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유구한 세월을 보냈던 것처럼 보이는 기둥에서는 아주 오래된 기운과 함께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평소보다 이르군!”
무봉이 중얼거렸다. 한데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번득였다.
이 모든 광경을 한제는 하늘에 나타난 회오리를 통해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도고 국사가 다섯 번째로 피를 토해내려는 그때, 한제는 허무의 분신을 소환했다.
짙은 안개가 피어올라 한제의 전신을 뒤덮었고 그의 수준을 증폭시켰다. 그 순간, 한제는 모든 힘을 응집시킨 오른발을 강하게 굴렀다.
동시에 그의 오른발 위로 중첩된 허상이 나타났다. 마치 또 다른 육신이 그와 겹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바로 허무에 있던 분신이었다.
펑!
한제의 발이 닿은 순간, 그물에는 구멍이 뚫렸다. 동시에 한제의 오른발은 진이 실존하는 공간에 닿게 됐다. 몸은 여전히 이곳에 있지만 그의 오른발은 그물 너머의 공간에 이른 것이다.
허나 이것이 한제의 한계였다. 전신(全身)을 경계 너머의 공간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허나 그의 오른발을 통해 온몸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검은 기운이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는 그물의 구멍 안으로 밀려들었다. 뒤이어 진이 실제로 자리한 공간의 진 가장자리에 응집된 검은 기운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정하고도 냉담한 눈빛의 흑발 한제가 됐다. 한제가 이 공간에 들여보낸 살육 진신이었다.
“육묵!”
도고 국사는 경악하며 그 진신의 이름을 외쳤다.
결정
흑발 한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노인의 눈에는 언뜻 두려움의 빛이 스쳤다.
“경계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공간에서 이야기를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훨씬 낫지.”
살육의 진신은 비릿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아주 기이한 공간이었다. 사방은 아득하게 넓은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딱 이 진이 그려질 정도의 공간 같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이 뭔가를 중얼중얼 외는 듯한 소리도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살육 진신은 이내 도고 국사를 바라보았다.
한편, 진 밖 한제의 본체는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모든 신식은 경계 너머의 공간에 있는 살육 진신에 집중된 상태였다.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군. 이 진신의 이름도 알고 있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