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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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 구역. 계도 황자의 황궁을 뒤덮은 안개에서 태양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마구 요동치던 안개 너머의 광경이 천천히 어두운 밤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안개 속에서 낮과 밤이 아홉 번 교차된 순간, 작은 소리가 행궁에 울려 퍼졌고 주위를 뒤덮은 안개는 하나하나의 번득이는 문양으로 바뀌었다. 각각의 문양에는 금제의 본원의 힘이 담겨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몇 시진이 지났다. 그동안 금제의 문양은 점점 더 많아졌고 낮과 밤의 교차는 갈수록 빈번해졌다. 그러나 융합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낮과 밤의 교차가 허약해지면서 무너질 듯했고 대량의 금제는 흩어질 조짐을 보였다.
그때, 돌연 요란한 쉭 소리가 울려 퍼지며 행궁 안에서 다섯 갈래의 빛이 튀어 나갔다. 각각의 빛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그것들은 곧 하나로 모여 허상을 응집했다. 바로 한제의 모습을 한 허상이었다.
허나 이는 한제의 본체가 아니라 오행 진신이었다.
하늘에 우뚝 선 진신은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셔 세상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오행의 힘을 빨아들이면서 부풀어 올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반인 크기에서 1천 척까지 불어났다. 오행 진신은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에는 불이 나타났으며, 빗방울이 사방을 뒤덮었고 초목이 말라붙었다. 금속 본원의 힘도 움직이면서 세상의 힘이 되어 오행 진신의 입으로 흘러들었다.
콰르릉!
오행 진신의 허상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또다시 부풀어 올라 1만 척에 이르는 거인이 됐다.
오행 진신은 두 팔을 펼쳐 오행 본원을 사방에 드리웠다. 그러자 교차되던 낮과 밤은 안정됐고 번득이는 금제의 문양이 더 이상 흩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제와 태초, 묵멸의 세 본원이 막 안정되려던 순간…
“캬오오!”
잔인하고 난폭한 포효가 대지 깊숙한 곳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이 광기 어린 포효는 어마어마한 힘을 품은 채 뿜어져 나왔고 이곳 나후군에 머물고 있던 시고 일맥 사람들은 심신이 진동하며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였다.
계도 황자 역시 몸을 바르르 떨면서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외쳤다.
“나후라!”
계도보다 얼굴이 더 창백해진 보라색 도포의 청년은 나후라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계도 황자와 관련한 소문을 떠올렸다.
소문에 의하면 계도 황자가 태어났을 때도 하늘의 신호가 나타났다. 다만 그 신호는 대흉을 의미하는 허상이었다. 이에 황족에서는 그 사실을 숨긴 채 당시의 국사를 시켜 그 허상을 흩어버렸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지난 1백여 년 동안 시고 일맥 사이에서는 그 소문이 다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들리는 바로는 계도 황자가 행궁을 이곳 나후군(羅睺郡)에 세운 것도 이곳에 당시 고조와 맞서다 패한 흉수 나후라가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나후라를 제압하면서 계도는 그 기운으로 스스로를 자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죽은 국사가 그에게 제안한 것이기도 했다.
포효가 갈수록 격렬해지는 와중에 저 멀리 하늘에서 거대한 허상이 하나 나타났다.
그것은 잔인함과 광기가 어린 거대한 눈이 하나 달린 구(球) 형태의 살덩어리, 바로 나후라였다.
이 허상의 구는 나타나자마자 행궁 상공의 오행 진신과 본원의 허상을 죽일 듯 노려보았고 그 주위로 피어오른 검은색 기운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오행 진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기운과 오행 진신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포효는 날카로워졌다.
행궁 밀실 안. 한제의 손바닥 위로 소인(小人)이 가부좌를 튼 채 호흡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고 그의 오른손 위에 나타나 있던 소인 역시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은 지혜와 예지의 빛으로 가득했다.
뒤이어 한제의 손바닥에 꿇어앉은 소인은 한제를 향해 머리를 찧었다. 연달아 아홉 번이나 머리를 찧은 그는 한제가 오른손을 움켜쥐자 흩어져 사라졌다.
“혼연도의 술법은 과연 현묘하군!”
중얼거리던 한제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며 냉소했다. 그는 20년 전 이 술법으로 예측한 끝에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을 완전히 융합시킬 계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시도를 통해 마침내 그 진신을 융합하는 데에는 대흉의 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누군가가 대흉을 보내오리라는 것 역시 예측한 바 있는데 과연 그대로 됐군!”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상공을 가리켰다.
그의 손짓에 돌연 하늘에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교차되던 낮과 밤은 우뚝 멈추었고 수없이 많은 금제 문양의 번득임도 멈췄다. 심지어 오행 진신 역시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오행 진신을 향해 달려들던 나후라 또한 우뚝 멎었고 포효도 뚝 끊겨버렸다. 허상의 몸뚱어리는 허공에 고정됐고 외눈에 어린 잔인하고 포악한 빛도 응고됐다.
정신술!
한제의 높은 수준으로 발휘한 정신술의 위력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나후라가 멈춰버린 순간 낮과 밤의 뒤바뀜은 회복됐고 문양의 번득임도 돌아왔으며, 오행 진신 역시 다시 움직이게 됐다.
뒤이어 수없이 많은 문양이 멈춰 있는 나후라를 향해 몰려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 그 체내로 파고들었다. 나후라 허상의 육신은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면서 빠른 속도로 절반 이상 축소됐다.
외눈에 어린 잔인하고 포악한 빛은 흩어져 사라지고 그 대신 허상의 인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모호했던 인영은 빠른 속도로 응결되면서 이내 한제가 됐다.
한제와 똑같이 생긴 이 인영은 미소를 머금은 채 외눈으로부터 한 걸음 나와 허공에 섰다. 전신에서는 금제 본원의 힘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대흉의 혼에 담긴 힘을 빌려 응집해낸 금제 본원의 진신이었다.
동시에 낮과 밤이 교차되던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멈춰 있는 나후라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나후라는 온몸을 바르르 떨더니 다시 한번 수축됐고 외눈에서는 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허상으로 나타난 인영은 마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번득이며 천천히 응결되더니 눈에서부터 걸어 나와 금제 본원의 진신 곁에 섰다.
이 인영은 한제가 1백 년의 폐관수련을 통해 유월과 도망족이 가진 동부 창조의 힘으로 세상의 운행을 대체하고 낮과 밤을 수차례 교차시킨 끝에 응집해낸 태초 본원의 진신이었다.
웅-! 웅-!
대기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에 이어 어두운 묵멸의 본원을 대표하는, 주위를 뒤덮은 안개가 몰려들어 순식간에 나후라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나후라는 한 번 더 수축해 이전의 절반 정도로 줄어버렸다. 그리고 그때, 충혈된 외눈에서 세 번째 본원 진신이 걸어 나왔다.
묵멸 본원의 진신이었다.
1백여 년 동안 한제는 도망족의 술법과 유월 신통술을 통해 태초와 묵멸을 진신으로 만들어낼 깨달음을 얻고 응집해내는 데까지 성공한 상태였다. 그러나 끝내 이 특수 본원의 진신들을 하나로 융합하지는 못했다.
이에 예측을 통해 대흉의 혼의 힘을 빌리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다섯 개의 진신에 대흉 혼의 힘을 흡수시키고 그 혼 특유의 본능인 이끌림에 따라 융합하는 방법이었다.
금제와 태초, 묵멸 세 본원 진신이 나타난 순간, 밀실 안의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더니 검은 전광을 두른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을 소환했다. 진신은 곧장 밀실 밖의 하늘로 쏘아져 나갔다.
하늘로 올라간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은 검은 호 형태의 전광을 사방으로 확산시켰다.
콰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1백 년간의 자양과 두 번째 제련을 통해 한제는 이미 살육과 분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됐고 서로를 배반할 가능성 역시 없어진 셈이었다. 게다가 이 살육의 본원은 자양으로 인해 진신으로 응집될 힘 역시 갖게 됐다.
“다섯 개의 진신을 하나로 융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기 달렸다!”
한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결인을 그리자 거대한 신념이 콰르릉 하고 뿜어져 나와 사방을 뒤덮었다.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이 아직도 움직임을 회복하지 못한 나후라의 체내로 파고들자 이 대흉의 육체는 격렬하게 진동하면서 급속도로 줄어들더니 끝내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 거대한 외눈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둡고 칙칙한 외눈은 멀리서 보면 꼭 하나의 알처럼 보였다.
답천의 길, 공멸도(空滅道)!
1각이 지났을 무렵, 외눈에는 수없이 많은 균열이 일더니 곧 콰쾅 하고 터져버렸고 그 안에서는 두 개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하나는 일찍이 진신으로 응집됐던 천둥번개의 진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냉혹하고 무정한 흑발의 살육 진신이었다.
살육 진신은 싸늘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체내로부터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중생을 파멸시키고 온 세상을 소멸시키려는 살육의 본원의 힘을 대표하는 기운이었다.
“난 육묵이다.”
흑발 한제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대지를 훑어보았다.
“크아악!”
행궁의 경비병들은 그 시선을 받은 순간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이나 죽음이 아니라 순수한 두려움에 기인한 비명이었다.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두려움!
대전 안에 있는 보라색 도포의 청년도 계도 황자도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난 육묵이다!”
흑발 한제가 돌연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하늘을 향해 낮게 외쳤다.
그때, 행궁 안에서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흑발 한제는 돌연 고통과 광기가 어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 틈을 타 몸을 홱 돌린 천둥번개의 진신이 한 줄기 번개가 되어 흑발 한제에게 달려들어 눈 깜짝할 사이 그 안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검은 전광이 주위를 가득 채우며 번득였다.
뒤이어 두 눈을 번득이다가 몸을 날린 금제 본원의 진신은 수없이 많은 문양이 되어 금제의 폭풍을 형성하더니 흑발 한제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콰쾅!
금제 본원이 녹아들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다음 순간, 태초 본원의 진신과 묵멸 본원의 진신이 동시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흑백의 두 갈래 빛이 되어 흑발 한제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난 육묵이다!”
흑발 한제는 일그러진 얼굴로 포효했다. 그의 몸에서는 중첩된 네 개의 진신이 나타난 상태였다. 마치 그 진신들을 체내에서 몰아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도 나를 구속할 수는 없어! 난 육묵이다!”
날카롭게 울부짖는 사이, 그의 몸에 중첩된 진신들이 떨어져 나가려는 듯 몇 촌이나 체외로 밀려났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때, 두 번째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으…”
그러자 흑발 한제는 또다시 경련했고 동시에 오행 진신이 그 위에 나타났다. 오행 진신은 1만 척에 달했던 거대한 몸이 즉시 줄어들면서 무시무시한 오행의 힘을 발산하며 하나의 손바닥이 되어 흑발 한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난 육묵이다!”
고개를 번쩍 쳐든 흑발 한제가 두 눈을 파괴적으로 번득이며 저항하려는 순간, 반경 10만 척 안에서 강력한 위압감이 나타났다. 세상의 힘을 통제하려는 신념이 깃든 이 위압감은 검은 안개를 강력하게 짓눌렀다.
동시에 흑발 한제 뒤로 나후라의 허상이 나타났고 갈가리 찢긴 모습이었지만 수없이 많은 검은 선으로 연결된 나후라는 이 위압감 아래 융합됐고 이에 따라 흑발 한제에게 중첩되어 있던 허상들은 더 이상 흩어지지 않고 그 체내로 녹아들었다.
“넌 내 두 번째 진신이다. 육묵이라는 이름을 가진 네게 형벌이라는 호를 줄 터! 앞으로 너는 이 이한제를 대신해 나의 적을 벌하게 될 것이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흑발 한제 뒤에 나타난 나후라의 허상은 완전히 아물었다. 동시에 흑발 한제에 중첩되어 있던 네 개의 허상은 그 체내로 완벽하게 녹아들어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사방에 드리웠던 강력한 위압감은 차차 흩어져 사라졌고 세상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흑발 한제는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형벌 육묵이다!”
무궁무진한 서늘함이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한제의 살기와 파괴적인 의지를 대표하는 그는 하늘과 대지를 벌벌 떨게 하고 한제의 모든 적에게 두려움을 안기게 될 터였다.
육묵은 냉랭한 눈으로 저 먼 곳을 쳐다보았다. 아주 먼 곳을 향한 그 눈빛은 시고 황성 밖 원시산 꼭대기까지 뻗었고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송천은 두 눈을 홉떴다.
“이,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