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52
흑발의 살육 진신은 서늘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지면의 진을 힐끗 훑어본 그는 이곳을 곧장 소멸시켜 버리려는 듯이 오른손을 들어 수많은 검은색 기운을 소환했다.
“이 진을 파괴하면 이모완은 절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잔혼은 잔혼일 뿐, 그것을 뽑아내 피천관의 육신에 집어넣는다 해도 그녀는 살아날 수 없어! 고조의 혼혈로 잠시나마 살려낼 방법을 찾아낸다 해도 그녀를 윤회의 굴레에서 빼낼 수는 없지. 기껏해야 수십 년 후에는 다시 시체가 될 거야! 이 진이 윤회의 제한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도고 국사가 다급히 말했다.
살육 진신은 들어 올렸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진 너머 한제의 본체가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진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거지?”
“태고 신경!”
천운자와 칠채선존을 닮은 도고 국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모완을 다시는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태고 신경으로 가야 한다. 윤회를 가려주는 그곳이라면 윤회의 본원을 활용해 이모완의 꿈의 장벽을 깨고 그 안에서 진정한 그녀의 자아를 찾아 윤회를 초월할 수 있을 게야. 태고 신경은 지금껏 일부만 열렸을 뿐이다. 허나 내가 고안해낸 방법이라면 그곳을 완전히 열 수 있어!”
노인이 외쳤으나 살육 진신은 두 눈을 서늘하게 번득이더니 잠시 멈추었던 오른손을 다시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진을 파괴해버릴 기세였다.
“이 진을 파괴하면 네가 무궁무진한 악행을 또다시 저지르지 않는 한 동부계와 선강 대륙,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진상은 영원히 알아내지 못하게 될 거다! 넌 여전히 이모완의 혼이 흩어지고 사라진 뒤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될 거고 절대로 그녀와 함께하지 못하겠지!”
도고 국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흑발의 살육 진신은 휘두르려던 손을 우뚝 멈췄다. 그 손에서 피어오른 검은 기운이 주위를 맴도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네게는 부족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 고조의 혼혈이 있지. 허나 그 혼혈을 이모완의 육신과 융합시킨다 해도 그녀를 태고 신경에 무사히 진입시킬 수는 없다. 태고 신경은 선강 대륙의 성지다.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지. 까마득히 높은 수준에 이르거나, 강력한 육신이 있어야만 한다.”
그는 흑발 한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 태고 신경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에는 완전히 열릴 것이다. 이모완을 데리고 그곳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녀의 육신을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게 만들어야 하지. 그럼 너는 그곳에서 윤회의 힘을 발휘해 이모완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내고 그녀를 윤회를 초월한 불후의 존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도고 국사는 다급하게 말하며 피를 두 번 토해냈다.
그 피는 안개처럼 뿜어져 나와 지면의 진을 통과해 한제에게 죽임을 당한 혼들로 이루어진 두 개의 회오리를 형성했다.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오는 회오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하늘에는 이전의 네 개까지 총 여섯 개의 회오리가 원에 가까운 대형을 이룬 채 떠 있었다.
이번의 두 회오리에서도 각기 다른 화면을 볼 수 있었으나, 그 화면 속에서 나타난 것은 선족 구역이 아니라 고족 구역이었다.
그중 하나는 극고 구역의 드넓은 바다를 보여주었다. 썩은 내를 풍기는 새카만 바다는 극고 일맥의 유명한 사해(死海)로 신통술을 수련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바다의 압력을 견뎌내다 보면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 그 사해에는 드물게도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파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철썩이는 사이 움푹 꺼진 사해의 해저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치면서 수면이 대폭 낮아졌다. 원래의 절반에도 못 미칠 듯했다.
이 기둥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사라진 순간, 도고 일맥과 시고 일맥 구역의 경계에서도 기둥이 하나 솟구쳐 올랐다. 이 기둥이 일으킨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기이한 광경에 많은 사람들의 심신이 진동했다. 허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태고 신경에 있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도고 국사가 입가의 피를 훔쳐내며 말했다.
흑발의 살육 진신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있는 곳은 이 진이 자리한 이 공간과는 또 다르구나.”
이어서 살육 진신은 오른손으로 도고 국사를 가리켰다. 그 손짓에 대량의 검은 기운이 휙 하고 쏘아져 나가 눈 깜짝할 사이 도고 국사 앞에 이르렀다.
검은 기운은 순식간에 도고 국사에게 닿았지만 그대로 지나쳐가면서 노인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노인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허나 그는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살육 진신을 바라보았다.
“난 네 말을 믿지 않는다!”
진 밖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제의 본체가 진 안의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살육 진신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는 상대의 말에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눈치였다.
“하얀 머리카락 한 올과 주먹만 한 두개골을 가지고 있느냐?”
도고 국사가 이를 악문 채 불쑥 물었다.
그 질문에 살육 진신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고 진 밖의 본체 또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역시 그걸 얻었구나!”
한제의 반응을 본 도고 국사는 감탄한 듯 외쳤다.
“태고 신경에 들어가 그 머리카락과 두개골의 안내에 따르면 진상을 찾을 수 있다! 이 진을 파괴하면 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겠지만 너 역시 영원히 진상을 알아낼 수 없게 되겠지.”
도고 국사는 살육 진신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일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한제가 경계를 뚫고 이 진이 있는 공간에 이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살육 진신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그는 영혼으로부터 기인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거지?’
그는 속으로 악을 쓰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해온 진이 한제의 의지에 따라 당장이라도 파괴될 수 있게 된 지금의 상황에 그는 비밀을 어느 정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군. 좋아, 이 진은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대신 어째서 내 본신의 손에 죽임을 당한 이들의 혼이 필요했던 건지 설명해라!”
흑발의 살육 진신이 차갑게 몰아붙이자 도고 국사는 망설이는 듯했다. 허나 한제가 다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검은 기운을 피워올리자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태고 신경에는⋯⋯.”
이를 악문 노인이 막 설명을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몸을 바르르 떨더니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덜덜 떨리는 그의 몸은 당장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듯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건⋯⋯ 이건 계의 법칙이야! 말할 수 없어! 말하면 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도고 국사가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그래? 그렇다면 그 대신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
흑발의 살육 진신은 한 걸음 성큼 나아가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칠채가 나다. 천운자 역시 나고 도고 국사 또한 나야! 심지어는⋯⋯.”
노인은 말을 미처 맺지 못한 채 다시 몸을 바르르 떨었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말할 수 없어! 이한제, 이 진은 내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네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런데도 이 진을 파괴하겠다면 나로서는 막을 수 없다!”
도고 국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한제가 경계를 뚫고 살육 진신을 이 공간으로 보내지 못했더라면 주도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을 터였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한제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제의 본체는 복잡한 눈빛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반응을 통해 그는 어떤 추측을 할 수 있었으나, 그 자신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는 모완과 관련된 일이었고 노인의 말이 사실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혼혈로는 모완을 잠시만 살려낼 수 있을 뿐, 윤회를 초월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모완은 다시 늙어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윤회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태고 신경에 가야 하는 건지도…’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진 위에 있던 살육 진신은 오른손을 거두었다. 온몸에서 피어올랐던 검은 기운도 더는 발산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진을 가동해!”
살육 진신이 서늘하게 말했다.
도고 국사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의미심장한 눈으로 진 밖의 한제 본체를 힐끔 보더니 또다시 두 차례 피를 토해냈다.
피로 소환된 두 덩어리의 검은 회오리는 이번에도 하늘로 솟아올랐다. 총 여덟 개가 된 하늘 위의 회오리는 완벽한 원을 이루었다. 그와 동시에 고족 구역 어딘가의 모습이 두 회오리를 통해 드러났다.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콰쾅 소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동안 그 우렁찬 소리에 지면마저 진동했다.
하늘에 나타난 여덟 개의 검은 회오리가 점점 빠르게 회전하던 중, 그중 하나가 돌연 검은 빛을 뿜어냈다. 먹물처럼 검은 빛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 눈 깜짝할 사이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이곳의 하늘뿐만이 아니라 고족 구역 전역의 하늘이 마치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워졌고 드넓은 바다의 하늘은 물론 선족 구역 하늘 역시 온통 검게 변했다. 선강 대륙 전역이 밤하늘에 뒤덮인 것이다.
딱 아홉을 셌을 때, 선강 대륙 전역을 뒤덮었던 밤하늘은 흩어져 사라졌다. 동시에 한제는 하늘에 나타났던 여덟 개의 회오리 중 하나가 사라졌음을 눈치챘고 한 줄기의 기이한 감응을 느꼈다. 고족과 선족 구역 사이,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그 드넓은 바다 위에 돌연 거대한 기둥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때였다. 하늘에 남아 있던 일곱 개의 회오리 중 또 하나가 검은 빛으로 폭발했다. 좀 전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다시 아홉을 셌을 때 어두워졌던 하늘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회오리는 여섯 개만 남아 있었지만 한제의 머릿속에 떠오른 드넓은 바다에는 두 번째 기둥이 나타난 상태였다.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는 동안 선강 대륙 전역은 진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드넓은 바다는 평소보다 더 거칠게 요동쳤고 그 바다에서 일어난 거친 파도가 요란하게 철썩거렸다.
그 바다 위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흐릿하게나마 목격한 한제의 심신은 바르르 진동했다. 선강 대륙 전역에 이토록 기이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대천존이 될 수 있는 땅, 태고 신경뿐일 터였다.
“태고 신경⋯⋯.”
한제가 중얼거렸다. 이전에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곳이 열리는 과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섯 번째로 어두워졌던 하늘이 다시 밝아졌고 한제는 하늘에 남은 회오리가 세 개뿐임을 확인했다.
진 안의 천운자는 잔뜩 격앙된 표정이었다. 이날만을 오랜 세월 기다려온 그의 눈에는 갈망과 광기가 가득했다.
스승이라 부를 수 없는 스승
선족 구역, 조성. 제산에서 폐관수련 중이던 구제 대천존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훌쩍 날렸다. 그렇게 하늘로 날아올라 먼 곳을 내다보던 그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분명 태고 신경이군. 이번에는 고족이 열고 있어. 한데 예정보다 이른데⋯⋯. 태고 신경이 예정보다 일찍 열리는 일은 없었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처음으로 완전히 열릴 겁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라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자였다. 그녀는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제가 내다볼 수 있는 건 이 정도예요. 제 예상대로라면 이번에 태고 신경이 완전히 열리기까지는 수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해요.”
“완전히 열린다고?”
구제 대천존의 눈에서 감출 수 없는 격앙된 감정이 드러났다.
“만약 완전히 열린다면 그 안에서는 분명 대천존을 뛰어넘어 선조와 같은 수준에 이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터!”
★ ★ ★
선족 구역, 도일종. 최근 몇 년간 도일종은 음산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많은 강자가 이유도 없이 죽음을 맞은 데다가 도일 대천존은 틀어박혀 폐관수련에만 매달렸기에 이곳은 점점 인적이 끊겨갔다.
한데 지금, 도일종에서는 하늘을 뒤흔들 듯 요란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고함과 함께 무너져 내린 산봉우리에서 온몸이 회색 기운에 휩싸인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