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59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태 죽은 척하고 있던 천외 흉수의 혼들이 갑자기 이렇게 나와 애원을 하는 것인가? 대체 무엇을 느꼈기에!”
구제의 목소리에도 두려움이 어렸다. 허나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분명한 것은 72개 천외 흉수 혼들이 하늘을 향해 애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자는 말없이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녀의 오른손 위에 나타난 소인은 끊임없이 머리를 찧었지만 해자는 그 어떤 결과도 얻지 못했다.
해자는 돌연 혀끝을 깨물어 한 움큼의 피를 손바닥 위의 소인에게 뿜었다. 피를 뒤집어써 붉게 물든 소인은 처연하게 울부짖으며 해자를 향해 다시 머리를 찧었다.
순간, 해자는 몸을 바르르 떨며 얼굴이 창백해진 채 숨을 헐떡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혼들이 느낀 것은 답천의 눈길입니다! 선강 대륙 하늘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뭐라!”
구제는 표정이 급변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순간 그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제외하고 그가 보지 못할 것은 없었으나, 이때 천외에서 온 한 줄기 시선이 어쩌면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답천이라니⋯⋯. 이, 이럴 수가⋯⋯.”
구제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통제를 벗어난 체내의 수준으로 인해 그는 노인에서 중년이 됐다가 다시 노인이 되기를 반복했다.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한편, 한제는 선족 구역에 짓눌려 있던 72마리 천외 흉수 혼들이 자신에게 애원하듯 울부짖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또한 충격에 휩싸인 도일과 무봉, 쌍자를 그리고 제산의 구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한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순간만 구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한제는 또한 해자와 황궁 아래 지하 궁전에 산봉우리가 되어 있는 연도비도 바라보았다,
“주낙구, 선배님을 뵙습니다. 분부만 내리신다면 전력을 다해 완수하겠습니다!”
제산 위, 창백한 얼굴의 구제가 몸을 훌쩍 날려 상공으로 떠오른 채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 대천존이 된 이래 누구에게도 절을 올린 적이 없던 그였지만 지금은 짙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극도로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인사에 무엇도 돌아오지 않았다.
72마리 천외 흉수 허상이 한참을 울부짖다가 점차 절망하면서 하나둘 흩어져 사라지면서 진동하던 대지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자가⋯⋯ 갔습니다.”
해자가 몸을 바르르 떨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구제는 그 후로도 절을 올린 채 2각을 더 있다가 몸을 일으키더니 지상으로 내려왔다.
한제는 선족 구역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둔 상태였다. 그로서는 천우와 연도비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그는 고족 구역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고족 구역에서도 방금 전 선족 구역과 같은 진동이 시작됐다.
대지가 경련하면서 36개 군에 제압되어 있던 36마리 천외 흉수의 혼들이 분분히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이전에 한제가 일부를 흡수했던 나후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상태였다. 수련성처럼 거대한 살덩어리 머리와 용의 것 같은 꼬리를 무려 아홉 개나 가진 녀석은 하늘을 향해 애원하듯 울부짖었다.
폐관수련을 하고 있던 현라는 이 기이한 상황에 곧장 날아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찬 숨을 들이마셨다.
시고 일맥의 송천도 허공에 떠올라 36마리의 천외 흉수 혼들이 보이는 변화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 설마… 이한제와 관련된 일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신비로운 극고 일맥의 대천존 역시 폐관수련을 하다가 이 기이한 상황을 감지했다.
한제는 그 모든 것을 느끼며 고도산으로 시선을 옮겼다. 높이 솟은 탑 안 꼭대기 층에는 안개로 모습을 감싼 인영이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번쩍 뜬 인영은 덤덤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한제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은 순간, 한제는 선강 대륙의 최강자인 상대가 분명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그 경지에 이르렀구나. 몇 번째 다리에 올라 있느냐?”
안개 속 인영이 물었다.
“두 번째다. 너는?”
잠시 침묵하던 한제는 신식을 내어 답했다. 지금 그의 수준으로도 안개 속에 가려진 고도 대천존의 생김새를 볼 수는 없었다.
“난 오래전 다섯 번째 다리를 건넌 이래 여태 여섯 번째 다리에 멈춰 있지.”
“아홉 번째 다리를 건너면 네 번째 단계에 이를 수 있나?”
한제는 기대감을 품을 채 물었다.
“나도 모른다. 아홉 번째 다리를 건넌 자는 없을 것이다.”
안개 속 인영의 답에 한제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없다니? 고조와 선조는?”
“그들 모두 여덟 번째 다리를 건너 아홉 번째 다리에서 멈췄다.”
“이 답천교는 대체 어떤 곳이지?”
“선강 대륙은 매우 넓다. 허나 천외에는 그보다 더 많은 대륙이 있지.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답천교는 모든 생명에 주어지는 공동의 길이다.”
고도 대천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목소리에는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 그 역시 답천교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제는 말없이 시선을 거뒀다.
시선을 거둔 한제의 눈빛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고족 구역과 선족 구역 사이, 수직으로 선 채 회오리치는 바닷물 속 태고 신경의 문이었다.
두 번째 답천교 위에 선 지금도 태고 신경은 여전히 흐릿했다.
폭풍처럼 회오리치는 바닷물을 한참 응시하던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제는 여전히 그 기이한 공간의 두 번째 답천교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한제는 놀랍게도 다리 앞쪽이 아닌 거의 끝에 이르러 있었다. 마치 이전의 모든 일들이 그가 걸음을 내딛는 동안 발생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한제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세 번째, 네 번째… 아홉 번째 다리와 그 뒤의 장막 속 흐릿한 광경까지 바라보았다. 너무도 멀어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하나하나의 다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봉우리처럼 높았고 그 아득함에 멈춰서고 싶어졌다.
멈추고 싶다는 마음은 고개를 들자마자 순식간에 한제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돌려 이곳을 떠나라고 더는 나아가지 말라고 누군가가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제는 두 번째 다리 끝에 서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두 번째 다리를 완전히 건널 수 있을 터였다. 허나 그 마지막 걸음을 그는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멈추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 동안 내내 그 자리에 선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번째 다리에서 벗어났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인가. 만약 도심이 굳건하지 않았다면 하늘에 저항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뭔가를 지키려는 집착이 없었다면 이 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을 거야.”
한제는 중얼거리며 세 번째 다리를 향해 나아갔다.
세 번째 다리는 매우 멀기도 또 가깝기도 했다. 하지만 사흘을 걸었음에도 아직 그 앞에 이르지 못했다. 또다시 그리고 또다시 사흘을 걸었지만 세 번째 다리는 여전히 매우 먼 동시에 가깝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세 번의 사흘이 지났을 때, 한제는 우뚝 멈춰 서더니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리고는 기이한 빛이 번득이던 눈을 천천히 감았다. 뒤이어 육신의 눈으로 보지도 신식으로 느끼지도 않겠다는 듯 신식마저 거두고는 방향을 살피지도 않은 채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아홉 번째 걸음을 내딛은 순간, 한제는 돌연 곁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시에 부드러운 빛이 눈꺼풀을 통과해 들어왔고 비에 젖은 흙 내음과 너무도 그리운 냄새가 느껴졌다. 톱밥과 담배 냄새…
한제는 우뚝 멈춰 섰다.
“한제야, 공부는 잘하고 있느냐? 내년에 과거시험이 있으니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너는 절대로 나처럼 평생을 이 마을에 갇혀 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어휴, 또 잔소리. 한제는 꼭 붙을 거니까 걱정 마요.”
부모님의 목소리였다. 수천 년 만에 다시 듣게 된,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는 그를 단번에 수천 년 전의 한적한 산골 마을로 데려다주었다.
가만히 서서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던 한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뜨라고 어서 부모님을 보라고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제는 만약 지금 눈을 뜬다면 세 번째 다리로 향하던 걸음은 멈추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다리는 세상의 규칙을 신식에 녹여 넣었고 두 번째 다리는 답천의 눈을 경험하게 하면서 스스로의 도심이 충분히 굳건한지 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왜 두 번째 다리가 그런 물음을 던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제는 지금 이 순간 그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세 번째 다리는 심마와 같았다. 도심이 굳건하고 결연하다면 계속 나아가면서 어떤 유혹이 닥쳐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테고 그래야 세 번째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눈을 뜬다면 그는 심마, 즉 자신의 평생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럴 경우 세 번째 다리를 건널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질 터였다.
귓가에는 계속해서 부모님의 음성이 들려왔고 한제의 눈물은 마를 줄을 몰랐다. 그리고… 한제는 두 눈을 떴다.
그 순간, 익숙한 집과 정원과 그리운 식탁 위로 차려진 음식들이 보였다.
옆에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곰방대를 물고 있는 아버지가 엄하면서도 애정과 부드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어머니가 따뜻한 음식이 담긴 상을 들고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검은 머릿속에 섞인 하얀 머리마저 한제에게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부모님은 그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보호막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한제는 눈물로 범벅이 된 와중에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과 그리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눈을 뜨자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는데 한제는 그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애썼다.
마지막 광경까지 전부 부서져 흩어졌을 때, 한제는 여전히 두 번째 다리 아래에 서 있었다. 세 번째 다리는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의 부모님은 수련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었기에 되살릴 수 없다. 윤회의 고리는 일반인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분들에 대한 한제의 기억은 그대로였으며, 이 기억을 지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목숨보다도 귀한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모완이 나타났더라도 가짜라면 눈을 뜨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가짜라는 걸 알더라도 부모님 앞에서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지. 후회는 없다. 한데 이곳을 만든 사람, 굳건한 도심을 유지해야만 세 번째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자는 대체 누굴까?”
한제가 중얼거렸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애정, 벗에 대한 우정은 이 이한제가 평생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눈을 뜨지 않을 수는 없지. 난 두 눈으로 그들을 보면서도 도심을 열고 그 모든 것을 수용하겠어.”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아홉 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는 이번에는 모은미와 이천매, 그리고 이모완을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아홉 걸음에는 자신의 불쌍한 아들, 이평을 보게 됐다.
환상 속의 아들은 한제의 손을 잡아 끌면서 평생 아버지와 함께하기 위해 수련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말했다. 세상에 아버지만 쓸쓸하게 남겨둘 수는 없다고 했다. 곁에서 따를 수 있게라도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 후로도 한제는 사도환과 청수, 둔천, 늙은 주작을 비롯한 수많은 은인을 보았다. 그는 그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대두(大頭), 홍접, 청상, 주일, 청림 등이 차례로 보였다. 한제는 이들과의 만남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렇게 끊임없이 걷는 동안 한제는 감정을 내려놓은 채 울고 웃고 아파하고 슬퍼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고 한제는 세 번째 다리 끝에 이르러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야 마저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네 번째 다리가 보였다. 그 뒤로 더 먼 곳, 아홉 번째 다리 뒤편의 허상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명확하지는 않았다. 그저 허상 속에 두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이들과의 만남에 휘몰아친 감정과 기억들을 안은 채 다시금 나아간 한제는 또다시 한참을 걸은 후에야 네 번째 다리를 보게 됐다.
이전의 것들보다 훨씬 더 큰 이 다리는 짙은 위압감을 사방으로 풍겼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그대로 네 번째 다리를 지나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